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우주의 황제가 인간의 집에 거주하다

신상목 2024. 4. 29. 05:5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더미션입니다.
4월을 보내고 푸르른 5월을 맞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을 맞아 여러모로 분주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님과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결코 분주함이나 피곤함이 아닐 것입니다. 더미션 독자 여러분 가정에 모두 기쁨과 풍성함이 넘치시기를 바라봅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속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특히 성공회 목사로서 아이들에게 생생한 말씀을 전하기 위해 다양한 제품을 발명한 굿윈 목사님의 이야기가 눈길을 끕니다. 그는 롤 필름을 개발한 사람으로 더 유명합니다. 얇지만 견고하고 유제 코팅이 된 투명하고 유연한 플라스틱 재질의 롤필름이었습니다. 마침 당시 출시된 코닥 카메라는 굿윈 목사님의 필름과 잘 맞아 떨어졌지요.

창의성이 주목받는 시대인데요. 굿윈 목사님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마침 오늘 더미션 톱기사가 보여주는 초등학생 2학년이 부른 행복 랩과 아빠 이야기도 창의적인 생각이 가져온 놀라운 결과물입니다. 교회 사역과 일터, 가정에서도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재미와 기쁨, 그리고 복음의 확장이 있기를 바라봅니다.

1429년 4월 29일 어린 시절부터 신비로운 환상과 환청을 경험한 잔 다르크가 포위된 프랑스 도시 오를레앙에 들어가 영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다음 날 영국군은 후퇴했지만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잔 다르크는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출격하던 영국군은 잔 다르크를 붙잡아 이단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1607년 4월 29일 영국 정착민들이 버지니아주 케이프 헨리에 미국 식민지 최초의 성공회 교회를 설립합니다.

304년 4월 30일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통치 기간 중 마지막이자 가장 가혹한 반기독교 칙령이 발표됩니다. 기독교인들은 공직에서 해임하고 기독교 건물과 서적을 파괴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성경과 서적을 포기하지 않자 고문과 처형이 줄을 이었습니다. 대학살은 너무 끔찍해 콜로세움의 사자들도 지쳤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다시 황궁에서는 두 차례 화재가 발생했는데 갈레리우스는 그것이 교회 파괴와 서적 소각에 대한 기독교인의 복수라고 주장했습니다. 제국 전역에서 교회와 경전들이 불탔으며 관리들은 제국에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처형했습니다. 칙령을 내린 갈레리우스는 311년 4월 30일 마침내 관용의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가 ‘벌레에 먹히는 병’으로 죽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1562년 4월 30일 150명의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 이민자를 태운 두 척의 배가 미국 플로리다 북동부 해안에 도착합니다. 정착민들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패리스 섬에 식민지를 세웠지만 2년 후 보급품 부족으로 포기했습니다.

롤 필름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1822년 4월 30일 미국 뉴저지 뉴어크에 있는 성공회 기도의 집 총장 한니발 굿윈이 태어납니다. 그의 주된 열정은 교회의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었지만, 평생 24개의 발명품을 고안하고 15개의 특허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를 주로 사진용 롤 필름의 아버지로 기억합니다.

굿윈은 1844년 예일대 법대를 거쳐 웨슬리안대학에서 수업을 듣기 시작했고 1848년 유니온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굿윈은 성공회 설교자가 되기 위해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뉴저지 보든타운(그리스도교회·1852~1854), 뉴어크(세인트폴교회·1854~1858), 트렌튼(트리니티교회·1859)에서 직책을 맡은 후 기관지 질환으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가서 나파(그리스도교회·1859~1862), 메리스빌(세인트존스, 1859~1862), 샌프란시스코(그레이스교회·1862~1867)에서 봉사했습니다.

1867년 뉴저지로 돌아온 굿윈은 뉴어크에 있는 ‘기도의 집’ 교회 5대 담임으로 부임해 향후 20년간 봉직합니다. 굿윈은 성경의 가르침에 활용할 이미지를 놓을 수 있는 깨지지 않고 투명한 물질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사제 다락방에 화학 실험실을 설치하고 더 많은 햇빛을 공급하기 위해 지붕에 15㎝ 크기의 구멍을 뚫었습니다. 굿윈이 교회에서 은퇴하던 해인 1887년 5월 2일, 그는 ‘롤러 카메라와 관련된 사진 펠리클과 이를 생산하는 공정’에 대한 특허를 출원, 1898년 9월 특허가 부여됐습니다. 1900년 굿윈은 굿윈 필름 및 카메라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4세기 기독교의 수호자, 아타나시우스 별세
373년 5월 2일 ‘정교회의 아버지’로 불리는 교부 아타나시우스가 별세합니다. 그는 325년 니케아공의회에 참석했고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된 후 아리우스주의와 싸워 승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 정경의 목록을 최초로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4세기 교회를 이끈 위대한 교부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집트 하층 계급 출신이었던 그는 청년 시절 사막 수도사들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저서 ‘성 안토니의 생애’에서 자신이 직접 안토니를 방문해 그의 손발을 씻어준 일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안토니는 그에게 자신의 전 재산이었던 겉옷 한 벌을 전합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수도사들로부터 엄격한 규율을 배우고 지켰습니다. 이러한 엄격성 때문에 친구들의 존경을 받았고 적들에게도 경탄을 자아냈습니다. 아리우스파에 대항한 인물 중 아타나시우스가 가장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 논쟁 발생 전 ‘이방인들에 대항하여’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를 저술했는데 이 저작들은 인간 역사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깊은 확신을 보여줍니다. 인류 가운데 인간으로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 이것이 아타나시우스가 이해한 기독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을 황제가 도시를 방문하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황제가 도시 방문을 결정하고 그 도시의 한 집에 거합니다. 그 결과 그 집뿐 아니라 도시 전체가 특별한 명예와 보호를 받게 되었기에 범죄 행위는 근접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황제가 인간의 도시를 방문해 그 중 한 집에 사셨으며 우리는 이 때문에 사탄의 공격과 침입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러한 하나님의 방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면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온 존재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 이보다 낮은 피조물이라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관념은 아타나시우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임명됐습니다.

