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가 날아들다

이예지 2024. 5. 3.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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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Fearless Female, 유쾌하고 겁 없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1편의 소설과 1편의 그림이 도착했다.
15년 전, 뉴질랜드 한 휴게소에서 웅장하게 등장한 할리데이비슨 여성 시니어 라이더 그룹. 헬멧을 벗고 은빛 머리를 찰랑거리며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던 그녀들. 나도 언젠가 머리가 은빛으로 물들 때쯤 그들처럼 당당하고 유쾌한 모습이길 소망한다.

창문을 열자 까마귀가 날아들었다. 날개는 까만 광택으로 번들거렸고 눈알은 노을처럼 붉었다. 까마귀가 세 개의 발을 창턱에 걸쳐놓으며 말했다.

“안녕, 나는 네 죽음이야.”

여자는 당혹스러워했다. 까마귀가 재잘댔다.

“놀랄 것 없어. 오늘 저녁에 너는 죽어. 응? 알고 있었잖아? 죽을 작정을 했으니 내가 찾아온 거니까. 아, 하긴, 죽음치고는 좀 귀엽지? 늘 이런 모습으로 오는 건 아냐. 오늘따라 새가 되고픈 기분이었지. 보통 죽는 순간에 날아들지만, 미리 준비하는 사람한테는 일찍 찾아오기도 해. 고객 서비스라고나 할까. 기왕 일찌감치 왔으니 인생 정리하는 걸 도와줄게. 사망 보험은 들었어? 유언장은 써 놨고? 연명 치료 거부서는 썼어? 연락 돌릴 데는 있고?”

까마귀가 푸드덕 여자의 어깨에 앉았다. 여자는 귀찮은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새를 내쫓으려 했다. 까마귀는 깍깍 웃으며 손이 닿지 않을 만치 날아올랐다.

여자는 어수룩한 몸짓으로 새의 발목을 잡으려는 척하다가 뱀처럼 왼손을 뒤로 휘둘러 날갯죽지를 잡아채었다. 까마귀가 괴성을 지르며 퍼덕였다. 여자는 장갑차처럼 까마귀를 장판 위에 내팽개치고 무릎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날개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여자가 날개뼈를 으스러뜨리려는 찰나, 새는 황금빛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가 도로 어깨 위에서 나타나 한숨을 푸욱 쉬었다.

“위험한 여자네. 죽음을 붙잡으려 들다니. 곤란해, 죽음이 그리 쉽게 잡힐 줄… 까아악!”

이번에 여자는 몸을 회전해 식탁 모서리를 박차고 뛰어올라 까마귀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여자가 새를 품에서 짓누르려는 순간 새는 다시 황금빛을 뿌리며 사라졌다. 까마귀가 숨을 헐떡이며 방문 언저리에서 나타났을 때, 재떨이가 포탄처럼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재떨이는 까마귀를 통과해 문을 우그러뜨리고 투욱 툭 떨어졌다. 까마귀는 까만 얼굴이 파랗게 질려 천장 구석에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린 채 나타났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완전 산짐승 같은 여자일세. 잠깐, 그 빗자루 좀 치워! 이봐, 평화협정 좀 맺자. 내가 잔칫상도 받아봤고 치성도 받아봤는데 이런 푸대접은 또 처음이네. 너 뭐야? 왜 이리 건강해? 이상하네, 사람 잘못 찾아왔나? 어디 장부 좀 보자. 스물두 살. 성 유 이름 진, 직업 학생, 엉덩이에 사마귀, 틀린 것 없는데? 아, 욕하지는 마. 어차피 내 귀에는 네 목소리가 안 들려. 저승과 이승은 꽤 문턱이 높거든.”

여자는 포기하고 빗자루를 내려놓았다. 까마귀가 그제야 방긋 웃으며 정수리에 올라탔다.

“이것도 인연인데, 숨 끊어질 때까지 잘 지내보자고. 나는 감재라고 해. 감재사자라고도 하지. 감자 같고 정겹지?”

여자가 기왕 손에 쥔 빗자루로 방을 슬슬 쓰는 동안 감재 까마귀는 집 안 곳곳에 머리를 들이밀고 뒤적였다.

“식용유, 국간장, 고춧가루, 소금. 양념도 종류별로 있고…. 라면도 한 박스 있고, 쌀도 한 달 먹을 만큼 있네…. 빨래도 어제 저녁에 해서 널어놓았군. 이불도 빤 지 얼마 안 됐어. 너무 깔끔 떤 것도 아니고. 킁킁, 이 김치찌개는… 어제 저녁에 해놨군. 장도 그저께 본 것 같고.”

여자는 쓰레기통을 탈탈 털어 비우고 비닐봉지를 묶어 현관에 내놓은 뒤 찌개를 데웠다. 감재는 밥통에 머리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밥도 내일 아침 것까지 해놨네. 건강에 좋은 오곡식이고. 달걀도 반 판 남아 있네. 이상해, 이상해!”

