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비포 선라이즈 | 제시와 셀린이 손전화 하던 그곳, ‘카페슈페를’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4. 4. 1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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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의 영화 한 편을 꼽는다면?”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단연 ‘비포 선라이즈’를 선택하고 싶다.

파리 소르본대학에 다니는 셀린(줄리 델피 분)은 여름방학 동안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다 개학을 앞두고 파리로 돌아가기 위해 유로스타 열차에 탑승한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유학온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유럽에 온 미국 청년 제시(에단 호크 분). 그러나 제시가 맞부딪친 현실은 여자친구와의 아름다운 재회 대신 실연.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파리행 유로스타에 몸을 실은 제시는 우연히 기차에서 셀린과 대화를 하게 된다.

둘은 대화가 아주 잘 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제시는 자신과 함께 비엔나에서 내리자고 셀린에게 제의한다. 홀리듯 비엔나에서 제시와 함께 내린 셀린. 다음 날 아침 제시가 비행기를 탈 때까지 둘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하루 반나절과 밤을 거쳐 태양이 뜰 때까지의 짧은 시간. 그 시간 동안 둘은 비엔나 곳곳을 다니면서 사랑과 연애, 삶과 죽음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6개월 후, 비엔나역에서 재회하자며 헤어짐의 순간을 맞이한다.

영화가 개봉한 해는 1996년. 당시는 휴대폰도 없었고 이메일도 없던 시절. 유럽과 미국의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약속이었을 터. 2024년의 눈으로 바라보면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만남이지만,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낭만적인 만남과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다음 해부터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는 대학생이 급증했다는 스토리와 함께.

‘비엔나 홍보영화 아니냐’는 생각이 들 만큼 둘의 여정과 함께 아름답게 그려진 비엔나의 곳곳들, 그중 한곳이 바로 비엔나의 대표적인 커피하우스 ‘카페 슈페를’이다.

1880년에 문을 열었다는 카페 슈페를은 지금도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고, 비엔나를 찾는 여행자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장소 중 한 곳으로 유명하다. ‘비포 선라이즈’ 팬이라면 더더욱이나.

차의 역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커피하우스’
‘카페 슈페를’은 1600년대 커피하우스의 원형 그대로 간직
카페 슈페를은 한때 유럽에서 유행했던 ‘커피하우스’ 형태를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비엔나는 커피하우스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는 도시로 유명한데 비엔나 커피하우스는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카페가 무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선정까지? 커피하우스가 카페이긴 하지만, 요즘의 카페와는 살짝 결이 다르다. 고풍스러우면서 시간의 더께가 느껴지는 소파가 있는 것은 기본. 검은 정장을 입은 웨이터가 은쟁반에 서빙을 하는가 하면, 한쪽에는 스크랩한 신문과 잡지가 놓여 있다. 구석에는 당구대와 체스판, 카드 게임판도 있다. 그저 커피만 마시던 곳이 아니라 다양한 여가활동을 즐겼던 공간임을 짐작해볼 수 있는 단면이다.

제시와 셀린이 손전화를 하며 서로의 진심을 나누는 장소는 비엔나의 대표적인 커피하우스 ‘카페슈페를’이다. 카페슈페를에는 지금도 한편에 당구대, 신문스크랩 등이 놓여 있다.
‘커피하우스’는 차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왜 커피하우스가 차의 역사에서?

커피는 9세기경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마시기 시작했다는 게 정설이다. 예멘의 아덴항을 통해 전 아라비아반도로 퍼진 커피는 중동을 제패한 오스만제국에서 엄청 유행 했는데 심지어 남편이 매일 일정량의 커피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이혼 사유가 되기도 했다. 1475년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키바 한(Kiva Han)’이라는 공간이 생겨났는데 ‘키바 한’은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로 알려져 있다.

커피 문화는 17세기 유럽으로 전파된다. 처음 유럽인들은 커피를 ‘이교도들이 마시는 음료’라며 꺼렸지만 교황 클레멘트 8세가 커피를 마셔본 후 “악마의 음료라기엔 너무 맛있으니 커피에 세례를 주겠다”고 한 이후 커피가 유럽에 널리 퍼졌다는 스토리가 전해 내려온다.

1629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유럽 최초로 커피하우스가 탄생했고, 1650년 유대인 무역상 제이콥이 옥스퍼드에 ‘카페 제이콥스’를 열었는데 이곳이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다. 뒤이어 런던에 10여 곳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고, 1700년경에는 런던에 3000개가 넘는 커피하우스가 성황을 이뤘다.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입장료 1페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였지만, 남자만 출입 가능한 공간이었다. 커피하우스에 1페니를 내고 들어간 영국 신사들은 커피하우스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고 논쟁을 벌이곤 했다. 과학자와 지식인을 포함해 커피하우스에 다양한 신분과 직종의 사람들이 모이면서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인 논리를 펴기 위해 가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커피하우스 정치인’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는가 하면, 커피하우스를 가리켜 ‘1페니 유니버시티’라 일컫기도 했다.

