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산 진달래꽃 보러 갔다 그만, 긴급 출동 하고 말았다
[배은설 기자]
'여기가 맞는 거여? 아닌 거여?'
뭔가 마음이 불안해지는데 침착함이 필요할 때면 내 맘대로 충청도 사투리를 소환하는 경상도 여자가, 거제의 작은 언덕을 헤매고 있었다.
경남 거제 지세포진성 주변은 매년 5, 6월이면 금계국, 수국, 라벤더 등이 피는 꽃동산이 된다고 했다. 내가 간 날은 4월 초였으니 아직 꽃이 있을 리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한적하니 좋을 것 같아 가볍게 혼자 오른 길이었다.
입구를 찾다 지세포 방파제 옆 산길로 들어섰다. 가는 길이 다소 거칠었다. 돌길, 흙길로 이뤄진 좁은 길만 자꾸 나왔다. 이 길이 맞는 걸까 싶었다. 살짝 불안해지는 와중에도 우연히 만난 아담한 유채꽃밭은 노랗게 소담스러웠다. 어느 정도 걷자 돌을 쌓아 만든 성벽의 일부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 잔잔한 바다를 가르며 어딘가로 향하는 배. 꽃동산은 없었지만 성벽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탁 트여 시원하고 평화로웠다.
▲ 돌이 군데 군데 놓인 지세포진성 흙길 |
ⓒ 배은설 |
가파르고 좁은 흙길을 디디며 다시 한 번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라 괜히 더 불안했던 마음은, 옹기종기 붙어 있는 집들을 만났을 때야 사라졌다.
▲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거제 선창마을 |
ⓒ 배은설 |
딱히 헤맬 것 없는 동네 뒷산 정도인데 나는 왜 이 아름다운 여행지에서의 산책을 즐기지 못했을까. 꽃동산이라니 편한 길이겠지 생각하며 오른 길이 예상치 못하게 흙길이어서 그랬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애초에 지세포진성은 조선시대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벽이었다. 성벽 주변의 길이 평탄할 리 없는데, 별 생각 없이 올랐다 제풀에 당황했다.
거제 여행 이틀 차, 아이가 아프다
그러고 보니 거제로 떠난 9일 간의 봄 여행은 분명 온통 꽃길이었는데, 꽃길이 아닌 순간들도 종종 있었다.
벚꽃, 유채꽃, 튤립, 철쭉 등등, 막 도착한 4월 초의 거제는 그야말로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꽃밭이었다. 꽃길을 원 없이 보던 여행 이틀 차 저녁, 아이는 남편과 영상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주말을 함께 보낸 남편은 출근을 위해 거제를 떠난 후였다. 다가오는 주말에야 다시 거제로 오기로 돼 있었다.
피곤해하긴 했지만 잘 놀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힘들어했다. 그리고 이내 토를 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그날 밤, 한가득 걱정인 채 아이 곁을 지켰다.
▲ 거제 봄여행 중 만난 수많은 벚나무 중 한 그루 |
ⓒ 배은설 |
여행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날이었다. 넓고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인데, 그 산을 진달래가 소복이 뒤덮고 있는 사진을 봤다. 대금산이었다.
거제의 북쪽에 위치한 대금산은 신라 때 쇠(金)를 생산했던 곳이라 하여 대금산이라 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산을 수놓은 진달래와 억새가 비단결같이 아름다워 '큰 대(大)', '비단 금(錦)'자를 써서 대금산이라 불린다고 했다.
진달래 가득한 사진 한 장에 이끌려 대금산으로 향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 애초 산은 갈 엄두도 내지 않았지만, 이곳은 대금산 주차장까지 차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울퉁불퉁 비포장도로가 이어지는 임도를 지나 점점 높이 올라갈수록, 차창 밖 풍경도 확연히 달라졌다. 숲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바다가 벌써부터 아름다웠다.
잠시 후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걸어 올라가는 길, 아쉽게도 개화시기를 못 맞춘 건지 진달래 뒤덮인 대금산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기도, 떨어진 벚꽃잎을 줍기도 하며 천천히 산을 올랐다.
▲ 대금산 정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풍경 |
ⓒ 배은설 |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며 산과 바다와 섬이 만들어낸 그림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렇게 산행을 마친 뒤 차를 타고 대금산을 다시 내려가는 길이었다. 임도인지라 길이 그리 넓지 않았는데 맞은편, 올라오는 차 한 대가 보였다. 남편은 후진으로 지나갈 공간을 만들어줬다.
▲ 거제 여행 중 마주친 예상치 못한 순간 |
ⓒ 배은설 |
낙엽으로 잔뜩 뒤덮여 있어서 미처 보지 못한 커다란 배수구 구멍에 차 뒷바퀴가 움푹 빠져 있었다. 천천히 후진했던 터라 덜컹 거리는 낌새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차 뒤로 또 다른 차 한 대가 섰다. 차에 있던 분들이 내려서 함께 차를 들어 올리려 시도했다. 쉽지 않았다. 거듭 된 시도 끝에 결국엔 긴급출동을 부르려는데, 이번엔 통화권 이탈 지역인 듯 통화가 안 됐다.
상황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잘 있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별일 아니라고 달래주고 있는데, 도와주던 한 분께서 자신의 차에 가 있으라 거듭 권해 주셨다.
이리저리 신호가 잡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무사히 통화가 된 후에야, 우릴 도와주던 분들은 자리를 떠났다. 가족들과 함께 대금산 나들이를 온 듯한 거제 주민 분들 같았는데, 무척이나 감사했다.
지세포성 헤매기, 장염, 긴급출동. 이쯤 되자 긴급출동을 기다리다 순간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여행을 왜 하는 걸까?'
여행은 마냥 즐거울 때도 있지만, 이번 여행처럼 종종 예상치 못한 크고 작은 난관에 부딪칠 때도 있다. 그럼에도 20대 때부터 지금까지 기회가 될 때마다 자주 여행을 했다.
정말로 나는 여행을 왜 하는 걸까? 좋은 경치를 보고 싶어서, 고민이 있어서, 쉬고 싶어서, 기분 전환이 필요해서, 돌아오기 위해서.
이런 저런 여행의 이유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관뒀다. 좋아서 하는 일에 의미를 찾는 건 무의미했다.
그저 어느 날 문득, 떨어지는 벚꽃잎을 신나게 줍던 아이의 작은 손이 기억나겠지. 긴급출동 해프닝을 떠올리며 잠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도 떠올릴 테지.
그러니 또 여행을 떠날 것이다. 어디든.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글쓴이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tick11)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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