감재가 날개를 퍼덕이며 여자의 정수리에 올라앉았다. 여자는 감재를 머리에 얹은 채로 밥을 푸고 접이식 식탁을 편 뒤 팔팔 끓는 김치찌개를 한 국자 떠 밥에 부어 수저로 푹푹 쑤셔 비볐다.

“보통 혼자 살다가 죽으려는 사람 집은 말이야. 쓰레기로 가득 차 있거나 아니면 물건 하나도 없이 지나치게 정리해놨거나 둘 중 하나란 말이지. 죽을 사람 집은 이미 죽은 사람 집 같기 마련이라고. 그런데 뭐야, 이 넘치는 생활감은? 이 천년만년 살 분위기는 뭐냐고?”

여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에 한가득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너 사고사냐? 아니면 타살이야?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죽을 작정을 했으니 내가 눈에 보이는 걸 텐데.”

여자는 설거지까지 마치고 그릇은 행주로 닦아 잘 정리한 뒤, 베란다에 걸어둔 이불을 걷는 척하다가 감재의 머리 위에 휙 덮어씌웠다.

이불이 꿈틀꿈틀하고 안에서 “흥, 아직도 소용없는 줄 모르고…” 하는 웅얼거림이 들렸다. 여자는 번개처럼 싱크대 밑에서 부탄가스 통을 꺼내 식칼로 푹 찍고는 이불 안쪽에 발로 밀어 넣고 서랍에서 라이터를 찾아 들었다.

이불이 아우성쳤다. 여자가 막 라이터를 당기려는 찰나 이불 틈새로 황금빛 연기가 몽실몽실 새어 나왔다. 부탄가스가 섞여서인지 기겁해서인지, 새는 머리가 둘이 되었다가 셋이 되었다 했고, 몸도 분홍빛이 되었다가 노란빛이 되었다가 했다가 겨우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야, 이 미친 여자야, 같이 죽을 작정이야?”

여자는 능청스럽게 냉장고 뒤에 있는 소화기를 가리켰다. 감재는 입을 딱 벌렸다.

“환장하겠네. 영계의 사자를 물리력으로 없애려 하다니…. 열의는 높이 사도록 하지. 아니, 아니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이렇게 죽기 싫은데 죽으려 한다고?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거지?”

여자는 아깝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욕실로 향했다. 대야에 물을 받아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았다. 감재는 세 발을 동동거리며 주위를 오갔다.

“내가 참견할 건 아니지만, 뭐 나쁜 일 있었어? 젊을 때는 사소한 일로도 혈기로 홧김에 확 죽기도 하니까. 그랬다가 저승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하는 사람 내가 한두 명 본 줄 알아?”

여자는 머리를 다 감고는 거품이 보글보글한 물을 감재 위로 확 부었다. 감재는 붉은 눈만 남기고 피시시 사라졌다가 도로 스멀스멀 나타났다.

“실연이야? 성적 떨어졌어? 대학 떨어졌나? 괴상한 이유지만 한국에서는 평범한 이유지. 비트코인에 투자했다가 날렸나? 영끌해서 집 샀다가 대출 이자 못 갚게 생겼어? 응?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여자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다가 눈을 깜박였다. 감재도 마주 깜박였다.

“가만, 지금 몇 년이지? 사실 죽음은 시간을 넘나들거든. 꼭 시간 순서로 찾아오는 게 아니란 말이지.”

여자는 옥상에서 운동을 마친 뒤 땀에 푹 젖어 길게 드러누웠다. 감재는 샌드백 위에 앉아 탄탄한 몸집의 여자가 늦도록 정권을 지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감재는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와 여자의 가슴 위에 앉았다.

“숨이 끊어지면 내가 네 심장에 부리를 박을 거야.”

감재가 여자의 심장을 콕콕 찍었다.

“물리적으로 박는 건 아니야. 상처 하나 없이 스윽 들어가지. 그리고 네 심장에서 펄떡이는 생명의 정수를 물어 꺼낼 거야. 나는 그걸 물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를 거야. 그 뒤에는…, 아, 그 뒤는 업계 비밀이야. 가보면 알아.”

감재는 열기로 발갛게 달아오른 여자의 볼에 볼을 비비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콕 찍어 맛을 보고, 여자의 심장에 귀를 대어보았다.

“튼튼하네. 앞으로 백 년은 더 뛸 심장이야. 아깝네. 넌 오늘 밥도 먹었고, 청소도 했고, 운동까지 했어. 정말 내가 사람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감재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지옥의 불길처럼 붉었고 태양처럼 찬란했다.

“이봐, 인간, 이것도 업계 비밀인데, 죽음은 언제든 취소 가능해. 저승은 인심이 좋거든. 안 오겠다고만 하면 바로 물러줘. 계약금 반환할 것도 없고 대가 치르는 것도 없어. 저승에서는 네가 오늘 오거나 백 년 뒤에 오거나 별 차이 없거든. 똑같이 한순간이지.”

여자는 손을 뻗어 귀엽다는 듯 감재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확 다리를 움켜쥐어 비틀려 했다.

