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승려에 "호르몬 이상"…욕 먹어도 10여년 맨발로 걸었다

나원정 2024. 5. 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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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대만 거장 차이밍량 내한 간담회
전주영화제서 ‘행자’ 연작 마스터클래스
고전 『서유기』 영감…22년간 10편 완성
"11번째 '행자' 전주서 촬영…내후년 공개"
차이밍량 감독의 '행자' 연작 중 '무색'(2012) 주인공인 승려 샤오강(이강생). 휴대폰 광고영상을 의뢰받고, 제품 대신 승려가 하염없이 걷는 실험 단편을 만들었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붉은 승복의 행자가 10여년간 세계 각지를 맨발로 걸었다. 대만 타이베이로 시작해 주앙웨이, 홍콩, 말레이시아 쿠칭, 프랑스 파리‧마르세유, 일본 도쿄, 미국 워싱턴 D.C.까지, 그 여정을 새긴 단편영화가 올해로 10편에 달한다. 말레이시아 출신 대만 거장 차이밍량(66) 감독의 대표작 ‘행자’ 연작이다. 이 연작의 11번째 신작은 한국 전주에서 촬영한다.

3일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차이밍량-행자 연작’ 특별전 및 마스터클래스 참석차 전주를 찾은 차이밍량 감독은 “전주에서 11번째 ‘행자’ 시리즈를 촬영할 기회가 주어져 신기한 느낌”이라면서 “전주는 아직 낯선 곳이어서 앞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해 둘러볼 것이다. 이는 ‘행자 정신’에 부합한다. 어떤 새로운 곳을 가던 좋은 걸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날 전주 완산구 프레스룸에서 열린 기자회견엔 그와 함께 ‘행자’ 연작 주연이자 평생 페르소나인 대만 배우 이강생(55)도 함께했다.


"12년 전 인터넷서 욕먹은 '행자' 10편 찍었죠"


연작 10편을 모두 극장에서 상영하는 건 이번 전주영화제가 처음이다. 차이밍량 감독은 “홍콩에서 찍은 두 번째 작품을 인터넷에 공개했을 땐 욕을 많이 먹었다. 극중 인물 호르몬에 이상이라도 생겼냐는 얘기까지 들었다”며 웃은 후 “그분들은 ‘행자’가 10편이나 만들어질지 몰랐을 것이다. ‘행자’ 시리즈의 특색을 꼭 영화관에서 느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 사흘째인 3일 오후 전북 전주시 완산구 베스트웨스턴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차이밍량 감독(왼쪽)이 이강생 배우와 함께 '행자 연작'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차이밍량 감독은 이강생과 나란히 영화 ‘청소년 나타’(1992)로 데뷔했다. 이후 두 번째 연출작 ‘애정만세’로 1994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하류’로 1997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신성으로 떠올랐다. 이후 30여년간 TV‧영화‧공연‧미술 등 경계를 넘나들며 관습을 깼다. ‘행자’ 연작은 스타 감독이었던 그가 ‘떠돌이 개’(2013) 이후 상업 방식 영화에 이별을 고하며 매진한 작품이다.

