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운 받은 땅이기에... 유명인들을 많이 배출했을까
[윤찬영 기자]
▲ 저 멀리 만경강 물줄기와 고속철도 기찻길이 만난다. 고속철도 아래로는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다니는 길이 하나 더 있다. |
ⓒ 윤찬영 |
익산의 북쪽 끝엔 금강이 흐르고, 남쪽 끝엔 만경강이 흐른다. 그러니까 익산은 금강과 만경강, 두 개의 커다란 물줄기 사이에 자리 잡은 도시다. 비록 도시를 지나는 큰 물줄기는 없지만 아주 먼 옛날부터 두 개의 강이 가져다준 풍요를 오랫동안 누려 왔다. 두 강으로부터 시작된 작은 물줄기들이 지금도 도시 곳곳을 실핏줄처럼 지나기도 한다. 너른 평야를 적실 물이 필요해 판 물길들이다.
또 익산은 호남선과 전라선 그리고 장항선이 만났다 흩어지는 도시다. 그래서 지방역으로는 드물게 익산역엔 철로 8개가 나란히 나 있다. 물길이 그랬듯 철길도 익산에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1912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허허벌판에 이리역이 생기면서 이 도시엔 온갖 사람과 물자들이 모여들었다.
물길과 철길이 만나는 도시 익산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물길을 따라 이 기름진 땅에 터를 잡았다. 고대 삼한의 맹주였던 마한이 이곳에서 일어난 건 우연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미륵산과 용화산 자락 남쪽에 청동기문화를 가진 집단이 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기원전 3세기 무렵 철기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마한이라는 새로운 정치체를 세운 걸로 보고 있다. 지금의 익산 금마·왕궁면 일대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인 미륵사지석탑(국보). 긴 보수를 거쳐 2019년 4월에야 지금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
ⓒ 윤찬영 |
백제의 운이 다한 지 다시 1200년도 더 지난 1912년, 미륵사지석탑에서 차로 30분을 달려야 닿는 곳에 호남선 이리역이 생겼다(익산의 옛 이름은 이리였다).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땅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길이 나고 건물이 올라갔다. 도시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커졌다. 익산은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도 '기회의 땅'이었다. 한때 이 신도시엔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몇 배나 많이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몇몇 일본인들은 만경강 주변의 기름진 땅을 마구 사들여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이리역에서 20리(7.9km)쯤 떨어진 춘포도 그런 곳들 가운데 하나였다. 만경강을 따라 들판 곳곳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던 마을은 1904년 무렵 일본인 호소카와가 이곳 땅을 사들이면서 격동의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10년 뒤엔 춘포 농토의 절반이 호소카와 농장의 차지가 되었다.
▲ 춘포(대장)도정공장의 모습. 해방 뒤에도 도정공장으로 활용되다가 지금은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다. |
ⓒ 윤찬영 |
"그들(일본인)은 정미소의 소음이 시끄러워도 그것을 마치 심장소리처럼 여기는 듯했다.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조선인들은 정미소의 소음을 참기 어려웠다." (소설 <1938년 춘포> 중)
호남선이 개통하던 날 이리와 군산(항)을 잇는 군산선도 함께 개통했다. 춘포에서 두꺼운 껍질을 벗겨내 부피가 줄어든 쌀들은 기차에 실려 군산항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모조리 건너갔다.
익산보다 이리가 더 익숙한 이유
나이 지긋한 분들에겐 '익산'보다 '이리'란 이름이 더 익숙하다. '갈대숲 속에 숨은 마을'이란 뜻에서 '솝리'('솝'은 '속'의 옛말)라 불리다 '솜리'를 거쳐 앞 글자를 같은 뜻의 한자어 '리'(裡, 속)로 바꾸면서 '이리'로 굳어졌다. 1970년대 마산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된 바로 그 이리다.
