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사랑일까 세기의 불륜일까…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2024. 5. 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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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0살 연상 유부녀 선생님과 결혼한 그들
선생님을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24살 연상, 그것도 유부녀였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랑하니까.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이야기다. 지금 배우자인 브리지트와의 로맨스를 두고 누군가는 ‘세기의 사랑’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세기의 불륜’이라고 얘기한다. 마크롱 대통령이 15살이던 학창 시절, 연극반 선생님이었던 39살의 유부녀와 만남 끝에 15년 만에 결혼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20살 이상의 나이 차이, 사제 관계, 유부녀와의 로맨스가 프랑스 역사에서 또 있었다. 앙리 2세와 디안 드 푸아티에 이야기다.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24살이라는 나이 차이와 유부녀라는 현실을 극복하고 학창 시절 연극반 선생님이던 브리지트 마리클로드 트로뇌와 결혼에 골인했다. 사진은 지난해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마크롱 대통령 내외가 양국 간 정상회담에 앞서 찍은 기념사진. (연합뉴스)
먼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이야기부터. 1993년 프랑스 아미앵 지역 한 학교에 다니는 15살 마크롱은 활력이 넘치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연극반 수업에서 선생님 브리지트 마리클로드 트로뇌를 만났다. 첫눈에 반했다. 그녀의 나이는 39세. 두 바퀴 띠동갑. 마크롱의 연애 상대로는 넘을 수 없는 나이 차였다. 더구나 브리지트는 1남 2녀를 둔 유부녀. 그의 큰딸은 마크롱과 같은 반 학우였다.

미래 대통령의 결기를 이때부터 보였다고 해야 할까. 연극 수업을 하면서 마크롱은 브리지트에게 구애를 시작한다.

마크롱 부모는 마크롱의 저돌적이고 위험한 사랑을 알고 있었다. 그를 아미앵에서 파리로 전학시켜버린 이유였다. 거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파리에서도 끝없이 브리지트에게 편지를 쓰며 “다시 돌아와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구애를 펼쳤다. 그의 열정 덕분이었을까. 브리지트는 2006년 1월 남편과 이혼한다.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교사 자리를 구했다. 마크롱이 있던 곳이다. 2007년 그들은 마침내 결혼에 골인한다.

자, 이제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려본다.

500년 전 1520년대 프랑스. 왕자 앙리 2세는 외로운 아이였다. 어머니이자 프랑스의 왕비 클로드 드 프랑스는 다산으로 세상을 일찍 떠났다. 앙리 2세의 나이 고작 5살. 그의 양육과 교육을 담당하던 이가 디안 드 푸아티에였다. 큰 키에 사냥으로 다져진 날씬한 몸매, 교양까지 겸비한 디안. 무엇보다 앙리 2세의 지근거리에서 허한 마음을 채워주던 사람이었다. 앙리 2세는 엄마의 빈자리를 디안을 통해 채워가고 있었다.

앙리 2세에게 또 한 번 시련이 닥친다. 아버지 프랑수아 1세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카를 5세에게 파비앙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다. 프랑수아 1세는 포로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일국의 왕이 타국 포로로 오래 살 수는 없는 법. 프랑수아 1세는 왕자인 앙리 2세를 스페인 왕실의 볼모로 제안한다. 앙리 2세의 나이, 겨우 7살이었다.

4년 후 프랑스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동안 자신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낸 디안을 향한 앙리 2세의 사랑은 더욱 애틋해졌다. 그래서였을까. 제법 청소년 티가 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공개적으로 구애를 시작했다. 그러나 디안은 유부녀. 마크롱과 브리지트 영부인의 첫 만남과 같은 상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 프랑수아 1세가 앙리 2세의 결혼을 추진한다. 당시 유럽 최강국인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 교황청의 힘이 필요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와 결혼시키기로 한 이유였다. 그 유명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는 메디치 가문 사람이었다. 앙리 2세와 디안, 그리고 카트린까지. 세 사람의 삼각관계가 이렇게 시작된다.

