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전된 듯 ‘짜릿’...‘슈퍼 사이클’ 돈벼락

김경민 매경이코노미 기자(kmkim@mk.co.kr), 정다운 매경이코노미 기자(jeongdw@mk.co.kr) 2024. 5. 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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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재계에서 가장 핫한 산업으로 전력 인프라를 빼놓을 수 없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으로 글로벌 시장 데이터센터 설립이 잇따르는 데다, 북미를 중심으로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공장이 신설되면서 전력 인프라 투자가 늘어난 덕분이다. 미국 고금리 장기화, 중동 전쟁 위기 악재 속에서 기업들은 저마다 비상 경영에 돌입했지만 전력 인프라 업체들은 딴 세상이다. LS일렉트릭, HD현대일렉트릭, 효성중공업 등 주요 기업마다 글로벌 수주 물량이 넘쳐나면서 남몰래 조용히 웃는 모습이다.

울산 HD현대일렉트릭 변압기 공장에서 완성된 변압기 내구성 시험을 진행하는 모습. (HD현대일렉트릭 제공)
전력기기 업체 주가 날개

HD현대일렉트릭, 한국조선 앞질러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전력 인프라 기업인 LS일렉트릭 주가는 올 들어 4월 30일까지 무려 141.26% 오르면서 연일 고공행진하는 모습이다.

HD현대일렉트릭 주가도 연초 대비 2배 이상 뛰었다. 급기야 HD현대일렉트릭 시가총액(8조6153억원, 4월 18일 기준)이 사상 최초로 HD현대 핵심 계열사인 HD한국조선해양(8조4503억원)마저 앞질렀다. 2017년 5월 HD현대일렉트릭 상장 직후 시총이 6000억원 수준으로 HD한국조선해양(9조3000억원)의 10분의 1도 채 안 된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세다. 효성중공업 주가도 지난해 말 대비 2배가량 뛰면서 어느새 30만원 고지를 넘어섰다.

전력 인프라 기업 주가가 치솟는 것은 탄탄한 실적이 뒷받침된 덕분이다.

HD현대일렉트릭은 1분기 매출 8010억원, 영업이익 1288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0.9%,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무려 178% 늘어난 ‘어닝 서프라이즈’다. 앞서 지난해에도 3152억원 영업이익을 기록해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더니 올 들어서도 호황을 이어가는 모습이다. 증권가는 HD현대일렉트릭이 올해에만 4468억원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기대한다.

LS일렉트릭 역시 1분기 영업이익이 937억원으로 지난해 1분기와 비교해 14.6% 증가했다. 지난해 영업이익이 3249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린 데 이어 올 들어서도 뚜렷한 상승 곡선을 그린다. LS일렉트릭 관계자는 “북미 전력 인프라 시장이 슈퍼 사이클에 진입하면서 전력기기, 배전 등 글로벌 전력 수요가 폭증해 실적 상승세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2578억원 영업이익을 올린 효성중공업 역시 올해 전망치가 48.7% 증가한 3832억원에 달한다.

수주 곳간도 넉넉하다. HD현대일렉트릭,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등 전력기기 ‘빅3’의 지난해 말 기준 수주 잔고만 11조4220억원을 기록했다. 역대 최대 규모다. HD현대일렉트릭,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은 각각 5조3775억원, 3조7184억원, 2조3261억원의 일감을 확보한 상태다.

전력망 산업 호황으로 전력기기 업체뿐 아니라 전선 업체들도 수혜를 누리는 분위기다. 국내 전선업계 1위 LS전선은 전 세계 해저케이블 수요 확대로 올해 실적 전망이 밝다. 지난해 네덜란드 국영 전력 회사 ‘테네트’로부터 유럽 북해 해상풍력 초고압직류송전(HVDC) 케이블 공급 계약을 2조원대에 따냈다. 올해도 베트남 정부의 국가전력개발계획 투자 등 LS전선이 관여하는 전력망 구축·개선 사업이 본격화할 전망이라 기대가 크다.

전력망 기업 호황 비결은

북미 전력망 교체에 데이터센터 수요 ↑

전력기기, 전력망 등 전력 인프라 기업들이 호황을 누리는 배경은 뭘까.

첫째 북미를 중심으로 변압기를 비롯한 전력기기 수주가 급증한 점이 호재로 작용했다.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기업이나 가정에 보내려면 그에 맞게 전압을 바꿔주는 변압기가 필수다. 통상 30년으로 여겨지는 노후 전력망 교체 수기가 도래하면서 미국 정부는 고용량 전력망 설치, 시스템 현대화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미국 에너지부에 따르면 미국 변압기의 70%는 교체 시점인 25~30여년 전에 설치됐다.

