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녀'의 역사

이예지 2024. 5. 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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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도태남’, ‘찌질남’, ‘모솔남’의 발화를 들어왔다. 왜 여자들은 나를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이런 남자가 알고 보면 진국이라고, 가진 건 이 노래밖에 없어도 생일날 밥 한 끼 못 사줘도 이 마음은 진심이라고! 그런데 우리가 들어온 ‘도태녀’의 호소로는 무엇이 있는가? 지워진 ‘도태녀’와 ‘남미새’의 역사를 복원한다. 나는 그녀들의 더 많은 이야기가 듣고 싶다.

“나도 알아, 내가 별로라는 거.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다들 이렇게 나한테 안 했을 거면서, 내가 나니까 일부러 나만 무시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타오르는 안면홍조증에 부스스하게 뻗친 산발 머리, 노숙한 차림새의 양미숙은 서툴다. 사사건건 부적절한 언행을 해서 만인의 비호감을 사는 데다, 뭐 하나에 꽂히면 혼자 망상과 ‘삽질’을 해대기 일쑤다. 미숙한 그녀, 양미숙을 더 곤경에 빠뜨리는 건 그녀가 남자를 너무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2008년에 개봉한 영화 〈미쓰 홍당무〉의 이야기다. 비단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현실엔 많은 미숙이가 있다. 사회적 기준에서 예쁘지 않은 외모 혹은 날씬하지 않은 체형, 부족한 대인 관계 기술, 기타 등등 어떤 조건으로 말미암아 연애하기 쉽지 않은 여성들, 그럼에도 연애하고 싶은 여성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여성들이 보이지 않는다. 가상 인물이든 실존 인물이든 미디어에 등장하지 않는다. 여러 조건으로 말미암아 연애에 불리할 수 있는 여성들이 미디어에 등장하는 일은 반갑게도 늘었지만, 그녀들은 ‘연애 따윈 관심 없는’ 혹은 ‘커리어에 인생을 바친’ 속성을 부여받아 연애에 대한 인정 투쟁에서 자유로운 캐릭터로 묘사된다. 영화, 드라마뿐 아니다. 미래에 현대사회의 인간 군상을 알기 위해 사료로 삼아도 될 법한 예능, 〈나는 솔로〉의 ‘모솔’ 특집에서조차 ‘모솔’ 남성은 도대체 어디서 발굴해 데려온 건지 신통방통하기까지 한 다양한 모습과 〈나는 자연인이다〉에 버금가는 편안한 차림새를 자랑하는 데 반해, ‘모솔’ 여성은 대체로 그들보다 평균 열 살가량 어리거나, 신경 쓴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하고, 사회화가 된 말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 의도된 듯한 불균형에 복장이 터지는 건 시청자의 몫. 남자들은 연애가 안 돼서 ‘모솔’이지만 여자들은 눈이 높아서 ‘모솔’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통용될 정도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맞는 말인가? 맞는 말처럼 들린다면, 그것은 여자가 연애 시장에서 도태될 리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성과 만남을 가지지 못하는 ‘도태남’ 문제를 사회가 해결해줘야 할 의제처럼 취급하며 국제결혼이라는 이름의 매매혼을 권장하는 지금 이 시대, 여기 정말 ‘도태녀’는 없는가?

얼마 전, 유명 유튜브 채널인 〈주둥이방송〉에서 ‘도태남 갤러리’의 유저인 한 10대 남성(이하 ‘도태남’)이 “정부가 부를 재분배하듯 연애 시장에도 개입해 추첨제로 나 같은 못생긴 남성에게도 예쁜 여성과 연애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해 화제가 됐다. 타고난 외모 역시 물려 받은 부처럼 재화로 해석해 평등을 추구하자는 이 기이한 발상의 가장 큰 맹점은 ‘예쁜 여성’을 재화 취급한다는 것과 동시에 ‘못생긴 여성’의 존재를 삭제했다는 것이다. 진행자 주둥이가 “그럼 넌 못생긴 여자 만나고 싶어?”라고 묻자 도태남은 침묵한다. 그런 주장이라면 못생긴 여성 또한 잘생긴 남성과 연애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도태남의 세계에서 여자란 예쁜 재화이기에 못생긴 여자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10대 남성인 그의 말은 동시대의 루키즘이 얼마나 세계를 이원화하며 다양성을 배제하는지, 얼마나 자본과 깊게 결탁해 있는지 알 수 있는 지표다. 그의 말에 주둥이는 지적한다. 잘난 외모는 각자가 갈고닦아 노력으로 얻어낸 결과인데, 너는 그 노력을 무시하고 있다고. 도태남의 발언이 한심한 탓에 ‘사이다’로 간주되는 발언이지만, 사실 이 발언도 문제적이다. 그 말인즉 반대로 못생긴 사람은 노력을 하지 않은 결과라는 편리한 논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가난한 건 빈자의 탓이고 못난 건 못난 자의 탓이라는 전형적인 ‘노오력’의 논리. 도태남이 받아야 하는 제대로 된 지적은 “여자에게도 자기 결정권과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 또한 외모는 재화가 아니며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이를 비롯해 수많은 ‘도태남’, ‘찌질남’, ‘모솔남’의 발화를 들어왔다. 영화와 드라마로도, 노래로도, 사회적인 호소로도. 왜 여자들은 나를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혹은 이런 남자가 알고 보면 진국이라고, 가진 건 이 노래밖에 없어도 생일날 밥 한 끼 못 사줘도 너에 대한 이 마음은 진심이라고! 그런데 우리가 들어온 ‘도태녀’의 호소로는 무엇이 있는가? 돌이켜보면 과거에는 있었다. 2000년대를 돌아보자.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영화 〈미쓰 홍당무〉 등 설정상 당시로선 나이가 많거나 과체중이거나 하자가 있거나 ‘찌질’한 여성들이 좌충우돌 연애하는 이야기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브리짓도 삼순도 미숙도 못났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 많던 ‘찌질녀’들은 어디로 갔는가? 연애를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도태남’이 존재한다면, 마찬가지로 ‘도태녀’ 역시 존재한다. 남성에게 무관심하고 비혼, 비연애를 지향하는 여성들이 있다면, 남성을 욕망하는 ‘남미새’ 여성들 또한 존재한다. 그들의 존재를 모두 지우고 나면, 어떤 무결하고 우수한 여자들만이 남는가? 그녀들만이 여성으로 승인받을 수 있고, 그녀들만이 여성의 편인가? 못난 남성이 존재한다면 못난 여성도 존재한다. 이 당연한 사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욕망에 대해 승인하지 않는다면 우리 세계는 점점 더 쪼그라들기만 할 것이다.

남성들이 등급을 매기듯 여성 연예인의 신체를 평가하며 욕망할 때, 여성들은 남성 연예인의 999번째 아내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의 주제를 안다는 듯이 겸손하게 자신의 자리를 축소하는 여성들, 연하의 남성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할미’라고 칭하는 여성들, 가능한 한 ‘남미새’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여성들 또한 자주 본다. 그 엄격한 검열은 당신 자신을 낮출 뿐 아니라 그 기준에서 탈락한 여성들을 우리 밖으로 내쫓는다. 당신은 당신 그 자체인 채로 욕망할 자격이 있다. 다른 여성들 역시 그렇다. 나는 더 많은 ‘도태녀’들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

Writer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윤리의 아름다움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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