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불행의 탈을 쓰고 온 행복
외교부 출입 시절, 억울하게 좌천당한 공무원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얘기다. 어쭙잖은 위로의 말을 꺼내던 내게 그 인사는 “좋아하는 영어 표현 중 ‘blessing in disguise’라는 게 있는데, 지금이 그렇다”고 담백하게 말했다. 위장된 축복, 혹은 불행의 탈을 쓰고 온 행복 쯤 되겠다. 평온했던 그의 표정이 선하다. 수년 후, 그는 비서관 여러 명의 보좌를 받으며 국가 중대사를 지휘했다.
불행은 행복의 필요조건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역경을 딛고 일가를 이룬 이들의 공통점은 불행을 벗 삼아 성장했다는 것. 최근 인터뷰한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 아비 모건은 남편이 난치병으로 쓰러지는 일상에서 회복 탄력성을 배웠다고 말했다. 통일부의 살아있는 전설인 허희옥 전 기자실장은 전화 인터뷰에서 “(암 투병 중이지만) 그래도 살아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곽정은 작가는 힘든 시기를 보낸 덕에 명상가로 거듭났다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미소지었다.
행복하려고 발버둥치다가 불행해지고 마는 것. 현재의 행복은 당연시하고 미래의 행복을 좇다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그게 우리의 실수가 아닐까. 불행에 당당히 맞설 회복 탄력성을 기르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답은 대가들에게 있다. 먼저 서예가인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 그는 23일 어떤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살아있는 것엔 거스르는 힘이 있다. 씨앗이 흙을 거슬러 싹을 틔우고, 종이를 거슬러 붓이 글씨를 써내듯, 생명은 중심을 잡고 거스르는 힘이 있기에 아름답다.” 두 번째는 미국인으로 유럽 함부르크발레단을 반세기 넘게 이끈 존 노이마이어 안무가. 그는 23일 국립발레단 ‘인어공주’ 기자회견에서 “불행한 날도 있지만, 그저 매일 충실히 정진하는 게 핵심”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일상을 성실히 살아내며 불행을 거슬러 극복의 싹을 틔우고, 불행의 탈을 벗길 수 있다는 의미 아닐까. 파랑새를 찾다가 포기하고 돌아왔을 때 집에 있던 파랑새를 만난 것처럼, 인생의 비극을 피하려 않고 받아들이면 어느새 더 나은 존재가 되어 남에게도 빛을 공유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잔인한 달 4월, 여러 불행 때문에 세상이 무너질 듯 힘들다면 이 또한 행복을 향한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아가자.
“불행의 탈을 쓴 행복”의 자매품으로 “모든 먹구름엔 은색 띠가 있다”는 말도 있다. 구름 뒤 태양이 환히 비추기에 테두리가 은색으로 빛나는 것을 두고, 모든 불행엔 행복의 단초가 깃들어 있다는 뜻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지금의 불행은 먹구름의 은색 띠라고 생각하자.
전수진 투데이·피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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