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모르고 시작… 폐업시켜달라” 번식업자의 SOS [개st하우스]

이성훈,최민석 2024. 5. 3. 06: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모견 구조 ‘루시의 친구들’에게 도움 요청
“300마리 구조 현장 보고 죄책감 시달려
염치없지만 입양자 찾아달라” 고개 숙여
개st하우스는 위기의 동물이 가족을 찾을 때까지 함께하는 유기동물 기획 취재입니다. 사연 속 동물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유튜브 '개st하우스'를 구독해주세요.

동물 구조단체 코리안독스가 경기도 포천 번식업자(빨간색 원)의 요청으로 20여 마리 모견을 구조하고 있다. 최근 경영난을 비롯해 양심의 가책을 호소하며 동물단체에 도움을 요청하는 번식업자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이성훈 기자

"얼마 전 번식업자들 단톡방에 300마리 번식장 구조 현장을 다룬 개st하우스 영상이 공유됐습니다. 멋모르고 번식업을 시작했다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거든요. 그 영상을 보며 저를 포함해 많은 번식업자들이 폐업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염치없지만 저희 아이(모견)들에게 좋은 가족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 도움을 요청하게 됐습니다."
-경기도 포천 번식업자 40대 A씨

지난 14일 국민일보 개st하우스팀으로 한 통의 제보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제보자는 대형견 리트리버와 소형견 푸들, 치와와, 포메라니안 등 모견 20여 마리를 기르는 번식업자 A씨였습니다. 그는 얼마 전 개st하우스가 보도한 비숑 번식장 구조 사연을 봤다면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국민일보 2024년 4월13일자 보도, ‘“중국산 미니비숑 차마 못키워” 번식업자의 고백’). 자신이 운영하는 번식장 모견들을 구조하고 폐업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수십 마리의 강아지들을 한번에 구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구조하고 돌보고 입양처를 찾아주는 건 큰 부담이니까요. 개st하우스는 불법 동물판매업(번식장, 경매장, 펫숍) 퇴출 캠페인을 주도하는 13개 동물단체 연합 ‘루시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중 동물단체 코리안독스로부터 “모견 구조를 돕겠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코리안독스 김복희 대표는 “동물판매업의 실태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번식견들을 구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구조 준비를 마친 지난 16일, 코리안독스와 개st하우스는 경기도 포천의 A씨 번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염치없지만, 구조해달라”…고개 숙인 번식업자

인적 드문 산골 마을에서 A씨 번식장을 발견했습니다. 20여 마리의 모견을 운반할 동물단체의 구조차량들이 줄지어 번식장 앞 공터에 주차했고, 잠시 뒤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하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A씨가 구조팀을 맞이했습니다. A씨는 구조팀을 향해 “많은 아이를 떠넘기는 것 같아 죄송하다”며 연신 허리를 굽혔습니다.

A씨 번식장은 뉴스에서 보도되던 문제의 불법 번식장들과 달랐습니다. 3층 높이로 포개진 수백 개의 철창, 배설물 범벅이 된 채 철창 안을 맴도는 모견들의 모습은 없었죠. 대신 강아지들은 넓은 운동장을 뛰놀았습니다. A씨가 이름을 부르자 모견들이 달려와 품에 안겼습니다. 미니푸들, 포메라니안, 미니비숑 등 소형견부터 대형견 골든리트리버까지 종류는 다양했습니다. 번식장 내부는 배설물 하나 없이 깨끗했고, 시설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출산 및 회복실, 미용실까지 별도로 갖춰져 있었죠. A씨는 “수백 마리씩 철창에 가둬 키우는 공장식 번식장이 아닌, 10~20마리를 반려견처럼 소규모로 키우다가 분양 보내는 가정식 브리더를 구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A씨는 건강하게 키운 생후 2개월 퍼피를 수백만원 고가에 분양하는 고급 브리더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A씨의 고급화 전략은 애초에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동물단체 카라의 ‘반려동물 대량생산과 경매 그리고 식용도살 실태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에서 매주 생산되는 5000여 마리의 번식장 퍼피들은 사실상 하나의 판매경로를 통해 최종 분양됩니다. 전국 16개 경매장 납품 및 입찰을 거쳐 펫숍을 통한 판매되는 경로입니다.

경매장과 펫숍에서는 퍼피들이 얼마나 건강한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작고 어린 퍼피가 마리당 20만~30만원씩 가장 비싼 값에 팔려나갑니다. 특히 어미젖도 떼지 못한 생후 40일 미만의 손바닥만한 자견이 가장 인기가 많습니다. 동물보호법상 분양이 금지된 생후 2개월 미만의 퍼피가 버젓이 유통되는 겁니다.

