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예수] “나는 쩨쩨한 하나님 아니다” 의지해 평생 법조 선교 헌신

맹경환 2024. 5. 4.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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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파트너 변호사이자 목회자
심동섭 양병교회 목사
서울 삼성동 법무법인 로고스 사무실에서 최근 만난 심동섭 목사가 고대 그리스어 요한복음 1장 1절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구절을 소개하고 있다. 양병교회 담임이자 로고스 파트너 변호사인 심 목사는 “내 고집대로만 하려는 것도 다 참아 주시며 부족한 저를 찾아주시는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자랑”이라고 말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심동섭(65)은 목회자이자 변호사다.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 자리한 양병교회 담임목사인 그는 법무법인 로고스의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코로나19 시기 정부의 ‘정치적’ 방역 정책에 맞서 예배의 자유를 외치며 저항했던 교회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심 목사를 먼저 찾았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난 심 목사는 미션스쿨인 중학교에서 처음 성경을 접했고 고등학교 때 거듭남을 체험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하나님을 망각한 채 세상에서 허우적댔다.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심 목사는 ‘죽으나 사나 법조 선교’를 외치고 있다.

최근 서울 삼성동 사무실에 만난 심 목사는 ‘하나님이 왜 좋은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은 오래 참아주십니다. 돌이켜보면 버르장머리 없고 내 고집대로만 하려는 것도 다 참아주셨어요. 아무것에도 부족한 것 없는 분이 마치 무엇엔가 부족한 듯 저를 찾아주시니 늘 감사할 뿐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자랑입니다.”

이상하게 교회 종소리가 좋았다

심 목사가 태어난 곳은 부산역 근처였다. 바닷일 하는 사람이 많고 사고도 잦아서 미신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심 목사는 “이상하게 교회 종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편해지고 끌렸다”고 했다. 친구 따라 주일학교에도 여러 번 다녔다. 당시 주일학교에는 세 번 나가야 정식 등록도 해주고 선물도 줬다. 하지만 꼭 세 번째 출석을 앞둘 때마다 공무원이던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결국 초등학교 내내 교회에 정식 등록을 할 수 없었다.

교회와는 인연이 없을 것으로 보였던 심 목사는 미션스쿨인 대동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정식 교과목으로 성경을 배웠다. 아버지의 눈 밖에서 떳떳하게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심 목사는 “친구들은 딴짓만 하는데 저는 목사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고 했다. 졸업할 때 합동 세례식에서 세례도 받았다. 그는 “운동장에서 목사님이 성수를 끼얹는 순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믿어졌다”고 말했다.

교회에 등록하지 못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심 목사는 공부만 신경 썼다. 연합고사에서 부산 전체에서 최상위권이었던 심 목사는 집안의 희망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고시를 봐서 공직에 나가기를 바랐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돼서 학교에서 공부하던 4월 어느 주일이었다. 오전 10시쯤 3학년 선배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심 목사는 “가고 싶었는데 그동안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바로 선배를 따라 교회에 갔다. 그 교회가 영도중앙교회(현 땅끝교회)였다. 이후 수요예배와 주일예배는 물론 모든 학생부 예배와 성경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문제는 성적이었다. 성적이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자 아버지는 “교회에 미쳤기 때문”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3학년이 되자 성적을 올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대학 입학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다가 정말 아버지가 교회와 원수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쩨쩨한 하나님이 아니다”

1년간 반짝 공부해서 고대 법대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때 부친은 심 목사에게 ‘미끼’를 던졌다. “법대에 갔으니 사법 고시에 합격해라. 그러면 내가 교회에 나가겠다.”

심 목사는 작심하고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목표는 3학년 1차 합격, 졸업 전 최종 합격이었다. 촌음을 아끼며 공부에 매달렸지만 주일은 예외였다. 사시 준비 기간에도 주일에는 종일 교회에서 살았다.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1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그는 “상심이 컸고, 혹시 하나님이 사시 보는 걸 원치 않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생각이 많아지자 일단 군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 같아 학원까지 다니며 의무병을 지원했지만 논산훈련소 입소 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탈락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훈련소를 나와 경기도 가평의 한 기도원으로 향했다. 일주일 기도 후 마지막 날 안수기도를 받는 순간이었다. 환상이 펼쳐지면서 고위 법관이 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멀리서 음성이 들렸다. “의로운 법관이 되어라.”

더 고민할 것이 없었다. 바로 학교로 돌아와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시험이 임박했을 때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에서 주일성수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 하나님께 답을 구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미 법관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쩨쩨한 하나님이 아니다. 주일날 공부한다고 합격 안 시키고 공부 안 한다고 합격시키고 그런 거 없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킨다는 확신이 들면서 주일 성수에 대한 고민이 사라졌다. 그리고 4학년 때 1차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 최종 합격했다. 계획보다 1년씩 늦춰졌을 뿐이다.

