[시선2035] 이생망? 인생마!
“뭐야 저 사람 ‘이번 생은 망했다’고 한 거야?” 지난달 28일 서울에서 열린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마포대교 위를 뛸 때 누군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10㎞ 코스의 7㎞ 지점을 지날 때쯤 지켜보던 시민이 “인생은 마라톤이다”고 응원한 소리를 잘못 들었던 것. 곁에서 뛰던 이들이 웃으며 정정해줬지만, 완주 전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느낌이 한 번은 꼭 드는 마라톤이 왜 인생에 비유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달리기를 즐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날 대회 주최 측에 따르면 참가자 수는 2만명으로 지난해 보다 약 7000명이 늘었다. 이중 2030 참가자는 66%(1만3294명)다. 몇 달 전부터, 취미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불규칙한 퇴근, 업무상 저녁 약속 때문에 ‘러닝 크루’에 들어가거나 강습을 받기는 어려웠다. 유튜브를 통해 자세와 호흡을 익혔고, 러닝 앱의 도움을 받아 훈련했다. 30분만 뛰어도 아프던 무릎은 강해졌고, 10㎞를 무리 없이 뛸 수 있게 됐다. 스트레스로 번아웃 조짐이 보일 때면 술자리 대신 러닝화를 찾는다. 공황장애를 겪은 웹툰 작가 기안84는 최근 “달리기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죽었을 수도 있다. 달리기를 시작해 지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며 방송과 유튜브에서 ‘달리기 전도사’가 됐다.
바람을 맞고, 도시의 풍경 속을 뛰다 보면 호흡과 자세, 뛰는 나 자신뿐 아니라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게 된다. 아울러 일과 삶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만족스럽게 지속 가능한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러면 일상과 현실에 담담해지고, 몸과 마음이 단단해지는 기분이 든다. 달리는 법 이외에도 견디는 법, 사는 법은 물론 나에 대해 배워가는 느낌이랄까. 러너(runner)가 된다는 건 배우는 러너(learner)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매일매일 달리면서 또는 마라톤 경기를 거듭하면서 목표 달성의 기준치를 조금씩 높여가며 그것을 달성하는 데 따라 나 자신의 향상을 도모해 나갔다”고 썼다. 하루키는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나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라고 강조했다.
SNS(소셜미디어)를 보다 타인이 과시하는 행복한 모습에 초라함을 느끼고, 자극적인 숏폼 영상들을 넋 놓고 보다 자괴감이 드는 건 현대인의 피할 수 없는 일상이다. 스마트폰을 두고,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달리기만한 디지털 디톡스(detox)가 있을까. 뛰다 보면 비교 대상은 인스타그램의 누군가 대신, 어제의 나로 바뀌게 된다. 지금 무기력하다면, 햇살과 바람을 느끼며 10분만 뛰어보는 건 어떨까. ‘이생망’의 우울감이 ‘인생은 마라톤’이란 의연함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마침 뛰기 좋은 5월이다.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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