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대학 ‘무전공 입학’ 제도가 성공하려면

2024. 5. 3. 00:3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요즘 대학 캠퍼스의 최대 이슈는 의대 정원 조정이다. 그런데 앞으로 이에 못지않게 대학 사회를 흔들어 놓을 이슈가 있다. ‘무전공 입학’ 제도다. ‘무전공 입학’이란 학생이 대학 입학 때 전공 구분을 하지 않고, 2학년 이후 전공을 정하는 제도다.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자신의 적성과 직업 특성을 좀 더 알아본 후 전공을 선택하게 하겠다는 취지다. 또한 융합적 사고력이 중요해지는 4차산업혁명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다는 명분도 있다. 그러나 인기 전공으로의 쏠림현상이 예상되고, 이에 따라 기초학문 등 소위 비인기 학과들은 고사(枯死)할 것이라는 부작용이 우려되어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 대학 내 큰 이슈된 무전공 입학제
장점 많으나 학생 지도에 어려움
기초학문 피해 방지 대책도 필수
교육부와 대학 세심한 준비 필요

논란의 시초는 올해 초 교육부가 발표한 ‘대학혁신 지원사업’과 ‘국립대학 육성사업’ 개편안이었다. 이 안에는 수도권 사립대와 거점국립대가 전체 신입생의 20∼30%를 무전공으로 뽑으면 재정적인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구상이 들어있었다. 10년 이상 지속된 등록금 동결로 재정 악화에 시달리는 대학들로서는 재정적 인센티브를 무시하기 어려우니, 사실상 이는 ‘무전공 입학’ 제도를 강제하는 안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관치’라는 비판이 나오고 대학가의 반발이 심해지자, 교육부는 ‘무전공 입학’ 제도의 도입을 재정 지원의 의무 사항이 아니라 평가에 가산점을 주는 식으로 완화하였다. 그래도 대학가의 반발은 계속돼 인문대학장협의회 등에서는 기초학문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며 추진 중단을 요구하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많은 대학에서 무전공 학생 입학 정원 배정을 놓고 대학 본부와 학과 간에 힘겨루기가 진행 중이다.

사실 교육이 학생에 대한 서비스라는 관점에서 보면 무전공 입학제를 반대할 명분은 궁색하다. 특히 대입 준비에 올인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 자신의 미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다. 그러기에 대학에 입학할 때 자신의 적성이나 특기보다는 수능 성적과 내신 등급에 맞추어 합격할 수 있는 학과에 지원서를 넣는 일이 많다. 그렇게 입학한 후에는 대학의 경직적인 학과의 벽에 갇혀 불행한 대학 생활을 하게 된다. 무전공 입학제도는 이러한 일을 방지하자는 취지이다. 물론 무전공으로 입학한 학생들이 인기 학과로 쏠리는 현상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력 수급을 원활하게 하는 순기능도 있다. 무전공 입학 제도를 운용하는 미국 대학에서는 지금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AI 전공자들을 많이 배출하는 데 비하여, 한국에서는 경직적인 학과 정원에 막혀 필요한 인력 배출이 안 되는 것이 한 예가 될 것이다.

이처럼 무전공 입학제도 추진의 명분은 명확하다. 그러나 명분이 좋다고 해서 정책이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미 1990년도 후반에 학생들의 전공 선택을 유연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계열별 혹은 학부제 모집이 시도된 일이 있다. 하지만 결국은 지금의 학과별 모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로는 교수들의 반발이 가장 컸지만, 학생들의 불만이 상당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 제도가 학생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전폭적으로 찬성할 것 같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학생들은 학과 선후배가 없어서 소속감을 못 느끼고 교수들의 진학지도가 부족하다는 점에 많은 불만을 토로하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교사와 부모가 짜준 계획표대로 움직였던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와서 아무런 지도를 받지 못하니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무전공 입학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운영한 예가 아마도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일 것이다. 학생들의 만족도도 높고, 전공 선택 시에 인기학과로의 쏠림 현상도 심하지 않다. 이러한 성공의 이유는 교수와 박사급 전문위원들이 학생들의 학업과 전공 선택 과정에서 많은 상담과 지도를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소속감을 느끼면서 자신들의 미래 진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많은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는다. 이번에 추진되는 무전공 입학제가 과거의 계열별 모집처럼 실패하지 않으려면, 이처럼 학생 지도를 위한 제도도 촘촘히 짜야 할 것이다.

무전공 입학제도의 부작용으로 거론되는 기초학문분야의 피해 우려에 대한 대책 또한 세워야 한다. 사실 무전공 입학 제도를 운용하는 미국 대학의 경우에도 문사철(文史哲) 등 기초학문 학과들을 선택하는 학생 수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들 학문 분야가 붕괴한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대학의 교양과정을 충실하게 운영하고 기초학문 분야의 연구비 지원으로 대학원을 활성화하는 대책 등이 작동하는 까닭이다. 우리도 명확한 철학을 가지고 기초학문 보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대학가에서 논란이 많은 무전공 입학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정원 확보만이 아니라 여러 세심한 준비가 요구된다는 점을 교육부와 대학 당국이 유념했으면 한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