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 이씨의 본고장 전주에서 여성 '가계'를 말한 이유

김성호 2024. 5. 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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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710]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가계>

[김성호 기자]

<가계>는 19분짜리 짧은 단편이다. 채 20분이 되지 않는 단편에서 허투루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없다 해도 좋겠지만, 그중에서도 유달리 의미 깊은 장면을 꼽자면 역시 처음이 아닌가 한다. 영화의 오프닝은 첫 인상을 결정하고, 그로부터 어떤 관객을 영화를 끝까지 집중해 볼 의지를 다진다. 반면 처음이 별로인 영화치고 건질 만한 구석이 있는 작품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창작자라면 관객과 처음 만나는 순간을 공들여 찍게 마련이다. 첫 장면은 이후 러닝타임 동안 표현하는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적어도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끔 분위기를 조성한다. 특히 주어진 여유가 많지 않은 단편이라면, 첫 장면이 갖는 중요성이 더욱 크다고 하겠다.

<가계>의 첫 장면은 함께 상영된 다섯 작품 가운데 단연 인상적이다. 가녀린 여성, 흠집 하나 없는 뒷모습이 강바람을 맞고 서 있다. 하늘거리는 머리카락과 가볍게 흔들리는 몸을 그대로 잡아내며 카메라는 한참이나 그녀의 뒤만 보고 섰다. 여성의 나신, 그 자체로 배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던 카메라는 차츰 허리춤을 확대하다 이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 전주국제영화제 스틸컷
ⓒ JIFF
 
수술 보호자가 필요해 재회한 부녀

영화는 여자의 이야기다. 서른쯤은 넘겨 보이는 여자가 꽤나 오랜 만에 제 아버지를 찾아간다. 이유는 수술을 하는데 보호자가 필요해서다. 따로 짝을 만나지 못하였고 같이 사는 가족도 없었던지라 시골에 홀로 있는 아버지를 찾은 것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듯 보이는 부녀 사이가 한눈에 보기에도 어색한데, 아버지는 그녀의 말이 한 마디 끝날 때마다 연신 담배를 찾아 태운다.

여자는 난소에 종기가 나 제거수술을 받아야 한다. 종기가 얼마나 큰지를 묻는 아버지의 물음에 여자는 10cm나 된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10cm 짜리 종기, 아버지는 어쩌면 아이를 낳을 수 없으리라고 제 경험으로 터득한 지식을 풀어놓는다. 여자의 엄마가 아이를 낳았을 때 자궁에 칼을 댔다고, 그 뒤 몸이 푸르딩딩하게 불었다고, 여자는 함부로 자궁에 칼을 대는 게 아니라고, 그렇고 그런 말들이 투박하게 던져진다. 그리고는 벌써 몇 대 째인가 또 한 개피 담배를 집어 피운다.

여자에게 임신은 무엇인가. 개체로서의 여성, 인간으로서의 여성은 오랫동안 그 육체에 붙들려 지난한 싸움을 이어왔다. 아들을 낳고 딸을 낳고 마을을 낳고 인류를 낳았다. 최초의 현생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부터 4만 여 년이 흐르는 동안 얼마나 많은 탄생과 죽음이 있었을까. 두 발로 서고 뇌를 키우는 방식으로 진화한 인간은 제 생존을 위하여 많은 여성을 출산 중에 죽게 하는 진화적 선택을 내렸다. 과학과 의술이 전에 비할 바 없이 발달한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출산 도중 사망자가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다.
 
▲ 전주국제영화제 스틸컷
ⓒ JIFF
 
아이를 낳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것

통계는 1만 명 중 1명이 출산 도중 사망하고 있다고 말한다. 고령화라는 변수를 제외하면 출산으로 인한 사망사고는 현대 의술이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러나 출산과 관련한 각종 증후군은 여전하다는 점에서 여성이 다음 대를 잇기 위하여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있단 건 주지의 사실이다.

