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의 시간으로 이뤄진 박찬용의 공간

윤정훈 2024. 4. 17.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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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옴므플러스> 피처 디렉터 박찬용이 방을 채워가는 법.

독립하면 내 공간에서 처음 틀고 싶은 노래가 있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첫 앨범 첫 곡인 ‘천의 나이프’.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소망에 유치한 노래이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좀 유치했고 지금도 비슷하다. 몇 년 전 첫 집에서 자게 된 날, 이사 준비를 하다 말고 그 노래를 틀었다. 집은 낡고 넓은 월세 단독주택이었다. 터무니없이 낡고 넓은 방을 텅 비우고 오디오를 두기로 했다. 헌 스피커에 앰프와 블루투스 리시버를 연결한 뒤 스마트폰 스트리밍으로 ‘천의 나이프’를 틀었다. 왠지 조금 더 어른에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때 쓰던 오디오는 ‘빈티지 오디오’의 고급스러운 어감과는 거리가 먼 중고품이었다. 앰프는 소니가 ‘기술의 소니’라 불리던 시절의 AV 다채널 앰프, 스피커는 독일 ALR 조던의 엔트리 M 스피커였다. 오디오 애호가였던 편집장이 빌려줬는데 면구스럽게도 계속 갖고 다녔다. 편집장의 견해에 따르면 ALR 조던 엔트리 M은 ‘상당한 명기’다. 당시 한국 수입사가 도산해서 낮은 가격에 거래됐을 뿐 해외 유수의 오디오 잡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다른 오디오를 쓴다. 선택 기준은 가격(내가 구입 가능한)과 성능(내가 납득할 정도의 적당한), 예쁜(내 눈에 봤을 때) 것으로 귀결된다.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적당히 알려진 앰프를 찾아 적당한 가격에 중고로 샀다. 디자인과 출력, 기능도 적당했고 지금도 맑은 소리를 낸다. 스피커는 좀 더 디자인에 치중했다. 뱅앤올룹슨에서 만든 통알루미늄 케이스 스피커였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나무 스피커가 득세하던 시절에 굳이 알루미늄으로 케이스를 만든 기개가 좋았다.

이 오디오를 구매한 과정과 내가 집에 둘 물건을 사는 과정은 비슷했다.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애호가들이 인정하는 명기거나 고전이 아닌 것. 몇 년 전 한국에서 유행한 ‘생활 명품’이 아닌 것. 생활 명품이 아닌 걸 찾는 이유도 간단했다.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이다. 물건이 유명해지면 비싸진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한국은 유행이 빠른 나라라 그런 경향이 특히 강하다. 다른 나라도 정도 차이만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나는 유명한 생활 명품을 쓰는 게 왠지 낯부끄러웠다. 그래서 〈엘르 데코〉 같은 잡지를 보는 사람들이 “어, 아무개 브랜드네”라고 알아볼 만한 명품도 없다. 플로스도, 아르테미데도, 아르텍이나 한스 베그너도 없다. 루이스폴센 조명도, 융 스위치도 없다. 리하르트 자퍼의 디자인을 좋아해 그의 디자인 원칙이 남아 있는 싱크패드를 계속 쓰긴 해도 역시 리하르트 자퍼의 디자인인 아르테미데 티지오는 없다. 모두 내 의도다. 비싼 물건을 구입하고 싶지도 않지만 가격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돈도 돈이지만 다른 사람이 만든 제품 신화를 내가 숭배할 수 없지 않은가? 대신 내 집을 채운 물건에는 개인화된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이 물건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때 내가 얼마를 가지고 있었나, 여유 있게 구입할 수 있었는가, 빠듯한 재정을 감수해야 했나 등등. 결과적으로 집 천장에 달린 펜던트는 바젤에 출장 갔을 때 사온 심심한 모양의 새하얗고 튼튼한 철제 등이다. 요즘 물건과는 달리 철판이 묵직하고 도장면이 두꺼우며, 무명의 디자인이기에 별다른 디테일이 없다. 나는 그런 물건을 좋아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티 안 나고 견고하게 역할을 다하는 것들.

나는 개인적 사정에 의해 개인화된 기호를 굳이 남에게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개인화한 기호를 신나게 이야기하다 보면 ‘나 잘났소’류의 자랑으로 비칠 수도 있다. 남 눈치 보면서 살 필요는 없으나 요즘 같은 오해의 전성기에 굳이 내 기호를 떠벌리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취향 자랑에도 관심 없다. 다 그럴 만하니까 자신의 기호 방향성이 생겼겠지. 자신의 멋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 걸 존중하고 응원한다. 대신 난 거기에 끼고 싶지 않다. 당장은 그렇다. 이른바 자신의 취향을 만드는 건 피곤하고 지난한 일이다. 내가 어떤 물건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나름의 일반론과 각론을 세우는 건 상당한 시간 낭비다. 나는 처음 독립할 때 다리미에 대해 두 달 정도 생각했다. 건식과 습식 중 무엇이 다리미의 에센스인가. 기능이 많아 편리한 게 좋은가, 기능이 적어 고장 확률이 덜한 게 좋은가. 브랜드는 무엇이 좋은가. 필립스와 테팔, 한국의 중소기업 다리미 중 어디에 기준을 두고 골라야 할까. 그 결과 어린이들이 ‘다리미’라고 말하면 단박에 떠올릴 법한 기본적인 생김새의 한국 중소기업 건식 다리미와 세탁용 분무기를 샀다. 사서 즐겁냐고? 글쎄. 바이오리듬 따라 그 물건이 예뻐 보일 때도 있고, 모든 게 지긋지긋할 때도 있다. 이런 품목은 끝도 없다. 나는 무늬와 가격, 엠보싱 모양과 종이 겹을 생각해 최적의 화장실용 두루마리를 고른다. 생수와 치약, 문 손잡이 등을 같은 방식으로 고를 수 있다. 성격상 이런 분류는 우치다 미쓰코와 루돌프 제르킨의 연주를 비교하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다. 동시에 종종 허무해진다. 나는 뭘 위해 이러고 있을까.

그렇게 낭비된 시간의 합이 지금의 나다. ‘1만 시간의 법칙’ 같은 걸로 보면 약 10만 시간의 시간 낭비를 한 셈이다. 의자에 앉아 원고를 쓰는 내 주변에 보이는 것들. 눈앞의 벽 재질, 오른편 벽에 붙은 타일 재질과 유약의 광, 내가 고른 가스 보일러의 용량과 브랜드, 그로 귀결된 이유, 부엌에 넣으려 했던 가열 기구의 스펙과 브랜드, 경우의 수와 나의 최종 선택. 모두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 전하기도 전에 지면이 끝났다. 두말할 나위 없는 낭비였고, 그 낭비에 만족한다는 말만 남긴다. 이제는 낭비를 해야 깨달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박찬용 〈아레나옴므플러스〉 피처 디렉터. 〈모던 키친〉 〈좋은 물건 고르는 법〉 등 대도시의 라이프스타일 및 소비 생활과 관련된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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