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이, 비운의 황제였나 혹은 비겁한 매국노였나

이준목 2024. 5. 2. 09:5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TV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

[이준목 기자]

선통제(宣統帝) 아이신기오로 푸이(溥儀, 1906-1967)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의 초대 황제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황제가 될 운명으로 태어나, 비참한 포로를 거쳐 평민으로 삶을 마감해야했던 기구한 인생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1987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연출한 영화 <마지막 황제>는 바로 푸이의 일대기를 묘사하여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고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을만큼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힘없고 불쌍한 '비운의 황제'에서, 권력을 탐하여 일본에 협력한 '매국노'라는 비판까지, 오늘날에도 극와 극의 평가가 공존하는 푸이의 진면목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4월 30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49회에서는 '황제에서 전범으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 편을 통해 중국 역사상 최후의 황제가 된 푸이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조명했다.

만주족이 수립한 청(淸) 제국(1616-1912)은 17, 18세기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군림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19세기부터 내부의 부정부패와 피지배층인 한족과의 고질적인 갈등, 서양 열강의 진출 등으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청나라는 9대 함풍제(咸豊帝)의 치세에 접어들며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運動)과 1, 2차 아편전쟁(阿片戰爭)의 패전을 겪으며 국력의 추락과 내부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뒤를 이은 동치제(同治帝)와 광서제(光緖帝)는, 각각 양무운동(洋務運動),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 등의 근대화 개혁을 여러 차례 시도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연이은 패전으로 한계를 드러내며 모두 실패로 끝난다.

1908년(광서제 34년) 중국 역사상 최초의 헌법인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이 반포된다. 이는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확인한 동시에, 군주의 권리를 명문화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황제 중심의 낡은 지배체제에 한계를 느낀 청나라의 지식인들은, 대안으로 입헌군주제와 공화제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의 실권자는 서태후(西太后)로 조카인 광서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사실상 황제와 다름없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의화단 사건과 신축조약(辛丑條約)으로 이미 청 제국은 멸망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이나 다름없었고, 서태후는 청나라 몰락의 주범으로 꼽히며 정치적 궁지에 몰려있었다. 서태후로서는 아예 황제 제도를 폐지하는 공화제보다는, 비록 권력은 다소 줄더라도 자신의 지위를 지킬수 있는 입헌군주제로의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해, 광서제와 서태후가 잇달아 사망한다. 광서제는 서태후에게 10년간 감금되어있던 상태에도 사후에 시신에서는 독약인 비소가 검출되며 서태후에 의하여 독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서태후는 이미 후사가 없었던 광서제의 뒤를 이을 차기 황제를 이미 지목해놓은 상황이었고, 그가 바로 푸이였다.

본래는 황위 계승서열에서 전혀 거리가 멀던 푸이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후계자로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일까. 서태후의 계획은 푸이 역시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어 배후에서 계속 실권을 휘두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광서제가 죽은뒤 불과 하루만에 서태후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푸이는 광서제의 동생인 아버지 순친왕과 어머니 구왈기야 여우란 사이에서 태어났다. 푸이의 외할아버지이자 여우란의 아버지 용루는 서태후의 심복이었다. 푸이가 등극할 때의 나이는 고작 3세였다.

한 일화에 따르면 어린 푸이가 즉위식이 길어지면서 참지못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생부인 순친왕이"(식이) 곧 끝난다"고 달랬는데, 이를 본 조정 대신들은 즉위식에서 불길한 말을 한다고 순친왕을 질타했다고 한다. 훗날 이는 푸이와 청나라 왕조의 불길한 운명을 예언하는 복선처럼 해석되기도 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발발하며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수립된다. 푸이의 나이 6세이자 재위에 오른지 3년만이었다. 이로서 268년을 존속한 청나라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푸이는 비록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지만, 쑨원(孫文)과의 협상으로 대총통의 자리에 오른 위안스카이(袁世凱)는 푸이를 내쫓지 않고 자금성 안에서 그대로 머물며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후원까지 해줬다. 급진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섣불리 황제를 제거할 경우 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푸이는 자금성 내에서 황제라는 칭호도 그대로 유지할수 있었다.

