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통장 602개 만들었는데…대법 "업무방해죄는 다시 따져야"

최석진 2024. 4. 23.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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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허가, 계좌 개설 등 업무방해죄 관련
기존 대법원 판례 따른 판결

유령법인을 세워 온라인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자나 보이스피싱 조직 등에 판매할 목적으로 무려 600여개의 대포통장을 개설한 피고인에게 금융기관들에 대한 업무방해죄 성립을 인정한 하급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파기됐다.

행정관청의 인·허가처분이나 비자발급처럼 신청을 받아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춘 경우에 한해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업무의 경우 신청인이 제출한 서류에 기재된 사유가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전제에서 업무담당자가 충분한 심사를 하지 않고, 신청인이 제출한 소명자료를 가볍게 믿고 수용한 경우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기존 대법원 판례의 입장을 따른 판결이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업무방해 및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원심판결에는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채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의 성립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은행 계좌 개설 업무의 경우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 성립 여부가 금융기관이 제대로 심사를 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데, 2심 법원이 이에 대해 따져보지 않고 A씨에게 업무방해죄 유죄를 인정한 건 잘못이라는 취지다.

A씨는 지난 2019년 유령법인의 대표자로 명의대여자인 B씨를 선임하는 법인 변경 등기를 마친 뒤 은행 지점에서 법인명의의 계좌를 개설했다.

A씨는 법인 계좌가 개설되면 이에 연계된 통장, 체크카드를 도박사이트나 보이스피싱 조직에 유통할 목적으로 유령법인을 정상적인 회사인 것처럼 사업자등록증과 인감증명서 등 서류를 은행에 제출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이런 방식으로 2019년 11월부터 2022년 5월까지 금융기관들로부터 35개 유령법인 명의의 계좌 602개를 개설해 금융기관들의 업무를 방해하고(업무방해), 다른 공범자들과 함께 온라인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자나 보이스피싱 조직 등에 대가를 받고 통장과 OTP 등 접근매체를 넘겨줘 유통한(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앞서 1·2심은 이러한 A씨의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먼저 재판부는 2004년 대법원 판례를 원용해 "상대방으로부터 신청을 받아 일정한 자격요건 등을 갖춘 경우에 한해 그에 대한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업무에 관해서는 신청서에 기재된 사유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로 자격요건 등을 심사·판단하는 것이므로, 업무담당자가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채 신청인이 제출한 허위 신청사유나 허위 소명자료를 가볍게 믿고 수용했다면 이는 업무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으로서 신청인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없어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전제했다.

그리고 다시 지난해 8월 대법원이 선고한 판례를 원용해 "따라서 계좌개설 신청인이 접근매체를 양도할 의사로 금융기관에 법인 명의 계좌를 개설하면서 예금거래신청서 등에 금융거래의 목적이나 접근매체의 양도의사 유무 등에 관한 사실을 허위로 기재했으나, 계좌개설 심사업무를 담당하는 금융기관의 업무담당자가 단순히 예금거래신청서 등에 기재된 계좌개설 신청인의 허위 답변만을 그대로 믿고 그 내용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증빙자료의 요구 등 추가적인 확인조치 없이 법인 명의의 계좌를 개설해 준 경우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에 대해 "원심으로서는 피해 금융기관들의 업무담당자가 피고인 등에게 금융거래 목적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추가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등 적절한 심사절차를 진행했음에도 피고인 등이 그에 관해 허위 서류를 작성하거나 문서를 위조해 제출함으로써 업무담당자가 허위임을 발견하지 못해 법인 명의의 계좌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는지 여부에 관해 필요한 심리를 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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