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출장 후 영어 못해 극단선택 노동자…법원, 산업재해 인정

김남하 2024. 4. 3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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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2017년 출장 지시 받고 미국행…영어 미숙해 어려움 겪어
2018년 극단선택 시도 후 사망…유족, 근로복지공단 유족급여 청구
법원 "자해행위 인한 산업재해 인정 범위…종전보다 확장됐다고 봐야"
ⓒgettyimagesBank

다니던 회사의 미국 출장에서 영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에 대해 2심 법원이 1심과 달리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자살은 노동자 개인의 선택이므로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할 정도였다는 점이 높은 수준으로 입증돼야만 재해로 인정할 수 있다는 1심 판결을 뒤집었다.

30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최근 서울고법 행정9-1부(재판장 김무신)는 A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와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소송 2심에서 A씨 유족 측 승소 판결을 했다.

A씨는 회사에 입사한 지 1년 남짓 지났을 무렵인 2017년 11월 회사로부터 갑작스럽게 임원·상사와 함께 미국 출장을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영어실력이 미숙했던 A씨는 입국 심사만 1시간 이상 받아 통과해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다. 임원은 귀국 이후 A씨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출장 이후 A씨는 동료들에게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다. A씨는 2018년 1월 극단선택을 시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유족은 업무상 재해라며 공단에 유족급여 등을 청구했으나 공단이 거부했다. 이에 A씨 유족은 소송을 냈다.

문제는 노동자 자살의 업무상 재해 인정이 까다롭다는 점이었다. 대법원이 명시적인 판단기준을 제시하지 않아 하급심에서 재판부에 따라 인정 여부가 달라진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 사건에서도 1심 재판부는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업무와 재해 발생의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 하는 것이 아니고 ‘상당 인과관계’가 인정되면 된다는 입장이다. 다만 1심 재판부는 “자살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행위”라며 “자살이 ‘사회평균인’의 입장에서 볼 때 도저히 감수하거나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업무상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우울증에 기인한 것이 아닌 한 상당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또다른 대법원 판례를 끌어왔다.

ⓒgettyimagesBank

이에 따라 1심 재판부는 A씨가 상당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으나 이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을 회피할 수 없을 정도로 정상적인 인식능력 등이 없거나 현저히 저하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우울증을 증명하는 의학자료가 없다는 점도 업무상 재해를 부인하는 근거였다. 1심 재판부는 “끝내 자살을 했다는 결과만 들어서는 그 무렵 A씨가 자살 외에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판단 능력이나 충동조절 능력이 저하됐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2심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최근 대법원 판례의 경향을 잘 살펴보면 노동자의 자살에 대한 업무상 재해 인정 범위가 넓어졌고, ‘사회평균인’을 기준으로 업무상 스트레스의 정도나 이로 인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기준은 사라졌다고 봤다.

2심 재판부는 “판례 추이 등을 종합하면 비록 명시적인 판례 변경은 없었더라도 자해행위로 인한 업무상 재해의 인정 범위가 종전보다 확장된 것 아닌가 짐작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2007년 산재보험법 개정으로 업무상 사고와 질병의 범위가 폭넓게 명시된 점, 2020년 산재보험법 시행령 개정으로 자해행위에 따른 업무상 인정 기준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에서 ‘상당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로 바뀐 점도 짚었다.

2심 재판부는 “자살이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이라는 전통적 관점 대신, 자살에 이르게 만든 정신질환 등에 주목해 신체적 질병의 범주에 포섭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관점의 전환이 법령 개정이나 판례 경향의 변화에 반영됐다”고 했다.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도 판결에 반영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에 따라 2심 재판부는 A씨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회사 임원이 귀국 후 팀장회의에서 A씨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고, A씨가 동료들에게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다”, “이 나이 먹도록 이 정도 밖에 안 되네” 등 자책하는 발언을 반복했다는 점을 고려했다. “미국 출장에서 내 포장지가 벗겨진 기분. 알맹이의 내용이 거짓, 과장이 심했던” 등의 메모 내용도 감안했다. 재판부는 “A씨는 미국 출장이 결정된 경위나 그곳에서 있었던 입국심사 지연에 대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데다가 상사가 이를 지적하자 심각한 정도의 우울감 내지 자존감 저하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1심 재판부는 A씨가 생전에 미국 출장을 성장의 기회로 여기는 등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다짐하는 메모를 적은 적이 있다며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고 했지만, 2심 재판부는 반대로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이런 메모는) 결국 자살에 이른 사람들이 우울증 등의 정신적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그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으로 보는 게 옳다”며 “이것이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을 겪지 않았다는 부정적 징표라고 섣불리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2심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판결문 말미에 “젊은 나이에 너무도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고 적었다. 해당 사건은 이후 근로복지공단이 상고해 대법원이 최종 결론을 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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