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인가 적인가…경외하면서 동시에 질투도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2024. 4. 1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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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과 졸라의 잔혹한 우정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원제: 세잔과 나)’, 2016년, 세잔과 졸라의 관계를 차분히 염탐할 수 있는 심리적인 영화다.
오랫동안 예술가 사이의 우정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을 살수록 결국에는 내 옆에 어떤 친구가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 아니 그것이 ‘전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한 인간은 타자들의 총합이라는 사실이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정신적, 영적으로 진화시켜줄 멘토 같은 친구를 만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서양문화사에 기념할 만한 우정이라면 폴 세잔과 에밀 졸라일 것이다. 현대미술의 선구자인 세잔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에밀 졸라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우정은 한결같지도 않았고, 항상 아름답지만도 않았다. 두 사람은 34년의 우정을 끝장냈다.

통상 세잔과 졸라는 졸라의 소설 ‘작품(1886년)’을 끝으로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고 알려져왔다. 두 사람의 결별 관련, 졸라가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개화하지 못하고 화실의 실패한 작품 앞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화가 주인공을 세잔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 따라붙는다.

두 사람의 유년으로 돌아가보자.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계다. 남프랑스 엑스(엑상프로방스) 출신 세잔(1839~1906년)은 모자 제조업을 하다 은행가가 된 부유한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고, 졸라(1840~1902년)는 파리에서 토목 기사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졸라는 아버지를 따라 세 살 때 엑스로 이주했다. 1852년 부르봉 중학교 시절 만난 두 사람. 공부보다는 자연과 문학의 자양분을 섭취했던 그들은 함께 수업을 빼먹으면서 사춘기의 불안과 자아 발견을 공유했다. 자주 서신을 교환하면서 지독한 인문학적 토론을 벌이는 등 예술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사실 청소년 시절 그들은 천재적인 면모를 지닌 존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두 사람 모두 대학시험에 실패한 둔재였다. 졸라는 국어 성적 미달로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실패했고, 세잔은 데생 실력이 좋지 않아 미술 대학 입시에 두 번이나 낙방했다. 주류에서 배제된 마이너리티 리그였기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일까.

두 사람은 성격과 기질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세잔은 거칠고 예의 없는 촌놈, 졸라는 세련된 매너를 갖춘 도시 남자. 세잔이 무뢰한이라면 졸라는 모럴리스트였고, 세잔이 자연과 야만이라면 졸라는 과학과 문명 그 자체였다. 다만 두 사람 모두 비사교적이고 타협할 줄 모르며, 항상 불안하고 고독했지만 사랑을 그리워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더불어 예술과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는 누구보다 강력하고 확고했다.

숨 막힐 정도로 과잉보호를 받았던 세잔에 비하면 아버지를 일찍 여읜 졸라는 매우 조숙했다. 그는 시종일관 세잔의 진정한 보호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했다. 졸라는 부친의 눈치를 보며 법학과 미술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세잔에게 화가로서 철저한 삶을 살도록 종용했다. 졸라는 세잔의 천부적 재능을 인정했지만, 그의 우유부단함, 게으름과 끈기 부족, 조급함과 변덕스러움을 가차 없이 힐난했다. 그러나 스스로도 무능하다고 생각했던 세잔은 친구의 충고를 자연스럽게 수용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뿐 아니라 졸라는 미술비평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미술계에 관심이 많았지만, 세잔의 작품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 채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세잔의 작품은 구입했지만 걸어놓지는 않았다. 졸라는 이에 대해 미술비평가로서 생존 작가의 작품은 벽에 걸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이라고 했지만, 세잔은 내심 서운했을 터. 졸라의 이 모호한 태도에는 세잔에 대한 우월감과 함께 불신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고 보여진다.

두 사람 사이는 졸라가 이미 30대에 성공 가도에 올라서고 호화롭게 결혼하는 1870년경부터 멀어진다. 세잔은 졸라가 순식간에 거머쥔 재산으로 온갖 고급 앤티크과 값비싼 양탄자가 깔려 있는 저택에서 하인을 거느리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것에 역겨움을 느꼈던 것 같다. 게다가 명성을 거머쥔 졸라를 만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져갔다. 이처럼 졸라의 이른 출세와 세잔의 더딘 성공은 둘 사이 우정에 금이 가게 만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품’은 비단 세잔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졸라가 화가라는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 글로써 세잔에게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작품’이 두 사람 결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잔은 자신의 평전을 쓰기 위해 엑스에 와 있던 화가이자 평론가인 에밀 베르나르에게 말했다. “졸라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그는 야박해졌고, 마지못해 나를 받아들이는 듯했지요. 나는 비위가 상해 몇 년 동안 그를 찾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작품’을 받아봤지요.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가 친구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어요. 결정적으로 그것은 거짓말로 가득 찬 형편없는 소설이었어요.”

사실 ‘작품’이 발표됐을 때,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 주인공 클로드가 마네 또는 모네, 그리고 피사로와 세잔, 심지어 졸라 자신을 합친 인물이라고 여겼다. 사실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세잔과 졸라는 ‘클로드’라는 인물에 대해 서로 자주 담론을 펼쳤던 것으로 봐 40대 후반 세잔이 주인공을 자신으로 여겨 분노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박홍규의 ‘반항과 창조의 브로맨스 에밀 졸라와 폴 세잔’ 참조). 남달리 문학의 조예가 깊던 세잔이 그렇게 소설을 단순하게 해독해냈을 리는 만무하다는 의미다. 그보다는 졸라가 ‘작품’ 출판기념회에서 소설 주제에 대해 “현대의 사상적 미학적 흐름 속에서 작업하는 어떤 화가도 소설가들이 성취한 것에 맞먹는 결과를 성취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 즉 화가 전체를 폄훼한 것이 세잔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평자는 두 사람의 결별이 ‘드레퓌스 사건(1894년)’ 때문이라고 본다. 특히 반유대주의가 만든 정치적 추문인 ‘드레퓌스 사건’에 가담했고, ‘나는 고발한다(1898년)’라는 서한으로 항변했던 졸라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노선을 걷고 있는 세잔을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다. 세잔은 나이가 들면서 보수적인 성향으로 바뀌었고, 졸라는 더 진보적인 성향이 돼갔다. 어쩌면 세잔이 먼저 변절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세잔은 엑스에 온 졸라를 만나고 싶었으나 “이미 죽은 사람을 만나서 뭐하냐?”는 지인을 통해 들은 졸라의 응수에 발걸음을 되돌리고 만다. 졸라로서는 젊은 시절 개혁의 의지를 품었던 동지를 잃었다는 자괴감에서 나온 안타까운 표명이었을 테지만.

과연 졸라는 오로지 정치적 입장이 다르고, 사회개혁의 의지를 잃어버린 세잔에게 크게 실망했기에 돌아선 것일까?

어쩌면 두 사람의 결별은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존재할지 모르겠다. 세잔은 승승장구하는 졸라가 힘겨웠고,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입지가 회의적인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너무나 지친 세잔은 낙향해 은둔한 성자처럼 자기 앞에 놓인 예술적 과제만에 몰입하고 탐구하는 편을 선택했다. 졸라에게 세잔은 언제나 수수께끼, 스핑크스, 불가해한 인물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같은 길을 가는 예술가로서 충분히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일 것이다.

에밀 졸라가 1886년 출간한 ‘작품’은 세잔과의 결별의 원인이 돼왔다고 알려져왔다.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4호 (2024.04.10~2024.04.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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