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시민들의 추모가 나를 살게 했다”

김용현,최수진,김윤 2024. 4. 14.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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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봄의 할 일] 생존자·유가족·잠수사…18인이 말하는 ‘세월호 10년’
4·16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14일 경기 안산시 단원고 4·16기억교실에서 추모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안산=최현규기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며 일으킨 고통의 파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생존자와 유족 등 18명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10년, 그 세월의 무게를 버텨왔다. 고통의 곁에 함께 머물러준 사람들과 회복, 치유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걸어온 시간이다.

침몰 전 학생들 웃음소리 못 잊어

화물기사로 세월호에 탔던 생존자 권상환(48)씨는 여전히 세월호 침몰 직전, 난간에서 학생들이 깔깔거리던 소리를 잊지 못했다. 참사 이후에도 생업을 멈출 수 없던 권씨에겐 배 비상구 옆에서 쪼그려 잠을 자는 습관이 남았다. “집안에서조차 불을 켜야 비로소 잠이 들 수 있다”던 권씨에게 지난 10년은 겨우 버텨온 세월이다. 권씨는 은퇴 후 시골에 가서 평화롭게 사는 꿈을 부여잡고 하루하루 삶을 견뎌내고 있다.
‘오송·이태원 보며 세월호 떠올라’

화물기사 최은수씨. 최씨 제공

화물기사 최은수(53)씨는 10년 전 이삿짐을 옮겨주기 위해 세월호에 올랐다. 가까스로 생존한 최씨는 참사 이후 화물기사 일을 3년 내리 쉬었다. 당시 배를 처음 타봤다던 이삿짐 화주가 시신으로 돌아온 충격이 컸다. 좋아하던 바다낚시도 할 수 없게 됐다. 2018년부터 다시 화물차를 싣고 제주도로 향하는 배에 오르고 있다. 최씨는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세월호가 계속 아른거려 괴로웠다”고 했다.

희생자 기억되길 바라며 마라톤

'파란 바지 의인' 김동수씨. 김씨 제공

‘세월호 파란 바지 의인’으로 알려진 생존자 김동수(58)씨는 참사 당시 현장에 남아 20여명의 목숨을 구했다. 그랬던 그가 참사 이후 삶의 희망을 놓고 싶다는 생각에 여섯 번의 자해를 했다. 끝없는 자책 속에서 고통의 10년을 보냈다. 잊히지 않는 당시 참상으로 괴로웠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외로움도 그를 엄습했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와 희생자들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며 매년 41.6㎞ 거리의 마라톤을 뛰고 있다.

“그날로 돌아가도 다시 배 안으로”

민간 잠수사 김상우씨. 김씨 제공

희생자 시신 수습에 나섰던 민간 잠수사 김상우(51)씨는 아직도 재활치료를 받는다. 바다에 잠긴 세월호 객실 문에서 수십 개의 짐이 김씨에게 쏟아져 목디스크가 왔기 때문이다. 바닷속 희생자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 매달 심리치료도 병행하고 있다. 그는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잠수복을 입고 배 안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들 추모가 날 살 수 있게 했다”

민간 잠수사 황병주(65)씨도 10년 전 바닷속 세월호에 뛰어든 첫날을 잊지 못한다. 유리창을 깨고 선실에 들어갔는데, 시야가 흐려 손을 더듬으니 희생자 3~4명의 머리가 잡혔다. 순간 눈물이 터졌다고 한다. 황씨는 세월호 수습 과정에서 오랜 잠수 탓에 한쪽 팔이 못쓸 지경이 됐다. 골괴사 판정이 나왔지만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했다. 황씨는 지금도 이틀마다 7시간씩 투석을 받고 있다. 더 많은 희생자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삶을 포기하려 했던 황씨를 지탱한 것은 ‘세월호 잠수사’라는 자긍심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세월호를 기억해주고, 함께 추모하는 것이 나를 살 수 있게 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게 ‘차별 없애라’ 숙제 남겨”

전 단원고 기간제 교사 김덕영씨. 김씨 제공

단원고 특수학급 기간제 교사였던 김덕영(46)씨는 참사로 동료 교사들과 제자들을 잃었다. 그는 일부 특수학급 학생들과 비행기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슬픔으로 주저앉을 틈은 없었다. 동료 교사 고(故) 김초원씨와 이지혜씨가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순직 인정이 불가하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3년의 세월을 싸워 결국 동료들이 순직을 인정받게 됐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 이전에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참사가 내게 ‘차별을 없애라’는 숙제를 남겼다”고 했다.