사랑은 장애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 앙리 2세는 결혼 이후 더욱 열렬히 디안에게 구애했다.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힌 디안도 어느새 앙리 2세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남편과도 사별했기에 몸도 마음도 적적했다. 잘생기고 훌륭한 기사로 성장한 앙리 2세를 결국 받아들인다. 앙리의 나이 15세, 디안의 나이 35세. 20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은 사랑이었다.

앙리 2세의 나이 어느덧 28살. 그가 프랑스 최고의 권력자인 왕의 자리에 올랐다. 자연스레 디안은 왕이 공인한 정부(불륜녀) ‘메트레상티트르’ 자리에 올랐다. 앙리 2세는 프랑스의 대원수였던 안 드 몽모시와 디안에게 국정을 맡겼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디안은 왕의 마음을 흔들어 나라를 망치는 여인은 아니었다. 심지어 앙리 2세에게 왕비인 카트린과 어서 빨리 아이를 낳으라는 당부를 했을 정도다. 앙리 2세가 카트린과 낳은 아이를 정성껏 돌본 사람 역시 디안이었다.

하지만 카트린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녀가 누구인가. 유럽 최고 가문인 메디치 가문 상속녀가 아니던가. 유럽 유수의 왕가가 탐내는 집안이었고, 삼촌은 종교 권력 최고봉에 오른 교황 클레멘스 7세였다. 그런 그녀를 두고 대놓고 바람을 피우다니.

카트린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앙리 2세가 스페인과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체결하던 1559년. 이탈리아 땅에서 프랑스 권력을 포기한다는, 굴욕적인 내용의 조약이다. 앙리 2세는 자신의 딸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를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울며 겨자 먹기로 시집을 보내야 했다.

결혼 축하연 자리, 전쟁에서 지고 딸도 빼앗기듯 시집보낸 앙리 2세는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그 울분을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마상 시합으로 풀고자 했다. 프랑스의 우군이었던 스코틀랜드 근위대장 콩테 드 가브리엘 몽고메리와 자웅을 겨뤘다. 그리고 몽고메리의 부러진 창 파편이 앙리 2세의 눈에 박혔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복수는 이제부터였다. 앙리 2세는 임종 직전 디안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카트린은 결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동안 쌓여 있던 울분을 그렇게 풀기 시작한 것. 앙리 2세는 힘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디안을 못 본 채로.

적폐청산의 시간은 언제나 괴로움을 동반한다. 앙리와 디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이 수행됐다. 카트린은 디안에게 샤토 드 슈농소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디안과 앙리 2세가 사랑을 나눴던 공간이다. 대신 훨씬 급이 떨어지는 성 샤토 드 쇼몽을 건네준다.

앙리 2세가 줬던 보석 역시 ‘국가 유물’이라는 이름으로 반환을 명한다. 샤토 드 슈농소에는 앙리 2세와 디안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었다. 앙리 2세는 자신의 성 H와 디안의 이니셜 D를 따서 성 여러 곳을 장식했다. 카트린이 이를 차지한 이후 D를 자신의 이니셜 C로 바꿔놨다.

디안은 프랑스 중북부 아네트에서 조용히 삶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나이 64세였다. 왕비 카트린은 이후 프랑스를 격변으로 몰아넣는 중추적인 인물로 자리한다.

프랑스 왕들의 무덤인 파리 북부 생드니 성당. 이곳에 앙리 2세와 카트린의 장엄한 묘가 자리한다. 왕족 묘 중에서는 걸작 중 걸작으로 불린다.

카트린은 잠든 듯 편안해 보이지만 앙리 2세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듯 머리가 젖혀진 모습이다.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카트린의 복수극이었까. 불륜한 남자는 사후에까지 고통받는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던 걸까.

20살 넘는 연상 선생님과의 결혼, 프랑스에서 반복된 역사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7호 (2024.05.01~2024.05.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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