'익산'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지는 30년이 채 안 됐다. 1995년 익산군과 이리시가 합쳐지면서 어찌 된 일인지 이리시가 아닌 익산군에서 이름을 따오기로 했다. 이리역도 익산역으로 이름이 바뀌고, '이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리'는 본래 지금의 익산역 주변(중앙동)에서 조금 떨어진 인화동과 그 주변을 가리켰다. 1912년 이리역이 들어서고 인화동 주변을 '구이리'라 부른 걸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도시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인화동에 닿게 된다.
▲ 익산 중앙동에서만 맛볼 수 있는 수제 군만두. |
ⓒ 윤찬영 |
▲ 화교 2세가 운영하는 노포의 난자완스도 일품이다. |
ⓒ 윤찬영 |
이리시장은 익산에서도 손꼽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화교들은 여기서 주단(질 좋은 비단)과 포목을 팔면서 이 도시에 뿌리를 내렸다. 인천이나 군산처럼 중국음식점을 열기도 했는데, 지금도 대를 이어가는 솜씨 좋은 가게들이 여럿 있다. 이들 가게에 가게 되면 정성스럽게 빚어 튀겨낸 군만두만큼은 꼭 먹어봐야 한다.
마루보시(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일꾼들이 살던 마을은 지금도 '창고촌'이란 이름으로 아파트단지 옆에 상처처럼 남아있다. 마루보시는 훗날 '대한통운'으로 이어진다. 또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가다 이리역에서 멈춰 선, 기댈 곳 없던 피란민들은 시장 끄트머리에 터를 잡고 멀리 대전과 부산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품을 팔았다. 사람들은 이곳을 '양키시장'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군복을 염색하던 염색소들의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 현장 사진.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1977년엔 '이리역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11월 11일 금요일, 한국 대 이란의 월드컵 최종 예선전이 시작된 지 겨우 15분쯤 지난 저녁 9시 15분 무렵, 역에 머물러 있던 화물차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화물차에 실려있던 엄청난 양의 다이너마이트가 한꺼번에 터져버린 것이다.
이 폭발로 모두 59명이 죽었고, 1402명이 다쳤다. 폭발 지점에는 깊이 15미터, 직경 30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웅덩이가 생길 만큼 폭발의 위력은 대단했다. 근처 철로들도 모두 엿가락처럼 휘어졌고, 이리역 주변은 물론 수km 근방까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사연 많은 도시가 낳은 이야기꾼들
▲ 원광대 국어국문과 출신 작가들의 작품들. |
ⓒ 윤찬영 |
<연어>로 유명한 안도현 작가는 대학 1학년 때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낙동강'으로, 다시 4학년 때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연거푸 당선되었다. 대학 졸업 뒤엔 이리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했다가 얼마 못 가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을 당했다. 다행히 5년 뒤 전북 장수 산서고등학교로 복직할 수 있었고, 2년 뒤인 1996년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연어>를 출간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백만 부가 넘게 팔렸다.
▲ 안도현 작가(원광대 국문과)의 시 '이리역 굴다리'를 김승민 작가(원광대 서예과)가 붓글씨로 쓴 작품 |
ⓒ 김승민 |
지금은 안타깝게 사라졌지만 원광대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서예과도 있었다. 한국 캘리그래피 문화를 개척한 1세대 캘리그래피스트로 꼽히는 이상현 작가도 원광대 서예과를 나왔다. 2006년 개봉한 영화 <타짜> 포스터에 적힌 강렬한 '타짜' 두 글자부터 최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오는 동글동글한 '우영우 김밥'체(완도희망체)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을 거쳐 간 작품이 제법 많다. 그러니까 익산은 '글(문학)의 도시'이자 '글씨(캘리그래피)의 도시'인 셈이다.
이것 말고도 이 도시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다. 지금부터 몇 번에 걸쳐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혹시라도 이 도시를 지날 일이 생기면 그땐 부디 그냥 지나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덧붙이는 글 | <기획회의> 2월호에 실은 원고를 수정 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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