“친구들 살았다면 어떤 모습일지”

이제는 어엿한 의사가 된 최모(27)씨는 참사로 중학교 시절 붙어 다녔던 단짝 세 친구를 모두 잃었다. 모두 단원고를 간 친구들과 달리 최씨만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최씨는 “사고로 가족을 잃게 된 환자 보호자들을 보면 친구들 가족이 생각나 조금이라도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최씨는 “4월 16일이 다가올수록 이제는 볼 수 없는 친구들이 생각나서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꺼내게 된다”며 “그 착한 친구들이 살아있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지 늘 궁금했다.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부친 유품 배낭 보며 그리움 달래”

일반인유가족협의회 대표 전태호씨. 전씨 제공

전태호(47)씨는 참사로 아버지 전종현씨를 떠나보냈다. 아버지는 제주도로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가 사고를 당했다. 참사 이후 아들에게 남겨진 건 아버지가 세월호에 메고 탄 배낭뿐이었다. 전씨는 아버지와 같은 자전거 동호회원 유가족과 합심해 세월호 일반인유가족협의회를 만들었다. 대표를 맡아 ‘세월호 일반인 유가족 추모관’을 세울 수 있었다. 전씨는 “매일 추모관으로 출근해 유품관에 놓인 아버지의 가방을 바라보며 이제는 볼 수 없는 아버지를 그린다”고 전했다.

“웃으며 어머니 말할 수 있었으면”

김영주(49)씨는 참사 당시 어머니 신경순씨가 세월호에 탄 사실을 몰랐다. 어머니에게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떠나보낸 게 김씨의 마음에 대못으로 남았다. 김씨는 일반인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족한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며 지난 10년을 보냈다. 김씨는 “우리 일반인 유가족에겐 ‘잊는다’는 개념도 없다. 제대로 기억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도 김씨는 자전거 타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면 쉽게 쳐다보지 못한다. 어머니가 10년 전 김씨가 선물한 자전거를 싣고 세월호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웃으면서 어머니를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진상규명 넘어 ‘안전 사회’ 소망”

장준형군 아버지 장훈씨. 장씨 제공

단원고 희생자 장준형군의 아버지 장훈(54)씨는 “가난했던 삶 앞에서도 ‘우리 행복해질 거야. 힘내자’고 말하던 아들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농수산물센터에서 매입과 배송 업무를 하던 장씨는 참사 이후 생업을 내려놨다. 대신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대표로 나섰다.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진실을 찾는 게 그의 소명이다. 장씨는 4·16안전사회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진상규명을 넘어 이제는 대한민국이 안전 사회가 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안전과 생명 가장 우선시하는 대한민국 되길”

김도언양 어머니 이지성씨. 안산=김용헌 기자

단원고 희생자 김도언양의 어머니 이지성(50)씨는 세월호 참사 발생 5일 전 딸이 “나중에 엄마를 위해 전원주택을 지을래”라고 했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씨는 전원주택 대신 김양과 단원고 학생들이 공부하던 4·16기억교실을 보존한 4·16기억저장소를 만들었다. 이씨는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슬픔이 크지만, 이젠 이 희생을 기억해 안전과 생명을 가장 우선시하는 대한민국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참사 이후 사회적 약자에 눈 돌려”

문연옥(51)씨는 단원고 희생자 이태민군의 어머니다. 문씨는 참사 이후 사회적 약자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는 4·16가족협의회 봉사단과 매년 연탄을 나르고, 직접 김장을 해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문씨는 원래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그 말을 여기저기 전파하는 사람이 됐다. 문씨는 이제 새로운 가족이 된 다른 유가족들과 4·16공방을 운영하며 삶이 열악한 이들을 돕고 있다.
“언제쯤 아픔이 사라질까…” 공방서 바느질로 마음 다져

