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조차 '모르는 이야기', 75분 동안 펼쳐진 판타스틱 체험

김상목 2024. 4. 3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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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모르는 이야기>

[김상목 기자]

 영화 <모르는 이야기> 포스터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1895년 공식적인 최초의 영화(뤼미에르 형제의 '단편영화 모음집')가 탄생한 이후, 영화는 120여 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형태에 고착되지 않고 가파른 변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최초의 영화는 단순히 실제를 기록하는 짧은 클립에 불과했지만 10년도 되지 않아 스토리텔링을 갖추게 되고, 무성영화는 곧이어 '토키'(유성영화)로, 흑백 화면은 컬러 화면으로 교체된다.

영상을 바탕으로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시각효과로 다수의 관객을 동시에 공략하는 영화 매체의 특성 덕분에 영화는 '대중예술'인 동시에 산업에 속하는 문화 장르가 되었다. 상업성이 멍에나 굴레 같지만, 그 덕분에 단시간에 전 세계로 뻗어 나가며 다채로운 단면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극지방부터 열대지역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디에서나 영화를 만들고 즐긴다. 물론 대부분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할애되긴 해도, 세계에는 측량하기 불가능할 만큼 다양한 형태와 방법론으로 차별화된 영화가 넘쳐난다.

그리고 영화의 위기를 논하는 와중에도 후발 주자는 여전히 급격한 변화에 놓여있다. 21세기 영화 실험의 핵심이라면 역시 텍스트 중심의 서사 구조에서 영상 문법으로만 구현 가능한 형태적 도전일 테다. 대중적으로는 낯설기 그지없지만, 영화제 같은 쇼케이스 공간들에서 목격되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영화들은 화산이 끊임없이 분출하는 것처럼 용트림을 치고 있다. 영화는 여전히 완성된 형태가 아닐뿐더러, 어쩌면 세상이 끝나거나 장르 자체가 소멸할 때까지 계속 진화와 생성을 거듭할 것만 같다.

종종 국제영화제들이 자신 넘치게 소개하는 21세기 새로운 영화 실험의 최전선을 목격하며 충격과 흥분에 빠지곤 한다. 반면에 국내 신진 감독들이 선보이는 관성화된 형태 영화들에 실망하는 반대급부도 자주 겪는다. 실험보다는 관습에 얽매이거나, 세계관과 시야의 한계를 노출하는 작업을 경험할 때마다, 이러다 넷플릭스에 팔기 위한 양산형 작업만 남는 것은 아닌가 염려도 된다.

하지만 그렇게 근심과 우려가 굳어지려 할 때마다 뭐라 형언하기 힘든 독특한 결의 영화들이 목격되곤 한다. 물론 제대로 설명하기도 쉽지 않고, 실험이 완성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남들이 하지 않은 것, 자신이 해보고 싶은 것을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도전은 늘 신선한 자극으로 작동한다. 촬영 감독으로 오랜 기간 활동해 온 양근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모르는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우리가 근래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풍경과 모호한 전개로 가득 차 있다.

현실의 답답함을 꿈의 세계로 돌파하려는 모험담

두 명의 젊은 남자와 여자가 연이어 등장한다. '기은'(정하담 분)과 '기언'(김대건 분)은 현실에서 무기력하다. 그들의 일상은 미래를 향한 꿈과 전망 따위는 찾을 수 없는, 그저 시간의 반복으로 점철되어 있다. 물론 현재 한국 사회에서 그들 또래의 청년 중 적지 않은 숫자가 비슷한 시간을 보내긴 하지만, 두 사람의 경우는 확연히 궤가 다르다. 이들은 척추질환을 앓고 있기에 병원과 집을 오가는 게 사실상 생활의 전부다. 간신히 좁은 실내를 힘겹게 이동하거나 병원 행차 정도만 가능할 뿐, 이들에게 취업이나 사회활동은 요원해 보인다.

두 사람은 하루 대부분을 누워서 지낸다. 척추의 통증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병원에선 이들에게 진통제 처방을 반복한다. 처방 약의 부작용 때문에 이들은 몽롱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무기력한 삶에서 도무지 벗어날 방도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둘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의 공간이 있다. 바로 '꿈'이라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어차피 다르게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진통제에 취하듯 꿈의 세계로 진입한 그들은 현실에서 그들이 희구하던 것들을 꿈에서 풀어낸다. 그 안에서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고 활짝 웃거나 춤을 춘다. 꿈은 수면 중에도 뇌 일부가 활동을 멈추지 않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현실의 반영이 무의식 세계에서 일어나는 셈이다. 기은과 기언의 답답한 삶을 확인한 관객이라면 그들이 일상에서 겪는 우울한 현실과 극적 대비를 선보이는 꿈 속 총천연색의 역동적인 풍경을 흐뭇하게, 하지만 서글프게 바라볼 법하다.

