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골프 명언보다 멋진 사자성어 [정현권의 감성골프]

2024. 4. 12.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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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 남한강 금사면에 이포CC라는 골프장이 있다.

청정 호수인 금사호가 병풍처럼 둘러싼 숲속에 봄가을 진달래를 비롯한 형형색색 야생화가 만발하는 예쁜 골프장이다. 남한강 물줄기가 잠시 쉬어 가는 이포나루 여울목에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금모래와 강변이 정겹다.

소월이 그토록 그리던 고향 모습인가. 사금(沙金)이 많이 나와 금사(金沙), 봄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남한강을 오가던 뱃사공들이 이포(梨浦)라고 불렀다.

천혜의 경관을 배경으로 이포CC는 1992년 개장됐다. 산길로 물길로 발길 닿는 대로 소풍 길이다. 장성한 잣나무와 소나무 사이마다 야생화가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가장 높은 표고가 130m일 정도로 완만해 남녀노소에게서 사랑을 받는다.

스코어 카운트가 의미 없던 초보 때 가봤는데 홀마다 표지석에 한자로 사자성어가 적혀 있어 기억이 새롭다. 영어로 된 골프 명언과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다.

1번홀(파4)은 청운입지(靑雲立志)홀이다. 내리막인 데다 페어웨이가 넓어 드라이버를 마음껏 휘둘러 입신양명(立身揚名)하라는 의미다.

청운이라는 단어는 옛날 황희 정승과 맞닿아 있다.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자 젊은 황희는 지사들과 송악산 두문동에 은거했다.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조정의 간곡한 요청에 두문동 지사들도 황희만은 떠나서 새 나라를 도우라고 권한다. 떠나는 황희를 친구 정건천이 배웅하면서 시를 남긴다.

“그대는 청운에 올라 떠나가고/ 나는 청산을 향해 돌아가네/ 청운과 청산이 이에 갈라서니/ 눈물이 벽라의를 적시는구나”

2번 화조월석(花朝月夕)홀(파3)은 아침에 꽃피고 저녁에 달 뜨는 아름다운 코스라는 뜻이다. 남자들은 5번이나 6번 아이언, 여자들은 우드로 많이 공략한다.

3번홀은 외유내강(外柔內剛)홀이다. 골프에서 중요한 덕목이다.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파워와 스킬을 컨트롤하고 멘털을 다잡는 내공이 절대적이다.

주마가편(走馬加鞭) 4번홀은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할 정도로 끝까지 리듬과 멘털을 이어가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 연속 파4개(아우디)나 파5개(오륜기)를 잡을 때 하는 말이다. 연속 파6개를 지칭하는 단어는 XXX라는 유머도 있다.

5번홀은 인자무적(仁者無敵)홀이다.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는 사전적 의미인데 매너 좋은 골퍼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다고 해석하면 된다. 골프 고수보다 매너 고수가 더 존경받는다.

열녀춘향(烈女春香) 6번홀은 수절의 대명사 춘향에게서 나왔다. 이리저리 부딪치고 까여도 나를 떠나지 않는 공을 연상시킨다. 18홀 동안 원볼(One ball) 플레이를 하면 상처투성이 공과 애틋한 정이 든다.

7번홀은 다정다감(多情多感)홀이다. 잔잔한 연못이 있는 홀로 낭만과 여유가 있다. 문득 이 평화스러운 낙원에서 왜 전쟁(골프)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도 든다.

8번 칠전팔기(七顚八起)홀은 높고 낮은 봉우리가 겹겹이 펼쳐진 파란만장한 코스이다. 티샷, 아이언샷, 웨지샷, 퍼트 가운데 하나만 잘해도 지옥을 면할 수 있다.

지난주 험난한 여정 끝에 간신히 그린에 공을 올렸다가 완벽한 퍼트 하나로 귀중한 파를 잡았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9번홀은 새옹지마(塞翁之馬)홀이다. 골프는 삶처럼 변화무쌍해 길흉화복을 점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지난 성적이 좋았거나 나쁘다면 늘 그렇지 않으니 겸손해야 한다.

전반 마지막 홀에 걸맞은 이름이다. 실패는 겸손하지 못한 데에 기인하며 실패했다고 일어서지 않는 것 또한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0번홀은 권토중래(捲土重來)이다. 전반에 망가져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올라서라는 의미다. 전반에 50개, 후반에 36개를 치는 사람을 봤다.

이 사자성어는 해하전투에서 유방에게 패한 항우가 자결하지 않고 강남으로 넘어가 후일을 도모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당나라 두목(杜牧)의 시에서 유래했다. 흙먼지를 날리며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다.

11번 설상가상(雪上加想)홀은 신중하게 안전 플레이를 주문한다. 소나무, 해저드, 중앙의 대형 벙커, 그린 앞 중앙 벙커가 경쟁하듯 장애물이 도열할 때이다.

무리하지 말고 차분하게 또박또박 헤쳐 나가야 한다. 자칫하면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코스다.

건곤일척(乾坤一擲)홀인 12번 파3홀은 승부 홀이다. 흥망을 걸고 온 힘을 기울여 마지막 승부를 던질 만하다. 짧으면 해저드, 길면 벙커인데 긴 클럽으로 안전하게 온을 노린다.

13번홀은 좌고우면(左顧右眄) 홀이다. 어느 쪽을 향해 공을 날려야 할지 에이밍(Aiming)에 어려움을 겪는다. 프로 선수들은 슬라이스 코스인지 훅 코스인지 캐디에게 던지는 아마추어 골퍼들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 코스가 따로 없고 오직 정확한 에이밍과 스윙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14번홀은 양자택일(兩者擇一)홀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나무 위를 넘기는 고수의 길을 따르느냐 참고 돌아가는 하수의 길을 가느냐다. 뒷날을 도모할지 지금 승부를 걸어야 할지 고뇌에 빠진다.

15번 조강지처(糟糠之妻)홀은 티잉 구역(Teeing area)에서는 다소 좁아 보이지만 표시목인 소나무를 향해 치면 만사형통(萬事亨通)이다. 왼쪽 자연림이 울창한 넓은 코스와 잔잔한 마운드, 병풍처럼 둘러쳐진 신록이 아내처럼 포근하다.

16번 청산별곡(靑山別曲)홀은 아주 예쁜 홀로 티잉 구역에 올라서면 홀로 숲속에 있는 느낌이다. 코리아 판타지(Korea fantasia)홀이다.

17번홀(파3)은 아이고야(啞耳苦惹)이다. 그린 좌우로 패널티구역(해저드)이 도사려 골퍼들에게서 연신 “아이고야”라는 탄식이 나와 붙여졌다. 곡 소리 나는 해학적인 코스다.

18번 산정무한(山情無限)홀은 아름다운 자연을 음미하며 마무리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산정무한은 정비석의 내금강 기행문에서 따왔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였다. (중략) 소복(素服)한 백화(白樺∙자작나무)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남한강 뱃사공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지는 아름다운 이포CC를 다시 한번 찾고 싶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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