때마침 미국 정부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법(CHIPS Act), 인프라 투자와 일자리법(IIJA) 등을 시행한 데다 해외에 진출한 기업이 미국으로 복귀하는 ‘리쇼어링’ 바람이 불면서 전력기기는 없어서는 안 될 ‘귀하신 몸’이 됐다. 2021년 발효된 IIJA는 향후 10년간 철도, 도로, 상수도, 전력망 등 사회기반시설(SOC)에 1조2000억달러, 우리 돈으로 1650조원을 투자해 경기를 활성화하는 것이 목표다. IRA와 함께 ‘칩스법’으로 불리는 반도체법도 전 세계 설비 투자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역할을 했다. 이들 법이 발효된 이후 미국 노후 전력망 교체와 함께 전력 소비량이 높은 반도체, 전기차 제조시설 유치에 따라 송배전 인프라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를 눈여겨본 국내 전력 인프라 기업들은 미국 내 생산시설을 확보해 변압기 초호황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최대 60%에 이르는 관세를 피하기 위해서다. HD현대일렉트릭은 미국 앨라배마 공장을 마련했고 효성중공업도 미쓰비시에서 테네시주 공장을 사들였다. HD현대일렉트릭의 미국 전력 설비 수주액은 2021년 3억9000만달러(약 5280억원)에서 지난해 17억8000만달러(약 2조4101억원)로 네 배 이상 늘었다.

LS일렉트릭은 늘어나는 북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텍사스에 첫 생산 거점을 건설 중이다. 지난해 텍사스주 배스트롭에 4만6000㎡ 넓이의 토지와 부대시설을 매입해 생산설비를 구축할 계획이다. LS일렉트릭은 지난해 약 1746억원 규모 삼성전자 테일러 공장 배전 시스템 공급·유지보수 계약에 이어 최근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전력 기자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글로벌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면서 LS일렉트릭의 해외 매출 비중은 2020년 24%에서 지난해 36%, 올 1분기 43%로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둘째 전 세계 주요국에서 태양광, 풍력 등을 쓰는 신재생에너지 발전소가 우후죽순 생기는 것도 변압기 시장 호황에 한몫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고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을 42.5%까지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재생에너지지침(RED)이 만들어졌다. 이 여파로 친환경 풍력발전을 비롯한 재생에너지 전력망 인프라 수요가 급증하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만큼 호황을 맞은 모습이다.

중동 지역 전력기기 수요도 폭증하고 있다. 석유화학 플랜트 증설이 이어지는 데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추진 중인 ‘네옴시티’ 프로젝트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덕분에 글로벌 시장에서 오랜 기간 경험을 쌓아오면서 기술력을 높인 국내 전력기기 업체 주문이 쏟아지는 모습이다.

블룸버그신에너지금융연구소(BNEF)에 따르면 글로벌 전력망 투자 규모는 2020년 2350억달러에서 2030년 5320억달러, 2050년 6360억달러(약 828조원)로 증가할 전망이다. 사실상 글로벌 전력망업계가 ‘슈퍼 사이클’을 맞았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셋째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AI 열풍도 영향을 미쳤다.

AI 시스템을 가동하려면 막대한 전력을 사용하는 대규모 데이터센터 구축이 필수다. AI 활용 기기는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릴 정도다. 이를 뒷받침하려면 초고압 변압기, 배전반 등 전력 인프라, 시스템 수요가 덩달아 급증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오픈AI의 생성형 AI 챗GPT-3에는 1만여개에 달하는 그래픽처리장치(GPU)가 사용되는데, 1750억개의 매개변수가 있는 챗GPT-3 모델을 한 번 학습시키는 데 필요한 전력은 시간당 1.3GW에 달한다. 이는 한국에서 1분간 소비하는 전력 총량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검색 작업을 수행하는 데도 AI가 일반 검색 대비 5배가량 더 많은 전력을 소모한다. 서버 효율을 높이기 위해 실시간으로 서버를 냉각하는 시스템에도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 2023~2028년 글로벌 데이터센터의 연평균 전력 수요 증가율이 11% 수준이지만, 여기에 AI 서버를 적용하면 증가율이 연평균 26~36%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덕분에 HD현대일렉트릭에는 구글, 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의 데이터센터 납품 관련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최근 강달러 추세도 수출 비중이 높은 국내 전력기기 업체들에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대금을 주로 달러로 받는 만큼 환차익에 따른 실적 개선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세청 수출입무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대형 변압기 수출액은 약 6억8000만달러로 2022년(약 3억8000만달러) 대비 78%가량 증가했다. 2017년 이후 최대 규모다. 지난해 기준 HD현대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의 전체 전력기기 사업 매출 중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을 넘는다.

