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짧은 머리, 짧은 생각

2024. 4. 30.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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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옥 문예평론가

어릴 때 내 헤어 스타일 담당은 위의 남자 형제들이었다. 머리가 길다 싶으면 마당에서 보자기를 목에 둘러 큰 무쇠 가위로 썩둑 썩둑 눈대중으로 잘랐다. 눈썹을 기준으로 자르면 좋으련만 머리카락은 점점 이마 위로 올라갔다. 첫째가 자르다 지겨워지면 둘째가 이어받고 마지막엔 마당 구석에서 코를 파던 셋째가 무쇠 가위를 인계받았다. 나를 마당에 앉혀놓고 형제들이 놀러 가 버리면 나는 거울을 보고 통곡했다. 내 짧은 산발은 딱 쥐 파먹은 몰골이었다. 모두 최선을 다했으나 불행히도 미적 감각은 없었다.

「 페미니즘의 기본 바탕은 공정
짧은 머리 혐오대상일 수 없어
최고의 아름다움은 생의 열정

김지윤 기자

덕분에 나는 동네에서 김씨 집 막내아들로 불렸다. 오빠들의 헌 옷을 물려 입고 딱지를 치니 나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 건 내가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었다. 어릴 적 여자아이 머리카락의 길고 짧음은 빈부의 기준이었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은 윤기 나는 긴 머리를 땋거나 늘어트려 꽃핀으로 장식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머리를 다시 땋아주는 친구 엄마를 보면서 예쁜 것들은 시간을 오래 들인다고 생각했다.

짧은 머리는 빨리 말라서 실용적이었다. 머리를 몇 번 흔들면 헤어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거울을 안 보면 열등감도 없었으니, 가난은 일체유심조였다. 시골 동네도 빈부격차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가난해서 비교 대상은 많지 않았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가풍답게 나는 성장해서도 손질 편한 머리를 고수했다. 나는 두상이 예쁘면 삭발도 괜찮다는 부류라 어떤 스타일이든 ‘어울리면 최고’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20대 남성이 짧은 머리의 편의점 아르바이트 여성을 무차별 폭행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가해 남성은 여성을 페미니스트로 생각해서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아직도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구분한다는 것이 놀라웠고 헤어 스타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든 사적 자기결정권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격하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여성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회에서 자기 능력을 발휘할 일자리나 기회가 흔치 않았다.

세상이 급격하게 변해가면서 여성들은 현모양처의 역할 위에 사회적 경제활동까지 부가되었다. 타고난 능력 계발을 떠나 무섭게 치고 올라가는 부동산 가격과 교육비를 감당하려면 가장의 외벌이만으로 힘들었다. 우리 때만 해도 가족의 저녁 준비를 위해 칼퇴근을 하는 여직원의 등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고 출산 휴가를 내려면 사표 압박을 받기도 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탈락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온갖 집안 행사에 노동 인력으로 불려 다니는 것도 여전했다. 남편의 허락 없이 긴 머리를 쇼트 커트로 잘랐다고 야단맞았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낀 세대’인 우리와 달리 지금의 젊은 여성들은 양성평등 교육을 받고 할머니와 엄마의 인생을 간접 경험한 세대다. 직장에서 날밤을 새울 정도로 업무에 적극적이어서 남자 동료를 추월하는 일도 흔하다. 능력을 숭상하는 경쟁 사회에서 성별은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여성의 권리가 빛의 속도로 발전한 것 같지도 않다. 성별 갈등으로 폭력을 행사한 청년에겐 사회의 무한 경쟁 속에 여성이 대거 진출하는 상황에서 생겨난 박탈감도 있었을 것이다.

젊은 남성들은 자신들이 저지르지 않은 가부장제의 폭력을 대신 속죄(?)해야 하는 부당함과, 여성과도 경쟁해야 하는 자기들이 가장 불행한 세대라고 항변한다. 여자들이 할머니나 엄마처럼 희생하지도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한다는 말을 들으면 가부장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아하다. 남성지배의 구조 체제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도 남성이다. 흙수저 출신이거나 몸이 약하거나 여러 환경적 요인으로 출발부터 다르면 강하고 힘센 자들의 리그에 진입할 수 없다.

케이트 밀렛의 유명한 가부장제 원리 중 하나가 “나이가 더 많은 남성이 적은 남성을 지배한다”이다. 페미니즘의 바탕이 공정이라는 것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짧은 머리의 나이 든 여성 작가에게서 늙으니까 참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성적 대상에서 해방되었다는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다는 뜻이기도 했다. 긴 머리가 아름다움의 고정관념이 되어서는 안 되듯 짧은 머리가 여성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누가 무엇을 주장하기 위해 삭발하든 짧게 자르든 있는 그대로 보고 왜 그래야만 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우리 동네 편의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여성도 짧은 머리다. 나처럼 머리를 감고 툴툴 털어 버릴 것 같다. 내게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남녀 불문, 자신에게 집중하는 유형이다. 주변을 돌아볼 틈도 없이 눈을 반짝거리며 자기 일에 매진하는 사람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생의 열정을 뛰어넘을 수 있는 아름다움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김미옥 문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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