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한없이 가볍게 생각하기

2024. 4. 17.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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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름 작가

원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소박하고 값진 기쁨 있는 한
나머지는 가볍게 생각키로

내가 작가라는 걸 알게 되면 눈을 살짝 키우는 분들이 있다. “작가 처음 봐요.” 신기해하면서. 그럴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고 만다. 조금 궁금해하면서. 작가는 그렇게 희소한 직업이 아니지 않나? 대형 서점 가득한 그 많은 책을 쓴 한 명 한 명이 다 작가니 우리나라에 거주 중인 작가만 해도 엄청 많을 텐데.

하지만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작가가 다른 일을 하면서 글도 쓰는 투잡러가 아니라 글 관련 일만 하며 먹고사는 사람을 뜻한다면 확실히 희소해지긴 하겠다. 더 세밀하게 기준을 세워 글만 써서 먹고사는 전업 작가를 떠올린 거라면 분명 더 희소해지겠고. 그러니 사람들이 날 보고 눈을 키우는 건 내가 글을 써서 먹고살고 있다는 걸 알아서일 수도 있을까. 책을 읽는 사람이 점점 줄어가는 상황에서 책을 써서 먹고사는 희소한 생활을 영위해 가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미래 어느 시점엔 더는 이렇게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가끔 생각하긴 한다. 하지만 이 생각이 급격한 불안을 불러오진 않는다. 불안이 뜨겁게 치고 올라오지 않으니 당장 어제와 다른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번엔 무슨 책을 쓸까 고민하면서 그 책을 봄이 끝나는 무렵에 시작해 겨울이 끝나기 전에 완성하길 바라는 것으로 생각과 감정을 모아갈 뿐. 하지만 옅은 불안이야 늘 존재하기에 책을 읽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나면 기다렸다는 듯 밑줄을 긋는다. “원하는 작업에 전념할 수 있는 소박하지만 값진 기쁨을 얻었고 그 기쁨이 있는 한 나머지는 가볍게, 한없이 가볍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저자에 공감하는 마음이 불안을 덜어 주므로.

위 문장이 담긴 안톤 허 번역가의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는 하루 만에 다 읽은 책이다. 내 집중력도 도둑맞은 지 오래라 요즘엔 무엇이든 진득하게 오래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하루 만에 뭐라도 뚝딱 해치우게 되면 전보다 더 기쁘고 뿌듯하다. 가끔은 책을 읽다가 책이 날 집중하게 도와준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그 책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날 쑤욱 빨아 당겨주어서다.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시간을 보는데 한 시간, 두 시간이 휙휙 지나 있을 때의 기쁨이란.

이 책도 그런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목에 드러난 귀여운 삐딱함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기대보다 더 솔직하게 출판번역계의 ‘무례함’을 밝혀주는 글이 주는 시원함. 번역가의 삶이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만년 을의 자리에서 10년 전 번역료를 감내하며 살고 있는지는 몰랐던 터라 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어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을의 위계를 풀어헤치기 위해선 더 많은 사람의 귀에 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야 하므로.

출판번역계가 번역가에게 요구하는 ‘겸손’을 과감히 거부하겠다고 말한 안톤 허 번역가를 아는 사람이 꽤 있을 것 같다. 적어도 한국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은 들어보지 않았을까. 그는 전 세계에 세 명밖에 없다는 한영(한국어에서 영어로) 문학 전업 번역가이며, 부커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22년 부커상 후보에 함께 오른 한국소설 두 개를 번역한 바로 그 사람. 부커상은 작가와 번역가에게 같이 상을 주므로, 그렇다는 건 한 사람이 두 개의 작품으로 동시에 노미네이트되었다는 말이 된다. 세계에서 한국문학을 영어로 가장 잘 번역하는 사람 중 한 명인 셈이다.

안톤 허 번역가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문학 번역은 지속 가능한 업종이 아니”며 “한국문학 번역은 멸종 위기”라고. 일 년에 영미권에 번역되는 한국소설이 보통 10권 남짓밖에 안 되기도 하고, 한국문학 관련 정책이 하도 허술해서다. 멸종 위기 직군에 몸을 담고 있는 그는 어찌 됐건 번역가의 길을 계속 가고 있다. “나머지는 가볍게, 한없이 가볍게 생각”하면서. 계속 가고 싶은 나도, 그래서 밑줄 쫘악.

황보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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