조은정양 어머니 박정화씨. 안산=김윤 기자

참사로 세상을 떠난 단원고 조은정양의 어머니 박정화(57)씨는 딸의 한마디를 잊지 못한다. 조양은 박씨에게 “내가 약사가 되면 4층짜리 건물을 짓고, 1층에서는 엄마가 하는 미용실을 차리자”고 말했다. 그는 4·16공방에서 딸과 꿈을 이룬 장면을 새긴 퀼팅 작품을 내보였다. 박씨는 “벚꽃을 볼 때마다 딸이 떠나가던 때가 생각나 언제부턴가 벚꽃이 피지 않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박씨는 언제쯤이면 이 아픔이 사라질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딸의 죽음을 자책하던 그는 딸을 향해 “18년 동안 엄마랑 같이 살아줘서 너무 고맙고 사랑한다”고 되뇌었다.

“내 삶이 참사 피해자에 위로되길

곽수인군 어머니 김명임씨(왼쪽에서 세번째). 김씨 제공

김명임(60)씨에게 단원고 곽수인군은 결혼 10년 만에 만난 늦둥이 아들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을 온몸으로 겪은 김씨는 “사람들이 흘리던 붉은색 피가 기억에 남았다. 반면 세월호는 바다에서 건져진 아이들의 창백한 흰색 피부로 잔상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극복하기 어려운 충격을 두 번 겪은 김씨는 이젠 아들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극단 ‘노란 리본’의 배우로 활동 중이다. 같은 처지에 있는 유가족 7명이 ‘집에만 틀어박히지 말자’라는 뜻에 모여 극단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다른 참사 피해자들에게 건네는 위로가 되길 바라고 있다.

“잊으면 반복될 뿐…기억해 주시길”

단원고 희생자 박성호군의 큰누나 박보나(30)씨는 사회복지사나 사제를 꿈꿨던 동생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박씨는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던 동생의 마지막 모습은 꽤 듬직했고 많이 의지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동생을 그리는 애도 일기를 쓰고, 전할 수 없는 편지를 적고 있다. 박씨는 “많은 분이 10년 전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아 주길 바란다”며 “잊으면 반복될 뿐”이라고 했다.
지난 10년간 유가족과 세월호 영상 남겨

문지성양 아버지 문종택씨. 안산=최수진 기자

문종택(62)씨는 단원고 문지성양의 아버지다. 문씨는 지난 10년간 세월호 유가족들의 영상을 남겨왔다. 유가족 곁에서 찍은 영상으로 문씨는 유튜브 4·16TV 채널을 운영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상실감에 힘들 때마다 문씨는 아내 안영미씨가 그린 딸의 운동화 그림으로 위안을 받는다. 문씨는 “딸이 유일하게 남기고 간 이 운동화가 집에 놓여 있는 장면은 다시는 볼 수 없는 소박하고 그리운 모습”이라고 했다. 그는 세월호 기록을 남기기 위해 또 한 번 거리에 나설 예정이다.

“딸 목숨값” 투쟁매도 막말에 상처

김영오(54)씨는 10년 전 처음 정규직이 됐다. 월급이 두 배 넘게 오른 김씨는 신난 마음에 따로 살고 있던 딸 유민양에게 소식을 전했다. “아빠 소원대로 대학에 꼭 가겠다”던 유민양은 수학여행을 떠난 뒤 돌아오지 못했다. 그 길로 김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투쟁에 나섰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46일간 단식농성을 벌이는 등 2년간 싸웠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딸 목숨값을 노리는 아빠’라는 상처뿐이었다. 그는 지금 비정규직 에어컨 수리기사로 일하며 딸을 그리워하고 있다.
“전국 행진 통해 시민들 공감 느껴”

김순길(57)씨는 세월호 참사로 단원고 수학여행을 갔던 딸 진윤희양을 잃었다. 김씨는 이후 농성과 촛불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다 4·16가족협의회 사무처장까지 맡게 됐다. 김씨는 전국에서 시민행진을 진행하면서 10년 전 함께 분노하고 아파했던 그 마음이 시민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김씨는 어제보다 행복한 오늘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용현 최수진 김윤 기자 fa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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