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의 모서리를 접는 마음] 원터치 텐트처럼
좋은 행인이 되고 싶다고 종종 말하지만 솔직히 출근길엔 예외다. 지하철에서 인파에 휩쓸리면 일단 타인과 대면할 일이 없기를 바라게 되니까. 역에서 방송국까지 겨우 10분 거리를 택시에 기대야 할 때는 더 그렇다. 시간에 쫓기며 마음이 앙상해진 상태. 그런 나와 다르게 어느 날의 택시기사님은 좀 유머러스했다. 그 영향이었는지, 다소 방어적으로 그의 말을 듣던 나도 하차 직전엔 이렇게 말하게 됐다. “기사님, 차 번호가 뭐예요? 제가 라디오 진행하는데요, 12시 10분이 되기 전에 이 주파수 꼭 챙겨 들으세요!” 잠시 후 방송에서 나는 방금 타고 온 택시의 유쾌함을 전하며 그 차에 타는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고 말했다.
다음 날, 우리 프로그램 게스트인 김신지 작가가 나와 똑같은 경로로 똑같은 택시를 타게 됐다. 기사님은 자신의 차 번호가 이 라디오에 나왔다며 반가워했다. 그리고 지금 태운 손님이 바로 그 방송 출연자라는 것을 알고서는 진행자에게 꼭 얘기를 전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라디오에서 “기사님이 지금 듣고 계실까요?” 라는 말이 흘러나올 때 차 안에서 “네! 듣고 있어요!” 하고 크게 대답했다고, 주변에 자랑도 했다고, 사실 어제는 벌이가 별로인 날이었는데도 힘이 났다고. “그래서 종일 행복하셨대요.”
기사님이 택시 안에서 “네! 듣고 있어요!” 하고 대답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자꾸 웃음이 난다. 힘이 난다. 길에서 주고받는 작은 기쁨들이 깜짝 선물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애초에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렇게 씩씩한 점프의 순간을 만나면 우리를 지탱해온 촘촘한 힘에 대해 새삼 돌아보게 된다. 안녕하세요,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하는 말과 표정, 행인들 사이에 오가는 작은 배려를 헤아리면 놀라운 마음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여분이 없을 것 같던 마음이 원터치 텐트처럼 팡! 커지는 것이다.
윤고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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