하지만 그들의 무의식 세계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다. '기점'이란 이름으로 꿈속에서 화가가 된 기언은 작업에 매진하고 전시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한다. 전시회에 가득 진열된 기점의 작업은 기이하게도 '노란색'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풀어내는 중에 화가를 취재하러 유튜버가 현장을 방문한다. 취재하러 온 유튜버 '기지'는 기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기지는 기점이 금기시하는 노란색 니트를 차려입은 데다 기점에게 노란색 꽃을 건네준다. 기지의 모자 위에 달린 장식 또한 노란색이다. 풀이하기 쉽지 않은 상징 표현이 거듭 이어지지만, 기지의 등장 이후 화면에 퍼지듯 확장되는 노란색은 기점이 잃어버린 색깔임은 분명해 보인다. 현실의 기언이 꿈에서 활동하는 화가 기점에게 기은의 형체를 한 유튜버 기지가 노란색을 되돌려주는 행위다.

이번에는 기언이 치과병원에 환자 '기수'로 등장한다. 기수의 구강 안에 부자연스러운 무엇인가가 돋아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치과의 모든 것이 형상화된 것 같은 병원 진료실 내에서 의사가 끝내 해결하지 못한 이물감을 제거하는 존재도 또 다른 기은이다. 다음 장면에서 기은과 기언은 데이트를 즐기며 연인으로 발전한다. 둘은 꿈속에서 결혼하고 부부 생활을 이어 간다. 이제 기언은 아빠 '기태'로, 기은은 엄마 '기윤'으로 활동하는 중이다. 둘은 토끼 같은 아들과 딸을 낳고 교외로 소풍을 가 캠핑 요리도 즐기고 낚시도 해본다. 보통의 가족들처럼 다투기도 하고 실쭉하기도 한다. 남들에겐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평범한' 삶이 꿈에서야 완성된 것이다.

무의식의 왕국에서 그들이 쟁취해 낼 수 있는 것들
 
 영화 <모르는 이야기>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그렇게 영화는 '멀티 유니버스' 속 기은과 기언의 꿈을 통해 그들이 현실에서 처한 고충을 해소하는 풍경을 구현한다. 하지만 마치 타인의 뇌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욕망 충족의 이미지로만 그친다면 역시 단조롭고 익숙한 해법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감독은 대리만족에 그칠 생각이 없다. 장면이 쌓여가면서 처음에는 각자의 꿈 속 영역에서 활동하던 기은과 기언은 점점 한 공간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마치 한 인물의 다른 형상을 한 것처럼 구분선이 흐려지는 느낌을 축적해 나간다. 교차 편집과 컷의 도약 및 병렬을 통해 일정한 순간이 되면 관객은 이 둘이 같은 사람인 것처럼 여기게 될 테다.

여기에 그저 배경 속 존재를 초월해 독자적인 분량을 확보한 타자들이 중반 이후 등장한다. 트럭을 운전하는 배달기사 남자와 학생 대신 책걸상마다 화분이 놓인 초현실적 교실 공간에 홀로 서 있는 여자 교사가 그들이다. 배달기사는 화물을 실은 트럭으로 화창한 날씨의 야외를 횡단하면서 마치 인터뷰에 응하듯 자신의 인생관을 피력한다. 현실의 비좁은 활동영역에 갇힌 기은이나 기언과 달리 그는 자유롭게 세계를 활보한다. 그의 일상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과 직장을 왕래하는 게 일상의 대부분인 평범한 관객 다수의 삶과도 확연히 차별화된다. 그는 이동의 한계를 거의 벗어난 초월자와도 같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자유롭게 이동하며 생계를 위한 일을 하지만 그에 종속되지만은 않는 삶, 노동 과정에서 소소한 일상을 누리는 배달기사의 수다는 기은과 기언이 얻지 못한 긍정적인 삶의 태도 자체일 테다.

배달기사가 굳이 기은과 기언의 시간을 잘라먹으며 굳이 등장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저 기은과 기언이 희구하지만 끝내 도달하지 못할 평범한 일상의 소망을 누리는 얄미운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극 중에서 점점 합체로 나아가는 둘의 무의식이 치열하게 꿈 가운데 형성해가는 의지의 표상으로 그가 탄생한 것은 아닐까? 마치 둘이 부부가 되어 낳은 아이가 성장한 것처럼 완성된 존재의 삶 말이다.

