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화폐 속에 성경 구절이?

신상목 2024. 4. 22.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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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또 한 주가 시작됐습니다.

건조한 날씨와 황사가 계속되다가 지난 주말 비가 온 뒤로는 한결 공기가 좋아졌습니다. 그래서인지 활짝 핀 철쭉꽃들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어제는 국민일보가 있는 서울 여의도에 유독 사진을 찍는 어르신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나이 지긋한 할머니, 아니, 누님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마다 손에 핸드폰을 쥐고는 철쭉 등 각종 꽃과 거리의 식물을 찍고 계셨습니다. 슬쩍 그분들 옆에 가봤는데 제가 다가온 줄도 모른 채 감탄사를 연발하고 계셨습니다.

한라산 진분홍 산철쭉 모습. 국민일보DB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고 자연의 신비에 감성을 드러내는 분들은 정서적으로 건강한 분들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맨날 땅만 쳐다보고 걷거나 무뚝뚝하게 지나기 일쑤인데요. ‘누님들’의 건강함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은 어떤 풍경을 보셨나요. 그저 보는 것으로 그치지 마시고 눈과 마음에 한가득 담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날마다 보시고 들으시며 기뻐하시며 그분의 커다란 눈에 우리를 한가득 담으시겠지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아빠 되신 하나님, 그 분 앞에 내 모습 이대로 다가가렵니다.

현대 신학의 토대를 놓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1724년 4월 22일 현대 철학과 신학의 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1945년 구소련에 편입되면서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칸트는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규칙적인 생활 습관으로도 유명해 동네 사람들이 그의 산책 시간을 보고 시계를 맞췄을 정도라고 하지요.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가 대학에서 맡은 직책이 논리학 및 형이상학 담당 교수였습니다. 칸트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인 형이상학을 한 단계 더 정교하고 체계적인 철학으로 끌어올린 철학자였습니다. 칸트를 필두로 18~19세기 독일 관념론자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칸트는 기독교와도 관계가 깊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토대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현대 신학의 창시자이자 자유주의 신학을 시작한 것은 슐라이어마허이지만 현대 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칸트라고 말합니다. 칸트는 기독교 역사를 바꾼 사람으로 칸트 이전의 기독교와 칸트 이후의 기독교로 구분됩니다.

칸트는 1781년 출간된 ‘순수이성비판’에서 당시 대륙의 관념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가진 문제점을 보완하여 인식론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회의주의자들에게 무너져 가던 형이상학을 구하고 인식의 회의주의를 극복했습니다. 신, 자유, 영혼 불멸 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는 인간이 경험으로 증명할 수 없으므로 정언 문장으로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칸트는 그것들은 경험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실천이성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신이나 자유, 영혼의 불멸 등은 이론이성이 아니라 실천이성의 영역에 속하므로 이것들은 이성을 통해 입증할 수 없고 오직 신앙을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이 책에서 이성의 한계를 규정함으로써 종교는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 분야가 아니라 실천적이고 도덕적 분야와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종교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한다면 반드시 도덕 종교가 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참된 종교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들을 인식하고 행하는 데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정통 기독교회의 신학을 전복하는 내용입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그분의 계시가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들도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는 기독교를 객관적인 계시 종교로부터 주관적인 실천(이성) 종교로 바꿔놓자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칸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세우고자 하신 나라는 전적으로 도덕 국가이며,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상으로 보내신 것도 이 땅의 도덕 국가에서 살아갈 신민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칸트는 하나님 나라를 도덕의 나라와 똑같이 여깁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도덕적 의무를 더 중시했습니다. 신적 계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도덕법칙의 잣대로 성경을 판단하고 성경의 모든 내용은 이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칸트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사도바울은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이런 흐름은 나중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전수됩니다.

미국 화폐 속에 성경 구절이? ‘In God We Trust’
1864년 4월 22일 남북전쟁 중 고안된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안에서(In God We trust)’라는 모토가 미국 주화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 문구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9세기 중반에서 찾을 수 있지만 정치적 신조로서 그 기원은 미국 남북전쟁에서 연합 지지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애착을 강조하고 사기를 진작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1864년 2센트짜리 동전에 처음 등장한 ‘IN GOD WE TRUST’는 처음에는 동전에만 등장했지만 점차 미국인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1950년대에는 훨씬 더 널리 채택되기 시작해 이 모토가 새겨진 최초의 우표가 1954년 등장했습니다.


1955년 7월엔 의회의 공동 결의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승인으로 모든 미국 화폐에 “In God we trust’가 표시됩니다. 이때 제정된 법은 1957년 10월 1일 유통되기 시작한 1달러 은화에 처음 적용됐습니다. 이후 의회는 1956년 7월 30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서명, 이 문구를 국가 모토로 선언한 법안을 몇몇 주에서는 공공 기관이나 학교에서 이 문구를 의무화하거나 사용을 승인했으며 플로리다와 조지아, 미시시피주는 주의 상징에 이 문구를 포함했습니다.