어쩌면 아이를 낳을 수 없으리라. 그 말의 무게는 그저 한 마디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녀 또한 발화자인 아버지의 아이이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로 이어지는 아주 오랜 번식의 결과물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계로 올라가도 그 오랜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이라 그녀의 육체는 시공간을 가로질러 수많은 인간이 바통을 주고받으며 이어온 계주의 결과물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건 마침내 그 대가 끊기는 일이다. 그리고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건 유전자가 종의 번식이란 저의 임무를 더는 이어가지 못하게 된 일이다. 또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건 영화의 주인공인 그녀가 더는 여자로서의 생물학적 기능을 완수할 수 없게 될 수 있으리란 의미이기도 하다. 오로지 그녀가 청한 적 없는 10cm 짜리 종양 하나 때문에 말이다.
 
▲ 전주국제영화제 스틸컷
ⓒ JIFF
 
아내 대신 산고를 치르는 남편의 이야기

할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가족들과 일절 연락이 없었던 듯 보이는 아버지다. 그 아버지에게 딸은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그 단절되고 생략된 관계성에 관계가 생길 즈음, 영화는 마치 전래동화 같은 한 편 이야기를 이들 모녀의 사정 위에 뿌려놓는다.

오랫동안 전해오는 이야기는 산고를 겪는 임산부와 그 남편의 이야기다. 어느 한 부부의 이야기만도 아닌 것이 이 마을 남편들은 출산으로 고통을 겪는 아내를 위하여 산꼭대기에 올라가 산고를 재현해왔다는 이야기다. 남편의 고통표현이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리라는 기대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오로지 여자의 신체로부터 낳아졌고 다시 낳아지길 반복했던 인류의 역사 가운데 남자의 고통은 어떤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논의에서와 같이 여자와 그 어머니와 다시 그 어머니로 이어지는 여성의 계보는 마침내 최초의 여성으로 향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 후반부 임신해 부른 배를 움켜쥐고 있는 여성의 배 가운데엔 배꼽이 없다.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몸, 최초의 인간은 여성인 걸까. 누구에게도 태어난 적 없는 여자가 아이를 낳음으로부터 인간이 시작했다는 은근한 상징은 어떤 메시지를 형상화하려 드는 것인가.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JIFF
 
남성 가계의 도시에서 여성 가계를 말하다

묘한 분위기 속에서 무엇도 확실히는 가리키지 않는 영화다. 여자와 남자, 두 성별의 구분이 확연히 드러나는 가운데 '가계'라는 제목은 그 계통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위에서 아래로, 개체를 넘어 시간을 건너가는 유전자의 항해가 가계를 이룬다. 그 가계를 영화는 여성이란 특정성별을 지팡이 삼아 두드려본다.

최초의 여성도 임신하기 위해서는 남성이 있어야 할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영화가 유독 여성성과 최초의 여성에 집중한 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명확히 이해하긴 어렵다. 19분짜리 짤막한 단편은 내적 완결성이나 서사, 그것이 구체적으로 빚어내는 메시지의 선명성에 집중하지 않는다. 대신 영상과 화면, 여성성에 대한 모호한 표현 등을 통하여 특별한 감상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가계의 중심을 여성으로 놓고 그 계보를 역으로 짚어보게끔 이끈다는 것, 바로 거기에서 가치를 헤아려볼 뿐이다.

<가계>를 연출한 김규민은 전주를 주 무대로 활동해온 1996년생 젊은 여성 감독이다. 한국단편경쟁작 25편 가운데 이 작품을 포함한 5편이 지역공모 자격으로 선정됐다고 전한다. 어찌보면 전주는 조선 시대 왕조의 뿌리인 전주 이씨의 본고장,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 등 관련된 유산 여럿을 문화자산으로 갖춘 도시다. 남성의 계보를 강조해온 이 도시의 신진 창작자가 여성의 몸으로 짚어보는 가계를 말했다는 건 조금 식상할지는 몰라도 영화를 한 번쯤 다시 돌아보도록 이끄는 요소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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