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8도, 내겐 한파" 그랬던 방글라데시 40대, 숨은 역군 됐다 [외노자 52만명, 공존의 시대]

김민주, 최종권 2024. 5. 1. 05: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1일 충북 진천군 덕산면 빅마트에서 태국인 여성 디암다우가 배달을 앞둔 식자재를 보여주며 웃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방글라데시에서 온 청년은 10년간 성실한 직장 생활 끝에 꿈에 그리던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태국인 여성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부업으로 채소를 팔다가 아예 식자재 매장을 차렸다. 그런가 하면 대기업 조선소에서 작업반장 역할을 해내면서 다른 외국인 직원 지원 업무를 함께 담당하는 외국인도 있다. 전국에서 산업 현장의 역군으로 자리 잡은 외국인 모습이다.


고국선 영상 8도가 ‘한파’… 이 악물고 따낸 韓 국적


방글라데시에서 온 호세인 모민(41)은 지난 2월 꿈에 그리던 한국 국적을 받았다. 입국한 지 10여년 만이다. 그는 2002년 대학생 때 고국에서 한국업체 게임기 판매 파트너로 일하며 한국의 기술·경제력을 부러워하게 됐다고 한다. 호세인은 대학을 나와 방글라데시에 있는 독일계 운송업체에서 일하다 2011년 E-9(비전문 취업) 비자로 한국에 왔다. 그는 “첫 직장인 인천 단추공장에서 건강에 문제가 생겨 그만뒀다. 이어 어렵게 잡은 두 번째 직장은 8개월 만에 폐업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영상 8도가 ‘한파’에 해당하는 나라에서 온 그에게 한국의 겨울은 혹독했다. 그는 “그나마 월급이 5배나 올라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했다.
지난 2월 20일 부산 해운대구 아세안문화원에서 열린 부산출입국외국인청의 국적 수여식에서 방글라데시 출신 호세인 모민이 아들과 함께 우리나라 국적을 받았다. 사진 호세인 모민
2012년 ‘따뜻한 곳’을 찾아 경남 김해로 온 뒤 그의 삶은 달라졌다. 호세인은 “조선 도장 업체에서 성실히 일하는 걸 좋게 본 한국인 ‘형님’들에게 기술을 배우고, 한국어도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의 비자는 점차 업그레이드됐다. 그는 2018년부터는 김해에 있는 외국인 대상 송금업체 관리자로 일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외국인을 대하며 5개 국어(한국·벵골·인도·파키스탄·영어)를 배웠고, 국내 외국인 근로자 처우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
현재 호세인은 노동부나 지자체 기술교육원 등에서 통역 지원과 외국인 교육을 맡는 프리랜서로 일한다. 그는 “한국은 10여년 전보다 차별도 많이 사라졌다. 다만 정책을 세울 때 외국인 의견을 반영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드라마를 접하고 한국행을 꿈꾸는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실제 한국 사회는 (드라마와) 엄연히 다르다. 한국에 온 초기엔 고생할 수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 2월 13일 호세인 모민이 경남 거제시의 한 사업체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사진 호세인 모민


70만원 벌던 외국인 엄마, 매출 7000만원 마트 냈다


외국인 근로자로 일하다 식자재 판매점을 연 태국인도 있다. 충북 진천군 덕산면의 동남아 식자재 판매점 ‘빅마트’ 대표 디암다우(55)가 주인공이다.

디암다우는 고용허가제가 처음 도입된 2004년 E-9 비자로 한국에 왔다. 충북 청주 북이면 철강제조 공장에서 일했다. 고용허가제 시행 초기로 외국인 근로자 처우가 썩 좋지 못한 시기였다. 한 차례 고용 연장을 통해 같은 공장에서 6년 일했지만, 월급은 70만~90만원 수준이었다. 디암다우는 “컨테이너에서 합숙 생활을 했다. 회사에서 이 ‘기숙사’ 비용으로 6만원을 떼갔다”고 했다.

