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사 교과서는 '2차 동학농민혁명' 어떻게 다뤘을까

박용규 2024. 5. 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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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9종 비교... '독립운동'으로 기술, 용어는 여전히 '동학농민운동'

[박용규 기자]

▲ 항일구국투쟁을 펼친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112쪽)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미래앤, 2024)
ⓒ 박용규
 
필자는 최근 2024년판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9종에 실린 '2차 동학농민운동' 부분 자료를 구해 각각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비교·분석해 볼 기회를 얻었다. 

9종 교과서는 2차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4년에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동학농민혁명이라고 그 용어를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교과서는 여전히 '동학농민운동'이라고 기술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기관에서 제정한 '동학농민혁명' 용어를 교과서에서도 사용해야 할 것이다.

9종의 2024년판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금성출판사·동아출판·리베르스쿨·미래앤·비상교육·씨마스·지학사·천재교육·해냄에듀에서 발간되었다. 9종 교과서는 2020년 3월에 모두 초판 발행되었다. 이후에 계속해서 2024년판까지 나온 9종 교과서는 초판 서술 내용을 각각 그대로 찍어내었다.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는 독립운동

9종 교과서에 서술된 '2차 동학농민운동' 부분의 내용은 동일하였다. 9종 교과서 가운데 미래앤에서 발간된 2024년판 '2차 동학농민운동' 부분의 서술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항일 구국 투쟁을 펼친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

조선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가졌던 일본은 조선 정부의 철병 요구를 거부하였다. 오히려 무력으로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여 조선 정부를 장악한 후,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농민군은 반침략의 기치를 들고 다시 봉기하여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하였다. 전봉준의 남접 부대와 손병희의 북접 부대는 논산에서 연합 부대를 형성한 후, 서울을 향해 여러 경로로 북상하였다. 이때 전라도와 충청도는 물론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등지에서도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공주 우금치에서 우세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정부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크게 패하였다.

일본군과 정부군은 끈질기게 저항하던 동학 농민군을 공격하면서 대규모 학살을 저질렀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도 대부분 체포되었다. 결국 동학농민운동은 외세 의존적인 정부의 태도와 일본의 무력 개입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112쪽)
  1894년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는 항일구국투쟁이었다. 즉 독립운동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다. 독립운동과 같은 의미의 말로 항일무장투쟁, 항일구국투쟁, 항일투쟁, 반일투쟁, 광복운동, 국권회복운동, 주권회복운동, 독립전쟁, 민족운동, 민족해방운동 등이 있다. 독립운동은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항거한 운동이다.

독립운동에는 두 범주가 있다. 국권 수호 운동과 국권 탈환 운동이 그것이다. 국권 수호 운동은 국권이 현저하게 침탈·침해되었을 때 이를 수호하는 운동을 가리킨다. 일제는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을 일으켜 남의 나라의 왕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포로로 잡았으며, 조선군대의 무장을 해제했다. 또 기존의 민씨 정권을 타도하였으며, 친일 개화파 정권을 세웠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남의 나라의 국권을 현저하게 침탈한 사건이었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국권침탈 사건

미래앤 교과서는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교과서는 "일본은 오히려 무력으로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여 조선 정부를 장악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할 때 일본군 8천여 여단 병력을 동원하였고, 조선군은 사망 17명, 부상 60여 명인데 반해, 일본군은 사망 1명, 부상 2명에 달하였다.(<도쿄아사히신문>, 1894, 7, 28.) 사건의 규모가 을미사변 보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이 더 컸고 더 폭력적이었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에 대해, 나머지 8종 교과서도 모두 서술하고 있다.

1895년에 일제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남의 나라의 궁궐인 경복궁을 또다시 점령하였고, 왕비 민비를 시해하였고,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을미사변도 명백한 일제의 국권침탈 사건이었다.

이에 국권 수호 운동 즉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는 갑오의병(1894), 2차 동학농민혁명(1894∼1895), 을미의병(1895∼1896)이 일어났다. 갑오의병, 2차 동학농민혁명, 을미의병은 모두 항일무장투쟁이었다. 미래앤 교과서는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에 대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맞서, 동학농민군이 반침략의 기치를 들고 다시 봉기하여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항일 구국 투쟁은 독립운동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2차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으로 기술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가 독립운동이었다는 서술은 미래앤 교과서 이외의 여러 교과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리베르스쿨 교과서는 "일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난 반침략적 민족 운동이었다"(110쪽)고 서술하였다. 씨마스 교과서는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에 맞선 민족운동이었다(119쪽)"라고 기술하였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다시 봉기한 반외세의 성격을 띤 민족 운동"이었다(120쪽)고 서술하고 있다. 동아출판 교과서는 "전봉준이 일본을 몰아낼 것을 주장하면 다시 봉기하였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반외세 운동이었다"(101쪽)라고 기술하고 있다.