하지만 손안에서 세 다리가 점점 두꺼워지는 바람에 부러뜨릴 수가 없었다. 감재는 여자의 손에 잡힌 채로 몸집을 점점 불렸다. 큰 매처럼 자라나더니, 이내 사람 크기만큼, 이어서는 큰 익룡처럼 자라났다. 발톱이 살을 파고들었고 가슴이 짓눌렸다. 불타는 눈이 번들거렸다. 감재가 날개를 펴자 태풍 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나를 잡아도 소용없어. 다리를 부러뜨려도 태워도 소용없어. 날 없애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마음에서 죽을 결심을 거둬. 그러기만 하면 돼. 그러면 나는 한순간에 네 눈앞에서 사라질 거야.”

여자가 맥이 풀린 듯 그의 다리를 놓자 감재는 여자의 가슴을 짓눌렀다.

“고백하지. 염라대왕께서는 네가 죽으면 너를 새 저승사자로 데려오라고 하셨어. 전부터 너를 눈여겨보셨다더라고. 나는 됐다고 했지. 젊은 나이에 목숨을 버리는 패기 없는 영혼을 데려와서 뭐에 쓰겠느냐고. 물론 새 직원 구하기가 쉽지는 않지. 자살한 영혼은 어두컴컴하고, 사고나 타살로 죽은 놈은 원한이 깊고, 수명을 다해 죽은 놈은 비리비리하단 말이지. 그런데 나는 지금 다른 의미로 너를 데려가기 싫어졌어. 너 같은 인간은 저승에 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 넌 이승에서 바스라지도록 살아야 해.”

여자는 감재를 물끄러미 보았다.

“자, 죽음을 이겨 먹으려 드는 이 되바라진 여자야. 괜한 짓 말고 어서 마음을 바꿔. 그것으로 나를 멀리 날려 보내. 얼른. 나와 관계없는 삶을 질리도록 살라고.”

그때였다. 건물 아래가 소란스러워졌다.

감재는 “뭐지?” 하면서 고개를 갸웃하고는, 통통 튀어서는 폴짝 뛰어 난간에 올라 아래를 힐끗 보았다.

멀리서 큰 까마귀가 우짖는 듯한 사이렌이 울렸다. 골목 저쪽에서부터 쿵, 쿵, 하는 기계 발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로봇 부대가 방진을 짜고 전진했다. 도로를 빈틈없이 가득 채운 채, 큰 방패로 전면에 벽을 구축한 채 땅을 쾅쾅 찍으며 해일처럼 몰려왔다. 로봇은 검은 날개 같은 긴 천을 머리에 둘렀고 타는 듯이 붉은 눈을 달고 있었다. 양옆의 로봇은 게처럼 옆으로 전진하며 양쪽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을 안으로 도로 밀어 넣었다. 무심코 장을 보러 문을 연 여자가 몽둥이로 호되게 얻어맞고는 도로 구겨지듯 집 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한 중년 남자가 항의하러 나오다가 로봇 둘이 양쪽에서 겨드랑이를 들어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진행 방향 앞쪽에서부터 창문과 문이 탁탁 닫혔다. 어른들이 길에서 공기놀이하던 아이들을 허겁지겁 양팔에 안아 집에 들어갔다. 군대가 지나온 길은 불처럼 달아올랐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맞아 쓰러진 사람들이 군대가 흘린 잔여물처럼 길게 도로에 누워 있었다.

“아항, 쿠데타가 일어났구나.”

감재는 휘 둘러보았다.

“나라를 차지할 자격이 없는 놈들이 나라를 차지했네. 간혹 일어나는 일이지. 어디 보자, 시위대는 저쪽 시청광장에서 진을 치고 있고.”

여자가 일어났다. 머리를 손빗으로 쓸어 끈으로 질끈 묶었다. 감재가 여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 그렇구나. 너 죽을 결심을 했구나. 죽을 마음은 조금도 없으면서 말이지. 그렇지?”

여자가 신발 끈을 꾹 동여매었다. 감재는 세 발로 통통 튀어 다가와 여자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결심을 바꿀 마음은 없는 거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재는 푸드덕 날개를 펼치며 여자의 어깨에 와 앉았다.

“함께 있어줄게.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야. 나랑 같이 있어서 정신 사납게 죽었단 말은 들었어도 심심하게 죽었단 말은 못 들어봤어. 그리고…, 음, 그다음에는, 에,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신입. 저승사자 일도 하다 보면 재미있어. 너 같은 사람도 만날 수 있고 말이지. 내가 너처럼 인간이었을 때 이야기해줄까?”

Writer 김보영

2004년 중편소설 〈촉각의 경험〉으로 데뷔한 이래 주로 SF 소설을 썼다.

작품 및 작품집으로 〈다섯 번째 감각〉 〈얼마나 닮았는가〉 〈7인의 집행관〉 〈저 이승의 선지자〉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역병의 바다〉 등이 있다. 2021년 전미도서상 번역 문학 부문 후보에 올랐다.

Illustrator

난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에디토리얼, 애니메이션,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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