하지만 권력에 욕심이 컸던 위안스카이는 총통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았고, 정적들을 제거하며 1915년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다. 이는 쑨원을 비롯한 반대파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각지의 군벌들이 반기를 들고, 위안스카이의 심복들마저 등을 돌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고립된 위안스카이는 결국 황제 자리에서 내려왔고 얼마 지나지않아 홧병으로 병사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중국은 한동안 군벌들이 난립하는 혼란기에 접어든다. 군벌중 하나였던 장쉰(張勳)은 캉유웨이(康有爲)와 손을 잡고 푸이를 다시 황제로 복위시키고 청나라의 재건을 주도하는 복벽운동(張勲復辟)을 일으켰다. 1917년 11살의 푸이는 두 번째로 황제에 즉위하게 됐다. 당시 수도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해외 외교관들은 "지금 중국은 한여름의 광기에 휩싸여있다"고 표현하며 청나라의 부활에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푸이의 두 번째 황제 생활은 불과 12일만에 끝났다. 중국 내 여론은 청나라의 부활을 강하게 반대했다. 복벽 반대파들이 결집한 군대가 베이징을 공략하여 자금성을 포위했다. 열세에 몰린 복벽파는 자금성에 폭탄까지 투하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장쉰과 캉유웨이는 푸이를 버리고 도주했다.

푸이는 결국 두 번째 퇴위를 발표하며 "자금성 깊은 곳에 사는 어린 아이인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온 천하의 상황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라는 심경을 밝혔다. 황제에 오르는 것도, 내려가는 것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남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했던 처지에 대한 무기력한 심경이 드러난다.

푸이는 자금성내 건청궁에 연금되어 외출과 외부인 접견이 통제되며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했다. 이 시절 고립된 푸이를 세상과 연결해준 유일한 통로는, 영국의 학자이자 외교관으로 푸이의 가정교사가 된 레지널드 존스턴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영어를 비롯하여 다양한 서양식 예절과 생활방식을 가르쳤고, 푸이는 존스턴을 통하여 전화기, 라디오, 신문 등 신문물들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푸이는 존스턴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서양식 문화를 깊이 동경하게 된다. 존스턴이 만주족 특유의 전통인 변발을 가리켜 "서양에서 돼지꼬리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를 듣자 푸이는 그대로 변발을 잘라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푸이는 생활공간을 모두 서양식으로 바꾸었고, 영국 신사처럼 중절모와 수트를 착용하고 향수와 샴페인를 애용하는가하면, 테니스와 골프를 취미로 즐겼다고 한다. 한편으로 푸이가 이처럼 호화로운 서양식 문화에 탐닉한 것은, 이름만 황제일뿐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처지 속에서 잠시라도 해방되고 싶었던 마음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924년 베이징 정변(北京政變)이 일어나며 북경을 점령한 군벌 펑위샹(馮玉祥)은 청 황실에 대한 예우를 폐지하기로 결정하고 푸이를 자금성에게 축출했다. 푸이는 영국과 네덜란드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푸이를 받아준 곳은 일본 제국이었다. 중국침략을 노리던 일본은 푸이가 언젠가 이용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계산하에 받아들인 것이었다. 푸이는 일본이 마련해준 텐진의 거처에서 황제로 예우받고 매일같이 파티를 즐기며 여전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발하며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의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국제사회는 1922년 워싱턴 회의 조약에 따라 중국의 영토주권을 인정하는데 합의했으므로 일본이 중국의 영토를 점령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이에 일본이 명분으로 꺼내든 비장의 카드가 바로 푸이였다. 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일본의 만주통치를 위한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일본은 푸이에게 만주에게 독립국가가 수립되면 황제를 시켜주겠다고 유혹했다. 청나라 부흥과 황제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푸이는 이를 수락한다. 1932년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이 건립되고 2년 뒤인 1934년에는 푸이가 세 번째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푸이의 나이 28세였다.

만주국의 국기는 노란 바탕에 총 다섯 가지의 다른 색이 담겨있다. 노란색은 만주족, 나머지 네 가지 색은 일본인, 한족, 몽골족, 조선인을 의미한다. 이는 곧 일본과 중국, 조선인은 모두 하나라는 제국주의적 색채를 드러낸 것이었다. 푸이는 국기의 의미를 듣고 이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청나라의 부흥'이 아니라며 반발했지만, 본색을 드러낸 일본은 거부하면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협박하자, 결국 푸이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사회는 리튼 조사단을 만주에 파견하여 실상을 파악했고, 만주국을 일본의 만주침략을 위한 괴뢰국으로 규정하는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에 일본은 자신들의 만주침략을 부인하며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푸이는 일본에 의하여 이용당했지만, 한편으로 그 역시 황제에 대한 야심 때문에 일본에 동조했던 것도 사실이다. 푸이는 청나라 재건을 명분으로 내세워 관리에 불과한 집정보다는, 황제가 되게 해달라고 일본에게 계속해서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푸이가 황제가 되었어도 만주국의 실질적인 국정을 장악한 것은 일본의 군대와 관리들이었다. 푸이는 서열상 독립국의 황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본 천황의 신하에 불과했다.

