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삼쩜영] '사교육 광풍' 속 불안한 시기, 이렇게 버텨 지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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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희 기자]
중학교 3학년인 아이는 많은 것이 신중하고 느린 아이였다. 사회화도 그랬지만 특히 학습 과정이 느렸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을 좋아해서 과학 잡지와 SF소설을 즐겨보며 다양한 과학적 지식을 축적했음에도 다른 과목은 관심 밖이었다. 문제집을 몇 번 풀다 그만두었고, 학원은 다녀보고 싶다고 해서 갔다가 재미가 없다며 일주일 만에 그만두었다. 인터넷 강의는 좋아해서 그것만 유료로 신청했다.
단어 6개를 물어보면 5개를 틀리는 영어, 동학년 수업을 간신히 따라가는 수학, 읽기 수준은 높지만 말하기와 쓰기 수준은 낮은 국어, 초등학생 수준에서는 넓고 깊은 과학 지식을 갖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적어도 과학 과목에서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아이였지만 1학기가 지나가기도 전에 과학을 포함한 모든 교과 과목 학습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선행 학습 마친 친구들, 순식간에 학습 흥미 잃어버린 아이
▲ 공부를 하고 싶지만 두려웠던 아이 아이는 공부를 하고 싶어 했지만 지나치게 빠른 주변 아이들로 인한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자신이 노력했을 때 따라잡지 못할 것에 대한 걱정도 컸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아이의 불안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아이처럼 불안했다. |
ⓒ 임은희 |
물리학자가 꿈이었던 아이의 장래희망은 여전했지만 자신감이 많이 줄어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고 하고 싶은 마음도 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사춘기가 아니면 언제 방황을 하겠느냐며 아이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하루 6시간~8시간씩 공부에 매진하는 주변 학생들을 보며 '왜 우리 집 아이만 방황을 하는 걸까' 싶어 내심 속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며 자유롭게 키웠던 초등학교 시기를 후회하기도 했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뭐라도 시켜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이 치밀었다. 그 상황이 되니, 새벽 2시까지 공부하느라 지쳐서 기운이 없는 동네 중학생들의 모습이 차라리 건강해 보일 지경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착실하게 학원 수업을 들어 문제집 풀이와 암기에 익숙해진 다른 학생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중학생이 된 내 아이를 믿지 못하는 부모였다. 아이에게 수시로 스마트폰과 스마트탭을 보여달라고 말하며 학업에 불필요한 콘텐츠에 너무 빠져들까 봐 전전긍긍했다. 아이는 기다려달라며 짜증을 냈고, 나 또한 불안해했다.
아이가 행복하라고 아이 선택을 존중했는데, 그 결과 아이는 행복해 보이지 않은 듯했다. 슬펐다. 공부를 억지로라도 시켰다면 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 괴로웠다. 아이 삶을 망친 것 같았고, 문제의 시발점이 나의 잘못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다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이 어쩌면 무책임한 방임은 아니었을까. 자책했다.
갈등이 극으로 치닫던 어느 날 아이와 함께 미술관을 찾았다. 오래전 한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동생에게 작품의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던 때처럼 아이는 즐거워 보였다. 그날 이후로도 우리의 갈등은 쉽게 사그라들진 않았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조금씩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도 이전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서히 달라졌다.
▲ 작품에 매료된 아이의 뒷모습 (2021년) 영유아 시절부터 중학교 3학년이 된 지금까지 우리는 꾸준히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는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의 작품 취향은 확고하다. 기하학적이거나 기계적인 것, 그리고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설치작품에 큰 관심을 보인다. 어쩌면 물리를 사랑하는 예술가로 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
ⓒ 임은희 |
중학교 2학년 기말고사 2주 전 아이가 말했다.
"과학자가 되려면 학교 공부도 필요할 것 같아. 어떻게 하는 거야? 학교 공부."
"국어는 지문을 잘 이해하고 수업시간에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요점정리를 하는 것이 중요해. 수업시간에 필기를 해둔 것이 있으니까 그걸 중심으로 살펴보고 문제를 풀며 오답을 중심으로 지문 분석을 하는 방법을 추천해. 영어나 한자 암기는 10분씩 쪼개서 아침저녁으로 짧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야.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보자."
나는 덧붙였다.
"수학은 교과서 증명 부분을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연습하고 서술형 수행평가 문제들은 암기가 아닌 이해하며 서술할 수 있어야 해. 기출문제를 꼭 풀어야 하고. 그런데 지금 말한 것들보다 더 중요한 건 필요성을 느끼고 꾸준히 공부하기로 한 너의 마음이야. 엄마는 너의 그 의지를, 노력을 칭찬해."
입시 공부를 해본 적 없는 아이에게 공부는 쉽지 않았다.
"과학은 재미있어. (문제집을 가리키며) 책도 재미있고 진도도 잘 나가. 그런데 하기 싫기도 해. 실험도 아니고 그냥 눈으로만 봐야 하는 거고 암기할 부분도 많으니까. 하다 보면 외워지는 것도 있는데 하기 싫은데 외워야 하는 내용도 있어서 힘들어.
그래도 좋아하는 과목이니까 참는 거야. 영어는 필요하니까 하는 거지. 난 꼭 외국 과학자들과 같이 일해보고 싶어."
▲ 초등학교 때부터 작성한 복기노트. 그날 배운 것만큼은 한 번 적어보고 지나갈 수 있도록 아이와 함께 꾸준히 작성했다. |
ⓒ 임은희 |
아이는 학원가에서 유명한 문제집 대신 자기 수준에 맞는 문제집을 골랐고 매번 단계를 높여나갔다. 하루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성적이 나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라길래, 괜찮다고 말했다.
"어떤 성적을 받더라도, 네가 애써서 열심히 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네 안에 남아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0점 맞아도 괜찮아. 결과는 남이 평가하는 거니까 네가 선택할 수 없는 거지만, 과정은 전부 너의 선택이잖아. 과정에 집중하며 미래에 더 성장할 너를 상상해 봐."
대학 가면 다 끝?... 불안해도 아이를 기다려주는 일
멕시코와 백년초를 주제로 한 전시를 감상하던 날 아이에게 물었다.
"어떤 물리학자가 되고 싶어?"
"멋진 걸 연구하고 싶어."
"멋진 게 어떤 건데?"
"우주의 근원에 대한 연구 같은 거? 요즘은 화학도 좋아."
"프리츠 하버 같은 과학자는 어때?"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편에 서서 독가스를 제조했다.)
"그 사람은 살인자잖아! 그런 과학자 말고 안드레 가임 같은 재미난 과학자나 스티븐 호킹처럼 꾸준히 연구하는 과학자가 더 멋져 보여."
▲ 아이의 미술 과제물(2022) 늘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는 중학생이 되자 인공지능과 천체물리학에 큰 관심을 보였다.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를 읽고 다차원 공간을 동생에게 설명했다. 학교 수업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인공지능이나 데이터사이언스와 관련한 교내 과학특별활동은 꼭 참여했다. |
ⓒ 임은희 |
학업의 끝이 대학입시인 것처럼 여겨지는 교육체계 안에서 아이가 스스로 한 발을 내디디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남들보다 빨라야 살아남을 것처럼 여겨지는 경쟁사회에서 살고 있는 어른들에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려운 결정을 하거나, 고민하고 있는 부모들에게 '괜찮아요'라는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다. 우린 잘하고 있다고, 꽤 괜찮은 부모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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