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청년 없인 배 못 만든다…조선 3사 외국노동자 2만 육박 [외노자 52만명, 공존의 시대]

박영우, 오삼권 2024. 5. 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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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4일 오후 경남 거제시 옥포만. 한화오션 거제사업장 제1도크(선박 건조시설)에선 37층 아파트 높이(103m)의 주황색 크레인이 경고음을 울리며 천천히 구조물을 옮기고 있었다. 길이 530m, 폭 131m 규모의 제1도크에선 근로자들이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4척을 동시에 건조 중이었다. 선박 아래 쪽에서는 헬멧과 마스크로 중무장한 직원들이 불꽃을 튀기며 용접 작업에 한창이었다. 네팔에서 온 노빈드라(41)는 “힘든 일이지만 작업을 끝내고 완성된 배를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선임 직원의 작업 지시는 대부분 한국말로 이뤄졌지만, 외국인 동료들끼리는 네팔어, 태국어, 베트남어 등 모국어로 대화한다. 조선소에서 쓰이는 언어는 7개국어 이상. 한화오션 관계자는 “최근 외국인 노동자들이 크게 늘었다”며 “입국할 때 기초적인 한국어를 배워오기 때문에 현장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 조선 1번지’ 거제와 울산으로 외국인 근로자들이 몰리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조선3사 및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외국인만 이미 1만5000명이 넘는다. 올 3월 기준 국내 조선업 근로자 11만3000명 중 약 13%가 외국인이다. 올해 2만명을 돌파할 가능성이 크다.

오랜 침체기를 거친 조선사들에 선박 수주가 다시 몰린 2022년부터 외국인 근로자들이 급증했다. 지난 10년새 조선사들이 대규모 구조조정을 했던 데다, 임금 인상 여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조선업으로 국내 젊은 일손이 유입되지 않자 조선사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공단을 거쳐 취업한 조선업 종사 외국인은 2021년 230명에서 2022년 2667명으로 늘었고, 지난해엔 5540명으로 2배 이상 다시 증가했다. 이들은 현지에서 한국어능력시험ㆍ기능 시험 등을 통해 선발되는데 입국후 교육을 거쳐 국내 사업장에 배치됐다. 여기다, 용접이나 도장ㆍ플랜트 등 기술을 보유한 외국인(E-7 비자) 취업자 약 7000명까지 합치면 지난해에만 1만 2000여 명의 외국인을 한국 조선업이 빨아 들였다. 올해 1분기에도 조선사 취업을 위해 입국한 외국인이 1400명에 달한다. 네팔ㆍ우즈베키스탄ㆍ스리랑카청년들 없이는 배를 못 만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김경진 기자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의 조선소는 꿈의 직장으로 불린다. 고국의 일자리보다 급여 수준이 5배 이상 높다. 한국 생활 14년 차인 노빈드라 씨는 경남 거제 한화오션 하청업체서 절단과 용접을 한다. 네팔에서 대학 졸업후 교사로 일했던 그는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거제로 왔다. 그는 “처음엔 김치나 된장 냄새가 낯설어 식당에도 못 들어갔지만, 지금은 해장국도 잘 먹는다”고 말했다. 스리랑카에서 온 산다누원(37)씨는 2013년 입국해 한화오션 하청업체서 장비 포장 업무를 하고 있다. 그는 월급 250만원 중 200만원을 고향의 가족들에게 송금한다고 했다.

이들 외국인 노동자의 정착을 위해 기업들은 대표이사가 직접 나서서 개별 면담을 하고, 구내식당에선 이들을 위한 고향 음식을 제공한다. 권오갑 HD현대 회장은 지난 3월 27일 울산의 조선소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을 직접 만나 격려했다. HD현대중공업은 업계 최초로 사내에 ‘외국인지원센터’를 만들어 8개국어 통역사를 상주시키며 지원하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행정 업무를 돕고 다양한 고충에 대해 상담도 한다. 삼성중공업은 국가별 맞춤형 식단을 운영 중이다. 쌀국수나 미고랭뿐만 아니라 치킨커리덥밥 등을 컵밥 형태로 개발하고, 외국인 직원들이 좋아하는 현지 소스도 구내 식당에 구비했다. 한화오션은 외국인 근로자 주거 안정을 위해 지난해 기숙사를 리모델링했다. 지역사회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올해 거제시는 외국인 노동자 지원을 위해 시청 내 전담팀을 신설했다. 이갑선 거제시청 조선지원과장은 “우리 지역에 온 외국인 근로자들의 적응과 통합을 위해 한국어ㆍ한국 문화 교육을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늘면서 조선업 불황으로 쪼그라들었던 지역 경제도 살아나고 있다. 거제시 주민등록인구는 2015년 이후 10년간 10%(2만2647명) 가까이 줄었는데, 20~39세 청년 인구 감소폭이 42.9%(3만4057명)로 컸다. 이 빈자리를 조선소의 외국인들이 채우면서 거제시 경제활동 인구는 2022년 12만 5000명에서 지난해 13만 5000명으로 1년새 1만명 증가했다. 거제시 장평동 삼성중공업 인근에서 만난 공영란 부동산중개사는 “조선소 근처에 월세 원룸을 찾는 외국인들이 급증하면서 요샌 월세 가격도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거제시 월세가격지수는 2021년 99.9에서 올해 2월 103.4까지 올랐다.

5일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한화오션 거제조선소에서 만난 노빈드라(41, 네팔)(왼쪽), 산다누완(37, 스리랑카)(오른쪽). 오삼권 기자.

다만, 한국 조선업의 숙제도 생겼다. 외국인 근로자가 늘며 산업계의 인력난이 일부 해소됐지만 ‘노동 숙련도’는 떨어졌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조선업체 관계자는 “일부 숙련공 자격으로 들어온 외국인 근로자 중 일부는 용접 등 능력이 내국인 근로자보다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이 현장에서 나온다”며 “국내에서 숙련 인력을 육성하는 것도 포기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정부와 조선업계는 전문 인력 육성을 위한 대안을 마련 중이다. 대표적으로 국내 조선업 전문ㆍ생산 인력을 매년 2000명 규모로 양성하는 계획이 추진된다. 세부 실행 방안은 상반기 내 산업부가 발표할 ‘K-조선 초격차 기술 로드맵’에 담길 예정이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조선 3사에서는 기술교육원을 운영하면서 국내 인력을 육성하고 있지만, 중도 포기자가 많다”라며 “정부 차원에서 한국 제조업의 근간인 조선업 인력을 키우기 위해 처우 개선 등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글로벌 식단으로 제공된 점심을 배식받고 있다. 메뉴는 커리. HD현대중공업 제공

박영우 기자, 거제=오삼권 기자 novemb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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