이 모토는 미국 대중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가 많습니다. 2003년 USA 투데이, CNN, 갤럽의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90%가 미국 동전에 새겨진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신뢰한다’라는 문구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일부 단체와 사람들은 종교적 언급이 수정헌법 제1조의 국교 조항을 위반한다고 주장하며 이 문구 사용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 모토를 영어로 처음 사용한 기록은 1748년 1월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펜실베이니아 민병대인 어소시에이츠 연대의 색깔에 대해 보도한 것입니다. 미국 역사학자 토머스 키드에 따르면 이는 시편 56편 11절(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In God I trust, I shall not be afraid. What can man do to me?-ESV) 일부 번역에서 찾을 수 있는 공식적인 사용 사례로 보입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 안에서”라는 정확한 문구는 1785년 미국에서 개정돼 인쇄된 아이작 와츠의 시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와츠는 시편 115편 9~11절의 첫 구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O Israel, trust in the LORD)를 ‘영국아, 주님을 신뢰하라’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미국 출판사 조엘 발로우는 미국 독자들을 위해 와츠의 시편을 개정했습니다. 발로우는 시편 115편 9~11절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합니다”(In God we trust)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연합감리교 탄생
1968년 4월 23일 복음주의 연합 형제 교회가 훨씬 더 큰 감리교회와 합쳐지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감리교 그룹이자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개신교 교단인 연합감리교가 탄생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세례를 받다
387년 4월 24일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자전적 ‘고백록’에서 “세례를 받고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고 썼습니다. 33세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 최고의 학교에서 수사학과 이교 철학을 가르치던 교사였지만 어머니 모니카와 유명한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부활 주일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기독교에 입문하게 됩니다.
청교도 혁명, 그리고 호국경 시대
1599년 4월 25일 영국의 청교도 수호자 올리버 크롬웰이 케임브리지 근처에서 태어납니다. 크롬웰은 군주로서 청교도들에게 더 많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려고 노력했지만, 동시에 침입적이고 인기 없는 권위주의적 조치를 도입했습니다.

크롬웰은 영국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청교도혁명이라 불리는 영국 내전에서 활약했습니다. 1642년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자 혁명군을 지휘하여 왕당파를 물리치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가 거느린 군대는 숫자는 작았지만 강력한 기병대였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전쟁에 임한다고 확신했고 시편을 노래하면서 전쟁에 나섰습니다. 네이즈비 전투에서 왕의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의회군은 왕의 본거지를 점령했고 이들은 찰스 1세가 외국 가톨릭 군대와 손잡은 것을 폭로했습니다. 다급한 찰스는 스코틀랜드인과 협상에 나섰다가 체포돼 의회군에 넘겨줍니다. 청교도군은 의회를 장악했고 재판을 열고 찰스 왕을 참수형에 처합니다.

찰스의 처형으로 영국이 혼란에 빠졌고 이때 크롬웰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는 혼란한 사회를 정돈했습니다. 우선 아일랜드의 반란을 평정하고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한 왕당파의 폭동도 진압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호국경 또는 호민관(Lord Protector)이라 부르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통치하는 자리에 올라 1658년 병으로 죽을 때까지 전권을 행사했습니다.

크롬웰은 교회와 국가의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크롬웰 자신은 독립파였으나 그는 장로교 침례교 그리고 온건한 감독파 지지자들도 공존할 수 있는 종교 체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또 청교도답게 주일 경마 투계 극장 등에 관한 일련의 입법 조처를 통해 국가 풍속을 개혁하려 했습니다. 그의 경제정책은 중산층의 권익을 옹호한 것으로서 귀족뿐만 아니라 빈곤층에게도 손해를 초래했습니다. 부유층과 극빈층 사이에서 호국경에 대한 반대가 확산됐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평안하게 영국을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이전 왕들처럼 의회와 우호적 관계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추종자들은 그에게 왕좌를 권했지만 그는 공화정을 주장했습니다. 거룩한 왕국을 추구했던 그는 1658년 임종이 가까워져 오자 자기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을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아들도 호국경이 되었으나 몽크 장군에 의해 1660년 왕정이 복고되면서 물러났습니다. 크롬웰의 무덤은 파헤쳐졌으며 그의 시신도 꺼내졌습니다. 크롬웰의 죽음과 함께 청교도의 시대도 끝납니다.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의회는 장로교 제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감독 제도를 다시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청교도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국교회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교회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됐습니다. 장로교 목사들은 쫓겨났고 이후 반란과 폭동이 발생했으나 완전히 전멸하고 맙니다.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는 세력이었습니다. 1564년부터 ‘개혁의 개혁을 위한 운동’을 하는 이들로 부각됐습니다. 완전한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은 투쟁의 투쟁을 거치다 결국 진압되고 맙니다. 이후 찰스 2세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선포했고 그의 동생이자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2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인들은 장로교도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영국에서는 누구든 왕실에 충성하고 1520년 39개 조항에 서명하면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결국 성공회 국가로 남은 것입니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를 국가 공식 종교로 삼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리로 택했습니다. 청교도의 이상은 영국인의 전통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신대륙에서 미국을 건국하는 토대가 됐습니다.

공산주의 혁명 이후 다시 교회 종탑 소리가 울리다
1992년 4월 26일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대성당 이반 대종탑의 종소리가 부활절에 70년 만에 처음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1917년 공산주의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극심한 탄압을 받았지만 교회는 정부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문을 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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