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사상 최격변의 시대... 개혁은 이루어졌는가?
[김성호 기자]
개혁. 법과 제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이를 고쳐 바로잡는 것을 개혁이라 부른다. 고칠 개(改)에 가죽 혁(革)을 쓰는데, 피부를 싹 갈아엎을 만큼의 각오가 없다면 이룰 수 없다는 뜻이겠다.
역사를 돌아보면 부와 권력이란 자연히 불어날 뿐이지 흩어지지 않는다. 인맥과 혼맥, 학연과 지연으로 뭉쳐서는 부와 권력을 지키려 드는 것이 인간의 습성인 탓이다. 경계하지 않는 권력은 쉽게 사유화된다. 자본주의 아래 자본 또한 마찬가지여서 저 유명한 토마 피케티는 제 저서 < 21세기 자본 >을 통하여 자본의 증식속도를 생산이 따르지 못함을 입증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요컨대 부와 권력은 자연히 두면 나라와 제도의 기틀을 좀먹는다.
▲ 용의 눈물 포스터 |
ⓒ KBS |
KBS 대하사극의 정점에 이 작품이 있다
새로운 나라가 선다는 건 전의 나라가 문을 닫는다는 뜻이다. 새로운 질서를 연다는 건 과거의 체계를 닫는다는 것이다. 무엇을 세우고 여는 데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기존 질서가 붕괴하고 기득권이 해체되며, 그에 따른 혼란이 이어진다. 이를 막고자 국가며 사회를 지키려는 이들은 개혁을 택하게 마련, 본체의 죽음 대신 피부를 벗어 새로이 하겠다는 일이다.
역대 최고의 사극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이 있다. KBS 대하사극의 정점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용의 눈물>이 바로 그 작품이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총 159부작으로 제작된 대하사극으로, 당대 최고라 할 수 있는 160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들었다. 모든 역사애호가가 관심을 갖는 여말선초의 격동기를 폭넓게 그리는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멸망, 조선의 건국과 정도전의 숙청, 왕자의 난 등에 이르는 굴곡진 역사가 두루 다루어진다.
▲ 용의 눈물 스틸컷 |
ⓒ KBS |
위화도 회군부터 세조의 찬위까지
<용의 눈물>은 역사드라마를 넘어 정치드라마와 가족드라마로도 상당한 깊이를 내보인다. 제목의 용은 다면적인 상징으로 기능하는데, 시작은 왕을 용과 빗대었던 고려조의 멸망부터다. 위화도 회군과 마지막 기둥이던 최영이며 정몽주의 죽음 이후 고려조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성계는 꼭두각시 왕을 세우고 군사와 인사를 장악하며 법과 제도를 제 마음대로 고친다. 그로부터 때가 되었을 때 고려를 폐하고 새 나라를 세우며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왕건 이후 400여 년을 이어온 왕씨 일족은 몰락하여 온 씨족이 살육되는 지경에 이른다. 이것이 첫 번째 용의 눈물이다.
이어 드라마는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에 의해 밀려나 왕위를 빼앗기는 과정을 그린다. 이 과정에는 제가 믿었던 정도전을 비롯하여 이방원의 배 다른 동생으로 세자가 된 이방석, 그 바로 위인 이방번의 죽음이 따른다. 제 아들에게 아끼던 이를 하나하나 잃고 왕위까지 빼앗긴 늙은 왕의 분노를 명배우란 말이 아깝지 않은 김무생이 처연하게 연기한다. 한 나라를 멸하고 또 다른 나라를 세운 영웅의 말로는 어쩌면 <용의 눈물>의 주된 감상이라 할 수 있을 허망함과 허탈함을 짙게 일으킨다.
▲ 용의 눈물 스틸컷 |
ⓒ KBS |
한반도 역사상 가장 격동적이었던 34년
용이라 부를 만한 이들의 비탄이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가운데 드라마는 34년에 이르는 역사를 휘몰아치듯 흘러간다. 한반도 역사상 가장 격동적이었던 시기, 수많은 왕이 올랐다 내려가고 나라와 나라가 섰다가 무너지며, 나라의 근간이 뒤바뀌는 과정이 잇따라 그려진다. 저마다 서로 다른 꿈을 품고 살아간 일대 인물들의 쟁투 가운데서 문명이 역사의 단계를 차례차례 밟아나가는 모습이 엿보인다.
<용의 눈물>은 이 시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여말선초 30여 년의 시기는 개혁이 가진 가치를 내보인다. 정도전의 토지개혁과 사병혁파 시도, 이방원이 이뤄낸 사병의 완전한 혁파, 공신이며 외척의 척결,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이 모두 그러하다. 각지의 호족들이 위세를 떨치던 고려조의 악습을 철폐하고 과거제도를 대폭 확대해 인재를 등용하는 모습 또한 하나하나가 결코 쉽지 않은 개혁의 연속이다. 드라마는 모든 개혁의 고비마다 그를 반대하는 기득권층과 이를 극복하려는 이들의 싸움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그로부터 개혁의 가치와 그에 따르는 어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 용의 눈물 스틸컷 |
ⓒ KBS |
역사의 진보 뒤엔 책임 있는 개혁이 있다
<용의 눈물>이 그리는 시대는 이와 같은 세상을 개혁하려는 이들이 벌이는 쟁투다. 과점된 땅을 나누고 정말 필요한 이들이 경작해 삶을 꾸릴 수 있도록 하는 일, 또 사사로이 무력을 지니는 일을 막아 공공의 힘을 세우는 일을 이들이 해낸다.
정도전은 정도전대로 단 한 명의 왕에 의존하지 않고 견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육조의 수장인 영의정과 간관들을 두는 체제로 제도를 정비한다. 말이 아닌 법으로 다스리고자 법전 또한 만들고 낡은 제도를 두루 정비하는 것이다.
▲ 용의 눈물 스틸컷 |
ⓒ KBS |
개혁 없는 한국의 오늘이 답답할 뿐
자산 상위 1%에 드는 이들이 금융자산 60% 가까이를 가졌단 게 2년 전의 통계다. 나머지 99%가 남은 40%의 자산을 나누어 가진다는 이야기다. 가진 것 많고 많이 배운 이들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몰려들고 지방도시는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간다. 법인 또한 마찬가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갈수록 심화된다. 부의 편중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미국도 그러해서, 상위 10% 부자가 주식의 90% 이상을 독식하고 있고 그들의 자산증식이 일 년에도 우리 돈으로 수십 경 원 씩 증식하고 있음이 수치로써 잡힌다.
건국 이후 80년이 흐른 한국이다. 한때는 아시아의 용이란 이야기를 들었던 한국이 산업역동성 측면에서 OECD 국가 중 최하 수준이란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대기업 반열에 오르는 신흥 기업이 타국에 비해 크게 모자라다는 지적 또한 끊이지를 않는다. 지방도시 재정은 갈수록 빈약해지고 떠오르는 지역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계층의 사다리가 끊겼다는 이야기는 이제 식상하게 다가올 정도지만 근본적 대책을 논의하는 목소리를 들어볼 길 없다.
자산의 증식속도를 생산속도가 따르지 못하여 마침내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경기가 둔화되게 된다는 가설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오늘날, 한국은 과연 무엇을 고치고 쌓고 세우고 있는가. 이 시대 <용의 눈물>이 던지는 진실로 가치 있는 질문이란 바로 이것일 테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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