어미젖을 떼고 덩치가 커진 A씨의 퍼피는 경매장에서 5만~10만원의 낮은 가격을 받았습니다. A씨는 “젖떼고 좋은 사료를 먹이고 예쁘게 미용까지 해준 강아지가 땡처리돼 사룟값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탄했습니다. 김 대표는 “경매장은 판매액의 11%를 수수료로 떼면서 막대한 돈을 벌지만 헐값에 납품하는 번식업자들은 손해를 보는 것이 번식업의 현실”이라며 “번식업이 쉬운 돈벌이라 생각하고 뛰어든 업자들이 큰 손해를 보고 막노동판을 전전하거나 동물단체에 구조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합니다.

A씨는 번식장을 운영한 지 4개월 만에 폐업을 결심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번식장이 폐업하면 기존 모견들은 마리당 10만~20만원에 주변 번식장에 되팔리는 속칭 ‘나까마(동료에게 물건을 떠넘기는 행위를 지칭하는 은어)’ 처리됩니다. 생후 1년 미만 모견의 첫 구매가인 400만~500만원에 비하면 2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 A씨는 푼돈을 벌자고 모견들을 불법 번식장에 팔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A씨는 “모견들이 비좁은 철창에 갇혀 출산기계로 살아가게 둘 수는 없어서 부끄럽지만 동물단체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불법 동물판매업, 뿌리 뽑아야”

번식장 점검을 마친 뒤 본격적인 구조가 시작됐습니다. 구조 대상은 미니 비숑, 푸들, 치와와, 포메라니안, 그레이하운드 등 소형견 16마리와 대형견인 골든리트리버 6마리까지 총 22마리입니다. 단체 활동가들은 머릿수에 맞춰 구조용 이동장을 조립했고, 이어서 번식견을 한 마리씩 품에 안아 이동장에 담았습니다.

모견들을 이동장에 담고 구조차량에 싣기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넓은 운동장을 뛰놀며 사람과 교감하면서 지낸 덕분에 모견들이 대체로 순했기 때문이죠. 다만 리트리버 모견 두 마리는 구조의 손길을 피하며 경계성 짖음을 보였는데 이 경우에는 이동장에 담기 전 활동가들이 능숙하게 목줄을 채웠습니다.

구조를 마치자 모견들이 뛰놀던 번식장이 텅 비었습니다. A씨는 코리안독스 활동가들에게 “염치없이 구조와 입양을 부탁드렸다”며 계속 미안해했습니다. 김 대표는 “용기있는 폐업 응원한다”면서 “모견들에게는 좋은 입양자를 찾아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후 구조된 모견들은 코리안독스가 운영하는 경기도 용인 레인보우쉼터에 입소해 중성화 시술을 마치고 입양자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코리안독스가 이웃 동물단체들과 함께 구조한 번식장은 모두 4곳, 구조견은 2300마리나 됩니다. 그 중 400마리를 코리안독스가 수용했습니다. 중성화 시술을 마치고 입양자 모집까지 약 1년이 걸리는데 치료 및 돌봄 비용으로 수억원이 소요됩니다.

동물단체들이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며 번식업 폐업에 힘을 보태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경매장-번식장-펫숍’으로 이어지는 동물판매업이 동물학대의 온상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여론을 모아 규제 법안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한국판 루시법입니다.

2018년 영국에서 제정된 루시법은 6개월 미만 반려동물의 판매를 금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루시’는 영국의 한 번식장에서 평생 번식에 쓰이다 구조된 모견의 이름입니다. 코리안독스를 비롯해 13개 동물단체는 ‘루시의 친구들’ 연합을 꾸려 한국판 루시법 통과 및 번식장 공동구조 등에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미 국회에는 한국판 루시법이 발의돼 있습니다. 지난해 위성곤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반려동물의 공장식 번식과 판매를 금지하는 법을 발의했습니다. 경매 및 투기를 목적으로 한 동물 거래 금지, 6개월 미만 판매 금지 등이 골자입니다. 하지만 루시법은 21대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채 조만간 폐기됩니다.

김 대표는 “불법 번식장을 비롯해 경매장, 펫숍을 없애야만 동물을 학대하고 물건처럼 사고파는 관행을 없앨 수 있다”면서 “오는 22대 국회에서 한국판 루시법을 재발의하고 통과시키려면 많은 시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호소했습니다.

현재 ‘루시의 친구들’은 한국판 루시법 입법을 응원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을 진행 중입니다. 20만명을 목표로 현재 15만명이 참여 중입니다. 관심있는 분은 기사 하단의 서명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불법 동물판매업을 규제하는 '한국판 루시법' 촉구 서명운동 링크
-https://campaigns.do/campaigns/838

■루시의 친구들 13개 연합단체: KK9레스큐, 코리안독스, 위액트, 도로시지켜줄개, T.B.T레스큐, CRK, 유행사, 유엄빠, 애니밴드, 라이프, 동물권행동 카라, 안젤라, 다솜

■번식장 구조견 입양문의 및 코리안독스 후원 방법

-인스타그램에 '코리안독스' 혹은 '레인보우쉼터'를 검색해주세요. 후원 및 입양신청 링크가 소개돼 있습니다.

이성훈 기자 최민석 기자 tellme@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