당시 커피하우스 운영자 중 한 명이 에드워드 로이드였다. 로이드는 뱃사람들과 친했고 자연스레 뱃사람과 무역상인들이 로이드의 커피하우스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들은 바다 날씨와 만조 시간, 해적 출몰 지역, 나라별 특산품, 선박의 출항 및 도착 시간 등에 대한 정보를 주로 교환했는데, 그 모습을 본 로이드는 이런 내용을 칠판에 ‘로이즈(Lloyd’s) 뉴스’라는 제목을 달고 적어놓았다.

‘로이즈 뉴스’ 반응이 좋자 1696년부터는 ‘로이즈 리스트’라는 이름으로 정보지를 발간하기에 이른다. 당시 걸핏하면 배가 난파하던 시절이라 로이드는 단골인 선주 몇 사람과 배가 항구에 무사히 도착할지를 두고 내기를 하곤 했다. 배가 무사히 도착하면 로이드가 돈을 따고, 배가 가라앉으면 로이드가 그 손실을 물어주기로 했다. 이는 훗날 로이즈(Lloyd‘s of London) 보험회사가 탄생하는 기반이 됐다.

소더비와 크리스티 같은 경매회사도 시작은 커피하우스였다. 몇몇 커피하우스가 돈이 될 만한 여러 물건, 부동산, 골동품 등의 경매에 발을 담갔고 이후 경매로 특화된 커피하우스가 소더비와 크리스티의 전신이 됐다.

수많은 커피하우스 중 1657년 런던 익스체인지 앨리에 문을 연 ‘개러웨이 커피하우스’는 처음으로 차를 취급했다. 개러웨이는 “동양의 근사한 음료 차는 만병통치약”이라 광고하면서 녹차를 내놓았다. 당시 포스터가 지금도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들은 동양의 차를 2배나 되는 은을 주고 수입하고 있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차의 효능에 관한 설명도 자세하게 나와있는데 두통, 결석, 괴혈병, 기억상실, 복통, 설사, 악몽 등의 증상에 효과가 있고, 비만인 사람의 식욕을 억제하고, 위장을 다스리며 폐병을 예방한다고도 되어 있다. 개러웨이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는 커피 대신 차를 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1730년경 런던 교외에 차 마시는 정원 ‘티가든’ 생겨나
정원·정자·분수·극장 갖춘 ‘유원지’ ‘유락시설’ 기원
커피하우스가 대유행하면서 커피하우스에 대한 우려의 인식도 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 정치적인 논의를 하고 의견을 모으고 정부에 새로운 정책을 제안하는 것이 불편했던 찰스 2세는 1675년 12월, “1676년 1월 10일부터 영국의 모든 커피하우스를 폐쇄한다”고 공표했지만 영국 전역에서 항의시위가 일어나는 등 저항이 거세지자 1월 초 결정을 철회했다.

위정자들만 커피하우스를 불편해한 것은 아니다. 커피하우스가 남성들만의 공간이다 보니 커피하우스를 출입하지 못하는 여성들 불만도 거셌다.

1730년경에는 주로 도심에 있으면서 남자의 전유물이었던 커피하우스 대신 남녀가 함께 차를 즐길 수 있는 장소인 ‘티가든’이 생겨난다. 티가든은 ‘가든’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정원에서 티를 즐길 수 있는 곳인 만큼, 주로 런던 교외에 만들어졌다.

최초의 티가든은 ‘복스홀 가든’인데 템스강 남쪽, 복스홀 다리에서 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5월에서 9월까지 일요일만 빼고 매일 문을 연 복스홀 가든에는 근사한 정원은 물론 중국풍 정자와 분수, 극장 등이 있었고 차와 함께 버터 바른 빵을 무료로 제공했는데 이걸 즐기러 온 가족이 아침에 함께 오는 경우도 많았다고.

티가든에서는 단순히 차만 즐긴 게 아니라 산책길에서 산책도 하고 오케스트라 박스에서 열리는 연주회도 감상하며 불꽃놀이와 무도회를 즐기기도 했다. 예전의 ‘놀이공원’이었던 셈이다. 1859년 문을 닫은 복스홀 가든을 지금의 우리는 즐길 수 없지만, 화가 조반니 안토니오 카날의 그림 ‘복스홀 가든의 그랜드 워크(1751년경, 컴프턴 버니 아트 갤러리 소장)’를 통해 당시의 풍경을 조금이나마 엿 볼 수 있다.

17세기 유행한 런던 커피하우스의 정경.
커피하우스와 티가든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다시 낭만적인 ‘비포 선라이즈’ 스토리로 돌아가볼까. ‘비포 선라이즈’가 수많은 젊은이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고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명작으로 추앙받는 것은 그저 ‘하룻밤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둘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 담긴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성찰이 가슴 한편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오래된 부부는 서로 뭘 할지 뻔히 알기에 권태를 느끼고 미워한다고 했지? 내 생각은 반대야. 서로를 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 거야. 머리를 어떻게 빗는지,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말할 건지… 그게 진정한 사랑이야.” (셀린)

“모든 건 끝이 있어. 그래서 시간이 더욱 소중히 느껴지는 거야.”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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