하나님을 잊은 검사 생활

사법 시험에 합격한 뒤 경남 산청의 한 교회 여름성경학교에서 봉사하는 심 목사.

심 목사는 연수원을 거쳐 병역 의무를 마친 뒤 29세에 검사로 임관했다. 그는 “온 세상이 내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조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사는 기본이고 대인관계도 중요하기 때문에 술자리도 열심히 쫓아다녔다. 마음속 하나님의 꾸짖는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그는 “세상 물정을 알아야 일도 잘할 것”이라며 합리화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꾸짖음이 들리지 않았다. 심 목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로 착각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세상에 물들어 갔다.

검사 생활을 시작한 지 6년쯤 지나 춘천지검에 근무할 때였다. 그렇게 성공을 위해 발버둥 쳤지만 지방으로만 전전했다. 심 목사는 “뭔가 원점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고 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가평의 기도원으로 향했고 눈물과 회개의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석 달쯤 기도원을 오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다시 기회를 주겠다. 승진도 시켜주겠다. 앞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말고 낮은 자리에 갔다고 해서 비굴하지도 말라. 모든 자리가 너의 소명이다.”

그다음 해에 바로 승진했다. 심 목사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모셨던 선배들이 승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에 기가 막히게 가서 도왔다”면서 “은혜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2005년 열린 애드보킷 인터내셔널(AI) 아시아 콘퍼런스에서 기조 발제를 하고 있는 심동섭 목사(당시 AI 이사).

승진하던 96년 심 목사는 서울 대검찰청으로 옮기면서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사랑의교회에 등록했다. 새벽예배를 드리는데 2~3개월 동안 눈물만 흘린 것 같다고 했다. 심 목사는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제자훈련 1년, 사역훈련 1년 코스를 마쳤다. 심 목사의 아내는 “당신은 하나님을 한번 배신했으니까 제대로 신앙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강권했다고 한다. 동료 검사들도 적극적으로 전도하고 해외 법조인을 상대로 한 선교도 많이 다녔다. 사랑의교회 안에서 법조선교회도 조직했다. 기독교 정신으로 법을 통한 사회정의 실현을 목표로 설립된 기독법률가들의 범세계적 모임인 애드보킷 인터내셔널의 한국 대표로도 활동했다.

한동안 승승장구했던 심 목사에게 박해가 찾아왔다. “술도 잘 먹고 인간관계도 좋던 놈이 교회에 빠져 자기 혼자만 안다”는 말이 돌며 검찰 내부에서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심 목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내 길로 가면 하나님 방식대로 출세시켜 주실 것”이라 믿었다. 검사 신분으로는 법을 통한 세계선교에 참여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더 적극적인 선교를 위해 심 목사는 2006년 18년간의 검사 생활을 마감했다.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심 목사는 많은 사건을 수임하며 정신없이 보내던 어느 날 전망 좋은 사무실에서 창밖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그때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거지.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돈 버는 일에만 매달리려고 변호사를 하는 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점점 신학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만 아직 확신은 서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심 목사는 목사 가운을 입은 꿈을 꾸고는 신학이 소명이라는 확신을 하고 백석대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와 신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살아도 죽어도 법조 선교

신대원을 마칠 무렵인 2011년 민영 교정시설인 소망교도소 2대 소장으로 취임한다. 처음엔 꺼렸지만 신학 공부 중인 크리스천이자 부장검사 출신이어서 업무적으로 얽혀 있는 법무부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적임자라는 평가 속에 주변의 강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심 목사는 운영 초기 자리를 잡지 못하던 조직을 다잡고 교정시설로서의 기틀을 마련했다.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심 목사는 2018년 불명예 퇴임한다. 평소 운영 문제를 두고 다툼을 벌이던 법무부가 심 목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혐의로 형사고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 목사는 법무부가 제기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심 목사는 “힘겨운 재판 과정에서 억울하고 너무나 고통스러웠다”면서 “소장 부임 직후 법조 선교의 비전을 갖고 개척한 양병교회 예배당과 청계산 기도원에서 기도하며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견뎌냈다”고 말했다.

심 목사는 “검사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살았던 10년 가까운 세월이 후회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법조인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 문제를 신앙적 방법으로 해결하는 데 실패해서 그렇게 낭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제 남은 세월은 다시는 저와 같은 어리석은 법조인이 생기지 않도록 살아도 법조 선교, 죽어도 법조 선교를 하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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