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 기행] 안필드 코앞에서 직관을 거부당한 사람과 'YNWA'

김희준 기자 2024. 4. 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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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홈구장 안필드.

[풋볼리스트=리버풀(영국)] 취재팀 막내인 김희준 기자가 처음 길게 쓴 휴가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PL) 직관 여행을 하고 왔다. 취재팀장은 휴가 기간에 아무런 업무지시를 하지 않았음을 굳게 맹세한다. 다만 휴가가 끝난 뒤 직관 후기를 당부했다. 그런데 리버풀 팬인 김희준 기자는 제일 중요한 경기관람에 실패했다며 값비싼 실패담을 제출했다. <편집자주>


안필드 개집표기에 티켓을 찍자 빨간불과 함께 경고음이 흘러나왔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2024년 4월 4일. 런던에서 리버풀로 가는 기차 안에는 리버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따로 좌석번호가 없는 기차였기에 리버풀 팬들은 자연스럽게 한 데 모여 리버풀에 도착할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화장실을 가다가도 리버풀 팬이 있으면 복도에 서서 한참 말을 주고받았다. 환승역에서 탑승한 한 노신사는 시장통같은 객차를 둘러보더니 "리버풀 경기가 있는 날이구만"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리버풀은 전 세계에서 축구 열기가 가장 뜨거운 도시 중 하나로 유명하지만, 의외로 리버풀 시내에서 그 뜨거움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시내 중심에 있는 라임 스트리트 역과 그 옆에 있는 현대적인 쇼핑센터, 역 앞에 있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성 조지 홀, 그밖에 어느 곳을 둘러봐도 축구를 연상할 만한 건물은 없다. 관광객들에게도 리버풀은 리버풀FC보다 비틀즈로 더 유명한 동네다.


리버풀 라임 스트리트역. 김희준 기자

그래도 리버풀 유니폼은 이곳에서 일종의 시민권처럼 기능한다. 빨간 유니폼을 입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이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버스정류장에서 딸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아저씨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안필드에 가는 버스를 친절하게 알려준 뒤 '리버풀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모두 내 친구'라며 웃어보였다.


안필드가 가까워지면 도로 중앙에 있는 가로등에 리버풀 대표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YNWA)' 가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다. 가사를 한 줄씩 담은 현수막이 거리에 늘어선 정경을 보면 리버풀에 왔다는 걸 비로소 실감할 수 있다.


경기가 있는 날에는 버스에 탄 대부분이 안필드 근처 정류장에 우르르 내린다. 절대 혼자 걸을 수 없는 환경이다. 아무리 초행길이라도 10분 정도 인파를 따라 흘러가다보면 손쉽게 안필드를 찾아낼 수 있다.


안필드에 도착한 건 경기 시작 약 한 시간 전이었다. 그즈음 하늘은 영국 날씨의 전형을 보여주겠다는 듯 먹구름이 지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안필드 주변은 활기가 넘쳤다. 삼삼오오 모여 핫도그와 맥주를 먹으며 경기를 볼 체력을 비축했고, 노점에서 산 머플러를 아이의 목에 둘러주는 가족도 있었다.


안필드 개찰구. 김희준 기자

그들을 지나쳐 안필드로 들어가는 개찰구 앞에 섰다. 보안요원에게 간단한 몸수색을 받은 뒤 회전문 앞에 섰다. 바로 옆에는 빨간 자동개집표기가 있었다. 바코드와 QR코드, NFC 카드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기기였다.


티켓을 넣자 불안한 경고음과 함께 빨간불이 켜졌다. 회전문을 돌려보려 했지만 철컹거리는 소리만 날 뿐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티켓을 넣었다. 이번에는 경고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티켓을 계속 넣어도 문이 열리지 않자 문 앞에 있던 직원이 밖으로 불러세웠다. 티켓을 확인하고 개집표기에 넣어본 뒤 '이걸로는 들어갈 수 없겠다'는 말을 했다. 매표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낭패였다. 경기장을 한 바퀴 빙 돌았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때마침 데이터통신도 터지지 않아 인터넷 검색조차 할 수 없었다.


경기장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암표상이 다가와 100파운드(약 17만 원)에 티켓을 팔겠다고 했다. 그가 내보이는 암표는 거무튀튀했다. 현금을 뽑아야 한다고 둘러대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사람이 바글바글하던 안필드 주변은 경기 시작 시간이 지나자 무서우리만치 고요해졌다. 보안요원을 제외하고 안필드 문밖에 남아있는 사람은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뿐이었다. 게이트 주변에 티켓을 내보이며 보안요원에게 입장을 애원하는 커플 한 쌍이 보였다. 요원은 아까와 같이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티켓을 든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안필드 바로 앞에 있는 펍에 들어섰다. 요즘 영국에서 보기 드물게 현금만 가능한 곳이었다. 신용카드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가려는 찰나 다윈 누녜스의 선제골이 나왔다. 경기를 스크린으로 지켜보던 팬들이 잔을 높이 들고 누녜스를 연호했다. 밖으로 나오자 고요하던 안필드에서 응원가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웅장하기는커녕 새소리에 가까워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경기장 바깥으로 어떤 소리가 흘러나온 건 그때뿐이었다.


빌 샹클리 동상. 김희준 기자

'YNWA'는 말 그대로 우리가 언제나 너와 함께 걷겠다는 응원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시련을 견뎌내고 꿋꿋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위로에 가깝다. 20세기 브로드웨이 뮤지컬 대표작 '회전목마(Carousel)'에 삽입된 뮤지컬 넘버로, 작중에서는 남편을 잃고 슬퍼하는 여자 주인공을 위안하는 노래로 나온다. 여자 주인공을 끌어안은 사촌이 "중요한 건 계속해서 살아나가는 거야(The main thing is to keep on living)"라는 대사로 그 직접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뮤지컬 넘버가 리버풀의 상징이 된 건 1963년의 일이다. 'YNWA'는 리버풀 출신 그룹 '게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Gerry and the Pacemakers)' 버전으로 편곡돼 리버풀 팬들의 큰 지지를 얻었고, 리버풀의 전설적인 감독 빌 샹클리는 이를 클럽이 평생 간직해야 할 모토를 담은 응원가로 낙점했다. 그리고 1965년 잉글랜드 FA컵 결승을 앞두고 이 노래를 공식 응원가로 선택했고, 리즈유나이티드와 결승전에서 팬들은 이 노래를 열창했다. 리버풀은 이날 구단 첫 FA컵 우승에 성공한다. 안필드에 세워진 샹클리 동상에는 "그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He made the people happy)"라고 적혀있다.


이후 리버풀은 영광스러운 붉은 제국 시절과 경악스러운 범죄였던 헤이젤 참사, 비극적인 힐스보로 참사를 거쳐 긴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팬들은 변함없이 경기 전후로 'YNWA'를 불렀다. 언제까지나 계속 걸을 것처럼 리버풀을 응원했다. 아마 셰필드전에도 경기장에 'YNWA'가 울려퍼졌을 것이다.


경기장에서 조금 떨어진 펍으로 가 경기를 시청했다. 사람들은 실점에 절망하고 득점에 환호했지만, 알렉시스 맥알리스터가 놀라운 중거리슛을 성공시켰을 때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코디 학포의 쐐기골이 나오는 걸 보고 펍을 빠져나와 숙소를 향해 걸었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은 안필드 주변 도로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맥주 살 5파운드(약 8,600원)를 달라는 사람을 뿌리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길을 홀로 걸었다. 거리에는 'YNWA' 가사가 적힌 현수막이 펄럭였다.


글= 김희준 기자


사진= 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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