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꼭 등장하던 이야기

이병록 2024. 5. 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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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따라 마을 따라] 용이 되려다 좌절한 아기 장수(장사)

[이병록 기자]

▲ 천마바위와 마애불 인천 천마산에 말발굽이 선명한 천마바위(마제석)와 고창 선운사 천마봉에서 내려보면서 바라본 마애불
ⓒ 이병록
 
용은 권력 상징으로 왕을 뜻한다. 고려 왕은 용의 후손을 자처하는데 왕건의 할머니가 용왕의 딸 용녀이다. 의정부 회룡사는 함흥차사로 유명한 함흥에서 이성계가 돌아오면서, 은둔한 무학대사를 찾아와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 하였다.

훈민정음으로 된 최초 작품인 용비어천가는 '용(임금)이 날아올라 하늘을 다스린다'라는 뜻으로 조선 왕조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한다. 조선시대에는 용안이나 용상처럼 왕의 신체를 상징하는 용어나 의식주 생활에서 쓰이는 각종 도구 등에 용이 머리말로 나온다. 왕이 한 명이듯이 용도 두 마리가 같이 살 수 없다.

땅이 넓은 중국의 경우, 수나라는 37년에 망하고, 명과 청나라도 300년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군웅이 할거한다. 반면에 우리 역사에서 군웅할거는 후삼국시대가 마지막이다. 고려는 475년을 유지했고, 조선은 518년을 이어가면서 역성혁명이 없었다.

전국에 분포하는 아기 장수(장사) 얘기는 실패한 민중의 구원자를 상징한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우리나라에서는 '정도령', 불교나 기독교에서는 '미륵불', '메시아', 러시아에서는 '라진의 까마귀'처럼 세상을 바꿀 영웅을 애타게 기다렸다. 백성의 기다림과 실패에 대한 한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기 장수는 토룡(지렁이) 수준에서 끝났고, 우투리 장수 등은 이무기 단계에서 좌절한 용이다.

인천 부평구 가정동에서 합천 이씨 문중에 아기 장사가 태어났는데, 일주일 만에 걷고, 양어깨 날개로 천장을 날아다녔다. 후환이 두려워 아기 장사를 다듬잇돌로 눌러 죽였다. 이때 용마가 나타나 집을 빙빙 돌다가, 아기가 죽자, 울면서 떠났다. 이후로 이씨 문중에는 인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천마산 중턱 암석 마제석(천마바위)은 천마 발자국이라 전해지고 마제봉이라 불린다, 산은 천마가 나왔다고 천마산으로 불렸고 일제시대에 철마산으로 바뀌었다. 특이한 것은 한국 용에게는 날개가 없으나 아기 장수에게는 날개나 비늘이 있고, 천마에게도 날개가 있다.

포항시 청하면 미남리 용산은 칠포에서 월포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 있다. 이곳에도 아기 장사 전설이 있다. 월포리 유씨 부부가 자식이 없어 기도 끝에 겨우 아들을 얻었다. 아이가 사흘 만에 걸어 다녔으며, 기골이 장대한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집안 어른들이 역적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자고 한다. 탯줄을 끊은 가위로 찔러 죽이던지 돌로 눌러 죽어야 한다고 했다. 아이가 죽는 순간에, 산에 살던 용이 아들의 한과 함께 승천했다.

용이 날아가 버린 산이라고 해서 용산이라 하는데, 용마를 타고 가다가 밥을 지은 솥 바위와 국을 끓인 작은 솥 바위가 있다. 용마는 하늘을 날았으니, 천마로 부르기도 한다. 큰 가뭄 때 용산 정상에 봉화를 하면서, 물을 길어와 솥 바위에 가득 채우면 영험이 있다고 전해온다.

고창 선운사 주변의 용문굴과 천마봉은 아기 장수 전설에 나오는 용과 천마 이름이다. 여기에는 아기 장수 대신에 동학혁명을 일으킨 손화중 대접주의 얘기가 전한다. 선운사 도솔암 아래에 있는 마애불에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은 그 나라가 망할 것이오, 망한 후에 다시 흥한다"라는 비기가 숨겨져 있었다. 마애불에서 손화중이 그 비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민중의 한이 만들어 낸 얘기다.

손화중처럼 아기 장수가 성장했으나 뜻을 못 이루고 관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내용도 여럿 있다. 통영 수우도 설운 장군 설화는 장성해서 왜구와 싸우나 아내의 배신으로 결국 관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지리산 우투리 아기 장수도 성장해서 싸우다, 어머니가 비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줄거리가 조금 바뀐 것은 못다 핀 영웅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거나, 지리적으로 깊은 산이나 바닷가라는 환경을 반영한 이야기보따리일 수 있다.

공통적인 내용은 아기 장수가 가족에게 직접 죽임을 당하거나, 가족 배신으로 관군에게 죽는다. 삼족을 멸하는 멸문지화에 대한 처벌의 공포나 위험부담이 자식이나 남편에 대한 사랑보다 크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국에 분포한 것은 시대의 암울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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