해냄에듀 교과서는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이 주목표였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는 반외세투쟁이었다"(115쪽)라고 서술하고 있다. 지학사 교과서는 "일본을 몰아내고자 일어났고, 외세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던 반외세 운동이었다"(116∼117쪽)고 기술하였다. 비상교육 교과서는 "일본군 타도라는 반침략의 기치를 내세우며 다시 봉기하였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 나라를 지키려 한 반침략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111쪽)라고 서술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잔여 세력은 을미의병에 가담함

한편 미래앤 교과서는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부분에서 "동학농민군의 잔여 세력은 을미의병에 가담하여 반침략 항일 의병투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113쪽)라고 서술하고 있다. 하나의 사례로 김순여·황준삼·백낙중·이경태 등 동학농민군 잔여 인사들이 1896년 나주 을미의병에 참여한 경우가 있었고, 이들 모두는 1896년 8월 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사법품보>(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10), 224∼227쪽) 동학농민군 잔여 세력의 을미의병 가담 기술은 리베르스쿨 교과서, 천재교육 교과서, 금성출판사 교과서, 동아출판 교과서, 해냄에듀 교과서, 지학사 교과서, 비상교육 교과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차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의병

다음으로 9종 교과서는 동학 농민군이 2차 봉기에 나선 이유와 동학농민군들이 '의병'을 자처하였음을 밝히고 있는 <전봉준 공초>라는 자료를 전부 제시하고 있다. 아래는 미래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봉준 공초(재판 기록)
심문자: 전주 화약 이후 다시 군대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전봉준: 일본이 개화를 구실로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공격하니,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싸워 그 책임을 묻고자 함이다."(113쪽)
 
 
▲ 전봉준 장군이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힌 마지막 모습 (1895년 2월 27일)
ⓒ 양상현
 
즉 2차 동학농민혁명은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봉기한 항일투쟁이었다. 아울러 전봉준은 1894년 9월 재봉기를 하면서 자신들의 군대를 '의병'이라고 명백하게 밝혔다.(<전봉준 공초>(1895))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에게 심문을 받을 때, 전봉준은 재봉기한 자신들의 군대를 3번이나 '의병(義兵)'이라고 규정하였다.(아오야마 고헤이(靑山好惠), 「동학당 대두목을 사로잡다」, <도쿄 아사히신문>, 1895, 3, 5.) 따라서 2차 동학농민혁명은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일어난 동학의병이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에 맞서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9종 교과서는 대체로 을미의병에 대해 유인석, 이소응 등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켜 개화파 관리들을 처단하거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2차 동학농민혁명과 을미의병의 공통점: 독립운동

9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에 나타난 2차 동학농민혁명(동학의병)과 을미의병의 공통점은 척왜(斥倭)를 내세운 항일운동, 즉 독립운동이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모두 적극적인 국권 수호 운동, 항일무장투쟁, 일본의 침탈에 맞선 반침략·반외세 민족운동이었다.

을미의병 시기 일본군과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이 236명이었고, 관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이 60명이었다. 전사자가 총 296명이었다. 전사자가 대략 3백여 명이었다.

을미의병 145명 서훈은 훌륭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부터 2022년까지 을미의병에만 참여한 분들 가운데 독립유공이 있는 145명을 서훈하였다. 대단히 훌륭하고 잘한 일이었다.

2차 동학농민혁명은 참여자와 전사자의 규모에서 을미의병을 능가하였다.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는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살육했는데, 희생된 농민군 사망자가 3만 명, 부상당한 뒤 사망한 자를 포함하면 5만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는 동학농민군 전사자가 3만 명에서 5만 명에 달하였다고 기술했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미서훈은 형평성 논란 제기

을미의병과 똑같은 항일 독립운동이 2차 동학농민혁명임에도, 전봉준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게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단 한명도 하지 않아, 을미의병 참여자의 서훈과 비교하여 형평성과 공정성 논란이 지속되어 왔다.

2차 동학농민혁명과 을미의병의 차이점은 항일 투쟁의 주체가 농민이냐, 양반 유생이냐에서 갈렸다. 을미의병에 참여한 양반은 서훈이 되고,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항일 농민은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문제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현안으로 대두되어 있다. 국회에 이미 동학 서훈과 관련된 개정 법률안이 2개나 상정되어 있다. 이제라도 국가보훈부의 공훈심사과 공무원들과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들은 을미의병 서훈과의 형평성을 맞추어 동학 참여자에게도 서훈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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