일본은 개발이 낙후되어 있었지만 자원이 풍부했던 만주를 자신들의 대륙 침략을 위한 자원 공급지로 육성하기 위하여 공을 들였다. 도로망, 상하수도 시설 등을 정비하여 도시를 개발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근대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춰나갔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고, 일본의 토착신앙인 신토를 국교로 정하는 등, 실체는 철저히 일본의 식민지에 불과했다.

푸이는 1935년 일본의 초청을 받아 도쿄를 방문하여 당시 일본 쇼와 천황을 만났다. 또한 푸이는 일본군의 열병식에 참석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하기도 했다. 푸이는 "짐은 일본 천황과 정신적으로 한몸과 같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 뜻을 받들어 우방(일본)과 일심동체로 양국의 영원한 기초를 마련하고 동방도덕의 참뜻을 발휘해야 한다"는 조서를 발표한다. 이는 '일본과 만주는 하나'라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담은 것으로, 푸이의 행적이 철저히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푸이는 1940년 두 번째 일본 방문 뒤에는 만주국에 일본식 신사(神社)를 그대로 본딴 건국충령묘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는 전사한 만주국과 일본군인들의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이른바 만주국판 야스쿠니 신사였다. 만주국은 철저히 일본에 봉사하는 나라로서 주요물자를 이본으로 수출했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을 따라 참전을 선포하기도 했다.

만주국 내에는 일본의 잔혹한 전쟁범죄를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가 남아있다. 일본은 만주국 내에 생화학 병기 개발과 생체실험을 위하여 설립한 관동군예하 '731부대'의 존재다. 여기에는 생체실험대상자인 '마루타'를 수용하는 시설도 포함되어있었다. 조선인과 중국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끌려와 생체실험에 이용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또한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며 부대가 철수할 때 증거를 은폐하기 위하여 남은 생존자들마저 모두 학살하기도 했다.

푸이와 만주국에게 몰락의 시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2차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자 소련은 연합군과 조약을 맺고 만주에 대한 이권을 얻는 댓가로 만주국을 침공한다.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만주국도 멸망했고 푸이는 39세의 나이에 세 번째로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푸이는 심양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도주하려고 했으나, 이미 공향을 점령한 소련군에게 체포된다. 푸이는 전범재판에서 일본의 전쟁범죄를 입증한 증인으로 소환된다.

푸이는 재판정에서 자신은 일본에 강제로 이용당했을 뿐이라며 책임을 부인했고 일본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반면 일본 측 변호인들은 푸이의 증언이 거짓이며, 그가 적극적으로 침략행위에 동참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푸이는 소련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다. 푸이는 소련의 통치자인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만주국의 황제 시절을"나에게 수치스러운 얼룩"이라는 표현으로 규정하며, 일본의 강압에 맞서보려고 했지만 할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푸이가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매달린 것은 만일 소련이 자신을 중국으로 소환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이의 바램과는 달리, 소련은 1950년 푸이의 중국 송환을 결정한다. 푸이는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전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죄수번호 981'로 불리우며 무려 10년이나 더 수감생활을 해야했다.

푸이는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각종 노동을 하면서 과거를 뉘우치는 모습이 여러 차례 공개됐다. 이는 중국 정부의 대외 홍보와 선전을 위한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푸이를 매국노로 바라보던 중국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고 한다.

1959년, 53세가 된 푸이는 마오쩌둥의 특별사면령을 받아 퇴소하여 다시 사회로 돌아오게 된다. 황제에서 평민으로 내려온 푸이는 이후 베이징의 한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하며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하지만 푸이의 삶은 마지막까지 평탄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푸이의 말년은 중국이 한창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의 광풍에 휩싸였던 시기였다. 푸이는 홍위병을 사칭하는 이들이나, 만주국 시절에 그로 인하여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찾아와서 시달림을 받아야했고, 스트레스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고 한다. 치료 시기를 놓친 푸이는 결국 1967년, 암 후유증으로 61세의 나이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우리가 갈 길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다. 하지만 그런 선택의 결과까지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다." 숀 코비 플랭클린 코비 부사장의 격언이다. 푸이는 인간적으로는 순박한 면도 있었지만, 가진 욕심에 비하여 세상물정에는 어둡고 무능했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한 역사적 죄과는 미화하기 어렵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의 평가다.

때로는 남의 손에 의하여, 때로는 자신의 의지로 집착하기도 했던 '황제'라는 타이틀은, 평생에 걸쳐 그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푸이의 기구한 인생은 중국의 혼란한 근현대사와 제국주의 시대의 그늘을 관통하는 상징으로 남았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