“북미의 노후 전력망 교체를 시작으로 유럽 재생에너지 확대, 생성형 AI 확산에 따른 데이터센터 수요 증가로 초고압부터 중저압 전력기기에 이르기까지 전 부문 투자가 지속되고 있다. 전력 인프라 기업이 호황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민재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 분석이다.

충북 청주에 위치한 LS일렉트릭 스마트공장 전경. (LS일렉트릭 제공)
전망 괜찮나

초고압 변압기 수요 급증 기대

향후 전망도 괜찮다. 초고압 변압기 시장은 중장기적으로 꾸준한 수요 증가가 기대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2022년 460TWh였던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이 오는 2026년에는 1000TWh를 웃돌 것으로 내다봤다.

조연주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지난 20년간 정체됐던 미국 전기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다”며 “전력 수요 급증으로 전력기기 산업 호황의 끝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미중 갈등도 국내 기업에는 호재로 작용한다. 미국의 탈(脫)중국 공급망 정책으로 한국산 전선·전력기기 수요가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는 분석이다. LS전선의 미국 해저 사업 자회사인 LS그린링크는 미국 IRA에 따른 투자세액공제 9906만달러(약 1365억원)를 받는다. 2위 기업 대한전선도 최근 미국 남동부 플로리다에서 1100억원 규모의 전력망 교체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해 말 미국 실리콘밸리 전력망 현대화 사업에 참여해 총 782억원 규모 변압기 공급 계약을 따냈다.

전선업계가 핵심 지역으로 꼽는 미국에서 최근 구리 가격이 t당 1만달러에 육박하는 것도 호재다. 구리 가격 상승은 전선업계 실적을 개선하는 호재로 통한다. 수주 때 구리 가격 상승에 따라 판매 가격을 연동하는 조항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 이에 따라 전선 제조원가의 90%가량을 차지하는 구리 가격이 오르면 제품 가격에 반영돼 매출이 늘어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4월 30일 기준 런던금속거래소(LME) 전기동(구리) 가격은 t당 9863달러를 기록하며 1만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뛰었다. 월간 기준으로 지난 1월 t당 8344.3달러를 기록한 뒤 2월 8310.74달러로 잠시 주춤했지만 3월 8675.63달러를 나타낸 데 이어 4월 들어서는 9000달러를 웃돌고 있다. 강세가 지속되면서 올해 1만달러를 내다봤던 시장조사기관들은 전망치를 1만2000달러 선으로 상향 조정하는 추세다. 전기동뿐 아니라 니켈, 주석 등 다른 비철금속 품목들도 공급 부족 우려가 높아지면서 가격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황수욱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AI 데이터센터 수요 급증으로 연말에는 구리 가격이 t당 1만2000달러까지 오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려할 점은 없나

공급 늘면 ‘바이어스 마켓’ 바뀔 수도

호재가 넘쳐나지만 전력기기, 전력망 업체 호황이 지속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관건은 국내 기업의 글로벌 시장 경쟁력이다. 이전까지 미국 배전 시장은 슈나이더일렉트릭이나 ABB, GE, 지멘스, 히타치 같은 글로벌 대형 전력기기 기업들이 장악해왔다. 지금은 전력기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들 기업만으로는 공급이 감당이 안 될 정도가 됐고, 품질 좋고 납기 빠르고 사후관리서비스(AS) 잘되는 국내 기업도 인지도를 얻는 중이다.

다만 기술력에서는 여전히 ‘한 수 위’로 꼽히는 유럽, 일본 경쟁사들이 생산능력을 대폭 늘리면 또다시 ‘바이어스 마켓’으로 바뀔 수 있는 점은 변수다. 업계 관계자는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상황으로 바뀌면 단가는 추락하고, 국내 업체들 수익성도 하락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지금이야 높은 구리값과 원달러 환율 덕분에 국내 기업이 호실적을 기록 중이지만, 거꾸로 구리값이 떨어지고 환율 변동성이 커질 경우 실적에 변수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

올해 11월 치러질 미국 대통령 선거도 변수다. 선거 결과에 따라 현지 인프라 투자 상황이 급변할 수 있어 ‘퀀텀점프’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적극적 인프라 투자 확대를 강조하는 바이든 행정부와 다른 노선을 취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는 신재생에너지 투자와 전기차 확대 등의 탈탄소 정책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전력 인프라는 물론 변압기 투자 규모를 줄일 수 있어 미 대선 결과가 국내 전력기기업계 성장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8호 (2024.05.08~2024.05.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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