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령인구 감소·재정난에 인문계 외면…대학서 사라지는 학문의 정취[설 곳 잃은 인문학]②

심성아 2024. 5. 3. 07:1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학령인구 10년마다 200만명씩↓
재정난에 비인기학과부터 처리
'융합인재 육성' 저해 우려

학령인구 감소에 따라 재정 수입에 직격탄을 맞기 시작한 대학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인기 학과에 집중하고 있다. 비교적 취업에 불리한 인문계열 학과들은 자연스레 통폐합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초학문 붕괴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경고한다.

인문계열에 대한 외면은 비단 어제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국의 4년제 대학 인문계열 언어·문학 학과는 2018년 957곳에서 2023년 864곳으로 93곳 줄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시기였던 2021년 삼육대 중국어·일본어학과, 2022년 동덕여대 독일어·프랑스어과 등이 통폐합되거나 폐과됐다.

비 내리는 주말 밤인 지난달 20일, 경기도의 한 도서관에서 청년들이 공부하고 있다. 사진=허영한 기자

대학이 인문계열 학과 유지에 애를 먹는 데는 대학 등록금 동결과 학령인구 감소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달 24일 독어독문·불어불문과를 폐지한 덕성여대도 같은 이유를 들며 경영난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대학은 정부의 등록금 동결 기조에 맞춰 16년째 등록금을 인상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가 등록금을 동결·인하한 대학에만 국가장학금Ⅱ 유형을 지원하고 있어서다.

교육부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따르면 올해 학생 1인이 연간 부담하는 평균 등록금은 682만7000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679만4000원)보다 3만2000원가량(0.5%) 올랐다.

물가상승률이 3% 내외인 것을 고려하면 증가 폭이 낮은 수준이다. 결국 올해 4년제 일반 및 교육대학 193개교 중 26개교가 등록금을 인상했다. 나머지 166개교(86%)는 등록금을 동결했고 1개교만이 인하했다.

저출산으로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하나의 요인이다. 통계청의 ‘주요 연령 계층별 추계인구’를 보면 6~21세 학령인구는 2014년 918만1000명에서 2024년 709만2000명으로 대폭 줄었다. 10년 뒤인 2034년엔 512만1000명으로, 10년마다 약 200만명씩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상대적으로 재정이나 여건이 충분하지 않은 대학은 비인기학과를 통폐합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택할 수밖에 없다.

대학이 여전히 ‘취업 사다리’ 역할에 머무르는 점도 학생들 사이에서 인문계열 학과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고려대 경영대학 4학년 정모씨는 “요즘 문과생은 취업이 어렵다 보니 학생들이 한 번쯤은 법학적성시험이나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한다”며 “시험 기간이 아니어도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동국대 영어영문학과 4학년 김모씨도 “취업 준비도 1년 넘게 하는 경우가 많다”며 “가끔 문과를 선택한 게 후회스럽다”고 토로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이제 순수하게 인문학을 목적으로 두고 인문학과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찾아보기 힘들다”며 “문과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법학적성시험을 봐서 적성에 맞으면 로스쿨을 준비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전문직 분야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대학은 다리 역할에 그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2025학년도부터 전 대학에서 실시하는 무전공 선발이 인문대학 사정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임 대표는 “내신 상위권 학생들은 이과생이 더 많아 무전공 선발에 이과가 훨씬 유리하다”며 “결과적으로 인문학과가 정원을 뺏기면서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인문대 소속 교수들도 문과 소외 현상과 교육부의 무전공 선발 확대 방침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대학 신입생이 여러 전공을 수강하며 자신의 진로와 적성을 탐색하고 2학년에 진입할 때 전공을 선택하게 되는데, 인기 학과에 학생이 쏠려 비인기학과 소멸이 가속화할 우려도 있다. 전국 국공립대학교 인문대학장 협의회(국인협)와 전국사립대학교 인문대학장 협의회(사인협)는 지난 1월 기자회견을 열고 “융합형 인재를 키운다는 무전공 모집 취지가 제대로 구현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강창우 국인협 회장(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은 “융합형 인재를 키우려면 학생들이 융합적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소재들을 대학에서 제공해야 하는데 학과 쏠림 현상이 심화해 비인기과가 없어지면 융합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덕성여대 인문대학의 한 교수도 “교육부 취지는 전공 간 벽을 허물어 시너지를 내자는 건데 전공이 없는 상황에서 융합은 나올 수 없다”며 “씨앗을 뿌리지 않고 새로운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강 회장은 “대학은 다양한 학문의 분야들이 대학 안에서 연구되고 그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교육이 이뤄지는 곳”이라며 “기초학문이 없어지는 건 마치 건물을 짓는데 1층 없이 2층부터 짓는 것과 같아 궁극적으로 국가 학문과 산업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국가 차원에서 인문학을 포함한 기초 학문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성아 기자 heart@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