하지만 아리우스파는 아타나시우스를 몰락시키려 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가 마술에 탐닉하고 있으며 이집트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독재자라는 소문을 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를 위험한 광신자로 생각하고 결국 서방의 트리어로 유배시켰습니다. 이후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귀환했지만 그의 대적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타나시우스는 몰래 배를 타고 로마로 갑니다. 로마 종교회의는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정당한 감독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는 그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아리우스파가 그리스화 된 상류층을 대변했던 데 반해 아타나시우스는 시민들의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10년은 대적들의 방해 없이 정통 신학을 수호하면서 아리우스주의를 반박하는 논문을 집필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주인공, 존 녹스
1559년 5월 2일 대륙에서 몇 년간 공부하고 글을 쓰던 존 녹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그곳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세인트앤드루스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25세에 신부로 서품됐습니다. 그는 신앙을 위해 순교했던 유명한 개신교 설교가 조지 위샤트의 추종자가 됐습니다. 일단의 프로테스탄트 반란자들이 세인트앤드루 성을 점거하고 대주교를 살해했습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녹스는 세인트앤드루 프로테스탄트 집단의 목회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의해 녹스를 비롯한 반란 주모자들은 갤리선 노예가 되어 19개월간 중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잉글랜드의 중재로 풀려났습니다.

이후 메리여왕이 통치하면서 잉글랜드 내 개신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고 녹스는 스위스로 건너가 제네바에서는 칼뱅,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의 후계자였던 불링거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1559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녹스에게 고국으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고 칼뱅도 거들었습니다. 그렇게 귀국한 그는 세인트가일즈교회에서 격렬한 설교와 신앙의 힘으로 개신교도를 고무했습니다. 또 메리 여왕을 ‘새 이세벨’로 부르며 불같은 설교를 퍼부었습니다.

그는 마리아나 성자들의 화상, 조각 등을 배척했습니다. 추종자들 가운데 일부는 수도원이나 사원도 파괴했습니다. 1560년 에든버러 조약에 따라 프랑스의 영향을 제거했고 개혁은 급진전했습니다. 의회는 가톨릭을 불법화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1560년에는 스코츠신앙고백을 썼는데 이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 나올 때까지 스코틀랜드의 공식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개혁은 교육에 강조를 두었습니다. 모든 교구에서 젊은이들에게 경건훈련을 시켰고 주요 도시에는 대학이 설립됐습니다. 녹스는 어느 지역에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 복음을 전파하려고 애썼습니다.

녹스의 종교개혁은 칼뱅과 비슷했지만 교회와 국가 간 관계에서는 칼뱅보다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는 군주의 종교가 곧 국민의 종교였기에 녹스는 개신교도를 박해하는 가톨릭 여왕과 싸워야 했습니다. 녹스는 교회가 정부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분명한 사회에 대한 비전도 있었습니다. 모든 신자는 가난한 사람을 돌봐야 한다고 했고 그 일을 위해 교회 안에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모든 어린이는 교리를 배울 수 있도록 학교를 열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키르케고르 출생
1813년 5월 5일 기독교 실존주의자 쇠렌 키르케고르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납니다. 이 덴마크 철학자는 어떤 철학적 체계로도 인간의 조건을 설명할 수 없으며,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현실의 경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엄하게 비판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신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의 저작을 통해 추구했습니다.

1837년경 그가 스스로 ‘대지진’이라고 부른 심각한 체험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소년시절 유틀란트의 광야에서 너무나 허기지고 추운 나머지 하나님을 저주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바로 자기자신이 결혼 전에 아이를 밴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 등을 안 사실로 죄의식이 심화하였고, 인생을 보는 눈과 기독교를 보는 눈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후 저술활동을 하다가 시골의 목사가 되어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어했으나 풍자신문 에 그의 작품과 인물에 대해 오해에 찬 비평이 실려, 이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논쟁하는 사이에, 또 다시 기독교인으로서 새로운 정신활동과 저술을 향한 의욕이 용솟음쳤습니다. 그는 신문의 무책임한 비평과 세간의 비웃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한편에서는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엄하게 비판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로서의 신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1849), ‘그리스도교의 수련’(1850) 가운데에서 추구했습니다.

헤겔의 범논리주의를 배제해 불안과 절망 속에 개인의 주체적 진리를 탐구한 그의 사상은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09년부터 독일에서 C.슈램프가 키르케고르의 번역집을 내 당시 신진이었던 P.바르트, J.H.하이데거, K.야스퍼스 등의 변증법 신학자와 실존주의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로부터 그의 명성은 현대 기독교 사상과 실존사상의 선구자로서 알려졌습니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교도’ 중 한 명입니다.

1816년 5월 5일 전 세계에 성경을 배포하기 위해 미국성서공회(ABS)가 뉴욕에서 조직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전 세계 수천 개 언어로 수억 권의 성경을 배포했습니다.

1925년 5월 5일 미국 테네시 주 데이턴, 교사 존 스코프스가 교실에서 진화론을 가르친 혐의로 체포됩니다. 그는 법정에서 법의 심판을 받기 위해 그러한 교육을 금지하는 최근 법령 위반을 인정하기로 자원했습니다. 최초의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는 이 재판의 결과로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대중의 조롱을 받게 되었고,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더욱 고립된 하위 문화로 밀려났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