시작은 휴대폰 광고, 제품 한번도 안찍은 이유


차이밍량 감독의 '행자' 연작 중 '무소주'(2024).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연작의 첫 단편 ‘무색’(2012)은 원래 휴대폰 광고영상을 제안받고 만들었다. 제품은 한번도 안 찍고 정체모를 승려(이강생)가 대만 시내를 느리게 걷는 모습만 담았다.
차이밍량 감독은 “영화를 20여년간 만들며 상업적 제약이 많아 힘들었다. 자유로운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영화산업이 나를 구속시켰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차에, 당시 내가 연출한 연극에 출연한 이강생이 무대 위를 굉장히 느리게 걷는 게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10년간 이강생의 느린 걸음을 영화 10편에 담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런 의미를 담아 ‘행자’ 속 승려 이름(샤오강)을 ‘청소년 나타’에서 이강생이 처음 맡은 배역에서 따왔다.
당시 연극은 말레이시아에서 묵묵히 국수를 만들어 팔았던 감독의 아버지와, 평생의 벗 이강생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 그가 ‘행자’ 연작의 원칙으로 삼은 “이강생의 느린 걸음걸이”는 이 연극에서 1인2역을 맡은 이강생이 아버지를 연기할 때 보여준 것이다. 당나라 여행금지령을 뚫고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가지러 인도 서역으로 떠난 중국 고전 『서유기』의 승려 삼장법사도 ‘행자’ 연작에 영감이 됐다.
차이밍량 감독의 '행자' 연작 중 '모래'(2018).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이강생은 “삼장법사는 천천히 걸어 어디로 갈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자신의 걸음을 유지한다. 가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두려워 않고 끝까지 가는 정신을 생각하며 ‘행자’ 시리즈가 이어졌다”고 했다. 차이밍량 감독은 “‘행자’ 연작의 모든 작품 배경이 다르다. 찍을 때마다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건축 비엔날레 밥솥에서 어머니 마지막 숨 떠올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특별전으로 상영된 차이밍량 감독의 '행자' 연작 중 '금강경'(2012). 2012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 전시할 단편 영화를 의뢰받은 차이밍량 감독은 밥솥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마지막 숨을 내쉬고 죽어가던 모친의 얼굴을 떠올리며 '금강경' '몽유'라는 두 편의 단편을 만들었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연작엔 차이밍량 감독의 개인사와 영화 미학에 대한 고민이 섬세하게 교차한다. 그가 자신을 성장시킨 홍콩 대중문화에 경의를 바친 두 번째 단편 ‘행자’는 2012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주목받기도 했다. 베니스 건축비엔날레 전시에 의뢰받아 만든 ‘금강경’(2012) ‘몽유’(2012)에선 초현실적인 비엔날레 전시 공간에 놓인 밥솥의 더운 김이 임종 전 어머니의 마지막 숨과 겹쳐진다.
고향 말레이시아 쿠칭의 어릴 적 살던 아파트(‘물 위 걷기’, 2013)부터 프랑스 배우 드니 라방과 함께 걸은 마르세유(‘서유’, 2014), 겨울비가 적신 태평양 모래톱의 장어잡이 텐트촌(‘모래’, 2015) 등 낯선 이국도시를 떠돌았다. 미국 워싱턴 D.C.로 간 10번째 단편 ‘무소주’는 올초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됐다.

50℃ 시멘트길서 물집 고생, 행인이 동전 쥐여줘


차이밍량 감독의 '행자' 연작 중 '곳'(2022).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멀찍이 카메라를 고정해 놓고 오랜 시간 걷는 걸 찍다 보니 해프닝도 많았다. 말레이시아에선 40~50℃ 무더위에 달궈진 시멘트길을 닷새간 걸으며 이강생의 발바닥이 물집투성이가 됐다. 일본에선 영하 2℃ 겨울날 철판위를 걸었고, 마르세유에선 촬영 중인 걸 모르는 중년여성이 남루한 행색의 이강생에게 5유로를 쥐여주기도 했단다.
영화지만 미술관에서 볼법한 실험영상 같기도 하다. 실제 2015년엔 ‘행자’를 연극으로 재해석한 공연 ‘당나라 승려’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 아시아예술극장 개막 공연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 내한한 감독은 “현대사회의 빠른 속도를 보면서 나는 발전이 아니라 쇠퇴와 붕괴를 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자신만의 보폭을 지키는 예술작품으로 새로운 관객을 양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관객, 영화관 영화에 싫증…내 영화는 보다 자도 돼"


“이미 관객이 영화관 영화에 싫증 난 시대다. 영화관 영화에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미술관에선 한작품을 한시간도 넘게 보기도 한다. 자유롭게 관람한다. 제 영화도 그렇다. 보다 힘들면 자도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런 작품을 통해 더 깊은 느낌을 받는다”면서 “관객한테 돈만 벌려면 다른 영화, 진실된 영화로 새로운 관객을 양산하는 노력도 필요없다. 그러나 나는 내 영화를 보는 관객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다. 우리는 평등한 관계”라고 덧붙였다.
'행자' 연작 중 단편 '서역'은 프랑스 배우 드니 라방(이강생이 맡은 승려 뒤쪽에 서있는 회색 옷의 남성)도 출연했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그는 특히 “평생 유일하게 본 드라마가 ‘더 글로리’다. 이창동 감독 작품도 다시 보곤 한다. 최근엔 윤여정 배우가 인상깊다”면서 “TV가 있다면 한국작품을 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은 영화‧드라마 산업에서 앞서나간다. 그런 한국에서 ‘행자’ 연작을 선보일 수 있게 돼 굉장한 행운”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국과 인연이 깊다. 연출작 대부분 부산영화제에 초청됐고 젊을 때 만든 ‘애정만세’가 당시 예술영화론 많은 관객이 봤다. 저 역시 한국과 한식을 좋아한다”면서다. “한국은 특색있는 나라고 한글도 굉장히 특별하다. 전주에서 찍을 11번째 영화도 좋은 작품이 될 거란 믿음이 있다”고 덧붙였다.
전주영화제측에 따르면 11번째 ‘행자’ 영화는 내후년 완공 예정인 전주영화제 전용관에서 상영할 계획이다. 25회 전주영화제는 오는 10일까지 전북 전주 일대에서 개최된다.

전주=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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