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사는 N입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N]
전쟁없는세상과 공익법센터 어필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총 쏘기를 거부하고 러시아를 탈출해 한국에 온 병역거부자들을 한국 정부가 난민으로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탄원 서명 캠페인을 펼치고 있습니다. (서명캠페인 페이지 https://campaigns.do/campaigns/1238)
작년에 서울에서 열린 국제포럼 '양심적 병역거부, 진단과 모색'에 참석했던 러시아 평화활동가 N(러시아에 거주하고 있으며 푸틴 정권으로부터 위협을 받기 때문에 가명을 썼습니다)은 이 캠페인 소식을 듣고 한국 시민들에게 서명캠페인 동참을 호소하는 편지를 써서 보내주었습니다.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내용이어서 번역해서 등록합니다. - 기자 말
저는 러시아에 사는 N이라고 합니다. 저는 '병역거부 운동(Movement of Conscientious Objectors)'이라는 단체에서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경험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활동을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러시아에선 공개적으로 전쟁 반대의 입장을 취하면 곧장 감옥에 잡혀가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에게 동정심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잠시만 제 이야기에 주목해 달라고 요청 드립니다.
유명한 러시아 작가 레프 톨스토이는 "어떤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이나 죽음의 위협을 가하면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 그것이 폭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폭력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21세기의 지구상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총을 들고 군인이 될 것을 강요받습니다. 물론 자발적으로 군인이 되고 전쟁터에 가는 사람도 존재합니다. 그들 중 몇 명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진실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적인 선전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지고 있으며 내 조국 러시아도 예외가 아닙니다.
▲ 4월 19일(현지시간)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의 한 아파트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미국 정보당국은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군사지원을 받지 못할 경우 올해 말 러시아에 패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
ⓒ 드니프로 로이터=연합뉴스 |
여러분은 전쟁에 반대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왜 시위를 하지 않는지를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게 잔인하게, 불법적으로 잡혀가는 것을 지켜본 뒤에도 시위에 나설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식구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심지어 이혼 당할 수도 있는데, 만약 학교나 병원에서 일하거나 공무원이라면 직장을 잃게 될 텐데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요?
저는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지구에 영웅이 가득해야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연대와 인류애를 위한 더 많은 공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웅이 아닙니다
저는 평화주의가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사주의적 서사를 따르지 않고 평화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살인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시민 저항이고 동시에 위대한 반군사주의적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진 병역거부를 선뜻 지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럼 이런 생각은 어떨까요? 전선에 투입되는 러시아인들이 줄어들수록 우크라이나인들의 희생도 줄어들 것입니다.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하는 이런 방식의 저항은 다른 정부가 우크라이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보내는 수천 개의 무기보다 우크라이나의 피해를 줄이는 데 더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2년 동안의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모두 전쟁으로 매일 많은 사람들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죠. 교육, 치료, 지원에 들어가는 돈은 말 할 것도 없고요…
▲ 지난 4월 2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 도시 오데사에서 러시아 미사일 공격으로 건물이 불타고 있다. 이 공격으로 최소 2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
ⓒ 연합뉴스 |
여러분에게 그런 동정심을 요구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인류의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러시아 병역거부자 난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방법,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에 함께해주시기를 정중하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이 평화에 도달하는 가장 짧고 또 어쩌면 유일한 길입니다.
러시아에서 온 병역거부자들이 러시아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외면하지는 말아주세요. 전쟁과 살인에 동참하지 않기로 결정한 러시아 병역거부자 난민에 대한 연대가 다른 나라에서도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연대는 러시아 시민 사회 전체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는 철의 장막에 갇히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상황에도 불구하고 경제, 기술, 문화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특별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한국 국민 여러분들을 믿으며, 우리 모두가 다시는 전쟁을 겪지 않아도 될 평화로운 국가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포옹을 담아, N.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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