여자 교사는 학생들 대신 걸상에 고이 놓인 식물 화분을 자상하게 응시하며 물의 순환이나 화산 활동에 대해 수업하듯 해설을 이어나간다. 초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시공간이 현실이 아니라 기은과 기언의 무의식 세계 일부라는 것을 환기한다면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순환되는 자연과 생명은 주인공의 처지와 교차하며 무어라 딱 집어 풀이하긴 어려운 감흥을 제공한다.

현실에서 주인공은 그들의 삶을 그나마 지탱하는 존재라 할 진통제 처방을 중단하기로 결의하고 의사에게 결단을 밝히기에 이른다. 물론 그들의 연약한 육신에 이는 가공할 고통으로 돌아올 테지만, 약에 취해 몽롱하게 버티는 것에 만족할 수 없기에 고통스러운 도전을 감행하려는 것이다. 물론 해피엔딩으로 흐를 리 없다. 무기력하게 바닥에 쓰러져 통증에 신음하는 장면은 장애인들의 고충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그러한 필사의 도전은 다시 무의식의 세계로 돌아온 기은의 장면을 통해 풀이되기 시작한다. 산탄총을 멘 사냥꾼의 모습을 한 기은은 이번에는 굳이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고독한 시험에 돌입한다. 기은(+기언)은 시험을 통과한 뒤 미소를 짓는다. 그 통과가 현실에서 그들의 삶에 어떻게 반영될 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에 답답하게 반복되던 과거 일상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수여되었길 모두가 바랄 테다.

꿈의 세계가 현실의 반영을 초월해 의지의 실천으로 나아가다
 
 영화 <모르는 이야기>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장자의 '호접지몽'에서 화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날면서 원래의 자신이 아닌 나비의 시야로 세계를 바라보고 현실의 장벽을 초극한다. 여기에서 꿈의 영역은 오늘날 우리가 어렴풋하게 접하기 시작한 '가상현실'의 영역과 중첩된다. 과학기술이 발전해 가상/증강현실 실험을 거듭하기 전에는 꿈이 그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현실과 교차하는 꿈의 기록은 고대로부터 숱하게 발견된다.

영화 속에서 기은과 기언은 꿈을 통해 끔찍한 일상의 제약을 뛰어넘거나 그들이 무의식 중에 찾던 삶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저 대리만족이 본 작품이 추구하는 결론은 아니다. 모호한 표상과 열린 결말로 흐르지만, 기은이 분한 화가 '기점'의 예술창작처럼 영화 전체가 거대한 캔버스처럼 활용되면서 장애인의 소망 구현에만 국한되지 않고 삶에 대한 태도와 변화의 열망, 무의식을 빌려 영화와 관객의 상관관계, 일상의 한계를 예술로 풀어내려는 야심 가득한 도전까지 진도를 나가려는 작업이다.

그런 실험은 실사 화면에 뜬금없이 구현되는 키치나 팝아트, 초현실적인 이미지들로 구현된다. 컴퓨터 그래픽이나 애니메이션 효과가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것은 물론 컬러와 단색 화면의 교차가 수시로 벌어지며 고정된 관람태도를 방해하며 생각을 멈추지 않기를 관객에게 주문한다. 등장인물의 처지와 상황을 억지로 설명하기보다는 화면비를 와이드 비율로 휙휙 바꿔가며 체감하게 만든다. 때로는 상상 속 들판과 대지에 점 마냥 보이던 인물이 다음 순간엔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화면 가득 독차지한다. 그렇게 고정된 스타일이 아니라 의도적인 혼란과 이물감으로 가득 찬 러닝타임 때문에 관객은 정신을 집중해 감독의 악동기질을 추적해야 한다.

물론 필자 역시 감독의 의도나 배경에 깔린 함의를 과연 제대로 독해한 것인지 확신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어쩌면 추상표현주의 미술작품처럼 애초에 감독이 고정시켜둔 서사와 결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목처럼 심지어 감독조차 '모르는 이야기'이지만 75분 동안 펼쳐지는 백일몽 왕국의 판타스틱 체험인 셈이다. 하지만 그저 무의식의 세계로 도피해 그곳에서 자신만의 요새에 틀어박히는 수많은 유사 장르 작업과 달리 '형언'하기는 힘들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이는 행보와 그를 떠받치는 코드들은 현실에서 '살아라!'는 외침과 의지의 발현이란 점은 명백해 보인다.

<작품정보>

모르는 이야기 Unknown Narrative
2023│한국│멀티판타지 시네마
2024.04.24. 개봉│75분│12세 관람가
감독/각본 양근영
주연 정하담(기은 역), 김대건(기언 역)
출연 이주원, 정영주, 이현진, 김난희 외
제공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2023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부문 장편 특별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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