지난달 21일 충북 진천군 덕산면 빅마트에서 태국인 여성 디암다우와 아들 펜펫이 배달을 앞둔 식자재를 보여주며 웃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디암다우는 고국에 있는 아들 학비가 부족하자 부업에 눈을 돌렸다. 그는 텃밭에서 길러 먹던 태국 채소를 주변 외국인에게 팔았다. 한국어를 잘 못 하는 동료에게 1000원~2000원을 받고 생필품을 사다 주며 고객을 확보했다.

그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2010년 마트를 차렸다. 이곳에서 각국 채소 등을 취급한다. 디암다우는 “잘 될 땐 한 달에 매출 7000만원도 올렸다. 경쟁업체가 늘어 지금 절반 수준으로 줄었지만 만족한다”고 했다. 빅마트는 2호점을 내고 트럭 두 대로 진천 바깥까지 배달하러 다닐 만큼 자리 잡았다. 그의 뒷바라지 덕에 아들 펜펫(29)은 2018년 F-5(유학생) 비자로 입국해 극동대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이들 모자의 꿈은 ‘내 집 마련’이다. 펜펫은 “박사 학위를 따 한국에 취직하고 싶다. 어머니와 함께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 잡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디암다우는 한국 기업에 일정 금액을 투자하는 조건으로 머무는 D-9 비자로 머물고 있다.


“고문관서 작업반장 된 나, 스트레스는 라면으로 풀죠”


경남 거제시에 있는 한화오션 조선소의 취부(용접할 수 있게 철판을 잇대놓는 작업)반장인 예가모프 아브로르(32·우즈베키스탄)는 베테랑 작업자로 알려져 있다. 한화오션 사내 협력사 소속인 그는 외국인 반원 11명을 이끈다. 아브로르는 우리말을 잘해 업무 내용을 명확히 이해하고, 외국인 근로자와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꼼꼼한 작업 지시를 내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국인 근로자 중요성이 커지자 한화오션은 아브로르를 외국인 근로자 관리인으로 키우고 있다.
한화 오션 거제 작업장에서 협력사 소속 취부반장인 예가모프 아브로르가 작업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12명의 외국인 반원을 이끄는 작업반장이자 회사가 외국인 근로자 관리인으로 양성하고 있는 직원이다. 사진 한화 오션
이런 아브로르에게도 일을 잘 못해 이른바 ‘고문관’ 취급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드라마를 보고 한국이란 나라에 반했다. 2012년 E-9 비자를 들고 무작정 한국에 왔다”고 했다. 고국 건설 현장에서 용접 관련 일을 해본 그는 전남의 한 조선소에 취부 보조인력으로 취업했다. 아브로르는 “한국말을 거의 몰라 망치를 가져오라는데 니퍼를 가져가 혼난 적도 있다”고 했다. 드라마 대장금을 재밌게 봤지만, 한국 음식은 입에 잘 맞지 않았다. 그는 “지금은 얼큰한 라면 한 그릇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보신엔 갈비탕만 한 게 없다"고 했다.

고문관 신세를 면하려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 그는 첫 직장이 폐업할 때 쯤 E-7(특정활동) 비자를 받아 거제로 올 수 있었다. 의사소통이 편해지자 업무 능력도 차츰 인정받으며 생활이 안정됐다. 아브로르는 2019년 우즈베키스탄인 아내와 결혼했다. 그는 “회사가 통·번역 직원을 따로 둘 만큼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신경 쓰고 있다. 회사 밖에서도 외국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며 “한국은 일을 하기도, 원하는 공부를 하기도 좋은 나라”라고 말했다.

언어ㆍ문화 차이로 힘들어하는 외국인을 돕는 외국인도 있다. 방글라데시 출신 이나니(52ㆍ방글라데시 이름 로넬 차크마 나니) 김포시외국인주민센터 상담팀장은 1994년 한국에 왔다. 경기 등지 공장을 떠도는 불법체류자였지만 2011년 한국 국적을 받아 지금은 외국인 상담과 지원 업무를 한다. 그는 “외국인도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실제로 상담ㆍ통역으로 다른 외국인을 돕거나, 사업을 통해 한국에 일자리를 만드는 외국인이 많다”고 했다. 그의 아들도 ROTC를 거쳐 육군 장교로 복무했다.

김해·진천=김민주·최종권 기자 kim.minju6@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