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9단' 태종-정조, 역사적 평가 바꾼 후계자 문제

이준목 2024. 4. 1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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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이준목 기자]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조선 3대 국왕 태종(太宗) 이방원과 22대 정조(正祖) 이산은, 각각 조선 전기와 후기를 대표하는 군주로 드라마틱한 역경을 이겨내고 왕좌에 올랐던 인물이다. 권력 앞에서는 정적과 충신, 가족까지도 가차없이 숙청했던 비정한 태종, 개인사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인자한 성군으로 남은 정조, 이미지는 서로 다르지만 두 국왕의 공통점은 남다른 정치력과 리더십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켰다는 점이다.

태종과 정조가 만일 현재의 인물이라면 과연 누가 더 '정치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지금 이 시대에 필요로 하는 리더십은 과연 누구일까. 4월 10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03회에서는 '숙청의 킬방원, 정적에게 보낸 비밀편지? 태종과 정조는 어떻게 절대 왕좌을 차지했나'편을 통하여 조선사를 대표하는 두 군주의 리더십과 정치기술을 조명했다.

태종과 정조, 두 국왕은 모두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강력한 '정적'들을 연이어 극복해야만 했다. 태종이 성장하던 시기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난세로써 아버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는 고려 말을 대표하는 신흥무인세력이었고, 정도전(鄭道傳)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아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했다.

태종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던 정몽주(鄭夢周)를 암살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지만, 이로 인하여 정작 건국 이후에는 아버지 태조의 냉대를 받았다. 태조의 둘째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는 개국공신 정도전과 손을 잡고 자신의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기 위하여 걸림돌이 되는 태종과 이복형제들을 경계했다.

역사상 손꼽히는 난세, 태종의 선택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태종과 신덕왕후-정도전의 관계는 본래 우호적이었다. 신덕왕후는 8살에 개경으로 유학 온 어린 태종을 돌봐줬고, 태종 역시 신덕왕후를 어머니로 섬겼다. 정도전과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는 함께 협력했던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건국 이후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싶었던 신덕왕후의 야심과 신권정치(神權政治)를 추구했던 정도전의 정치철학이 손을 잡게 되면서, 야심이 많고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태종과는 서로 정치적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결국 태종은 1398년 왕자의 난(戊寅定社)를 일으켜 정도전 세력을 숙청하고 이복동생인 이방석, 이방번까지 모두 살해하며 권력을 장악한다. 신덕왕후는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이미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태종은 이후 형 정종(定宗)을 먼저 왕위에 올려 일종의 징검다리로 삼은 뒤, 2년 뒤인 1400년 마침내 조선의 3대 국왕에 즉위한다. 태종은 정도전을 역적으로,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격하시켜 사후에도 철저한 정치보복을 가했고 이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조선 후기에야 겨우 복권될 수 있었다.

이처럼 태종은 정적들에게 가차없는 숙청으로 인하여 현대까지도 '킬방원'으로 불릴만큼 비정한 이미지가 굳어졌다. 하지만 태종가 살았던 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손꼽히는 난세였고, 상대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내가 제거당할 수밖에 없는 배틀 로얄의 시대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정조는 세손이던 어린 시절 할아버지 영조(英祖)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이라는 큰 비극을 겪어야 했다. 이는 정치적으로 정조의 정통성에도 큰 흠집을 남겼다. 정조는 영조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이면서 동시에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모순적인 입장에 놓인 것이다.

정조의 반대파들은 '죄인지자 불가승통(罪人之子 不可承統, 죄인의 아들은 왕위 계승이 불가하다)'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정조가 후계를 이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임오화변을 막지 못 했던 영조의 척신(戚臣)과 노론(老論) 세력들, 정조의 고모였던 화완옹주 등은 만일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후계를 이을 경우,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어서 정치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특히 외척인 홍인한은 노쇠한 영조가 말년에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기려고 하자 "세손은 노론도 소론도 알 필요가 없고 조정의 일은 더 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노골적으로 공식 후계자의 집권을 반대하는 대역무도한 망언을 내뱉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는 이러한 정적들의 공격에 일일이 대응하기보다 묵묵히 학문을 닦고 수양에 집중하며 겸손한 처신을 보였다. 영조는 그러한 손자 정조를 전폭적으로 신뢰했고, 그를 죄인인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는 방식을 통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겠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1776년 영조가 83세의 나이로 승하하면서 정조는 마침내 조선 22대 국왕에 즉위한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태종과 정조의 즉위사를 살펴보면 두 국왕의 각기 다른 정치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태종은 '나를 책봉해 세자로 삼고 감무의 책임을 맡기었는데 감내하지 못 할까 두려워 매양 조심하고 송구한 마음을 품었다. 두세 번을 사양하였으나 이루어진 명령을 돌이킬 수 없었다'고 밝혔다.

실제로는 본인이 쿠데타를 주도하여 왕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형님(정종)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오른 것'이라고 포장하는 정치적 수사였다. 숱한 피를 보며 권력을 장악했던 태종이지만, 한편으로 그래서 더욱 민심을 의식하는 것이 절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정조는 즉위사에서 그 유명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그런데 정작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불령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을논한다면 선대왕의 분부대로 형률로써 논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할아버지 영조의 유훈을 받들어 정치를 이어가겠다는 것과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숭(追崇, 왕으로 높이는 것)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뭔가 앞뒤가 안맞는 정조의 즉위사를 두고, 오늘날 학계에서는 중의적인 의미가 담긴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실 정조의 본심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복권시키고 싶다는 속내가 강했지만, 할아버지 영조의 유언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노론세력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조는 먼저 본인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이를 이용하여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도 동시에 선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던 정적들에게는 '내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잊지 말라'는 경고로도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방해되는 정적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태종과, 끝까지 버티고 '인내'한 끝에 왕위에 오른 정조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인내한 정조의 선을 넘지 않은 숙청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숙청'에 있어서 한 번 결심하면 철저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태종과 정조의 공통적인 정치스타일이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등극에 공을 세운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등 공신과 외척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심지어 세종의 외척인 심온마저도 역적이라는 누명을 씌워 제거했다.

이는 공신들의 권력이 너무 크게 되면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감당해야 할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커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이들까지 '정치공작'을 통한 예방 숙청을 당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태종의 과오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태종의 공신 숙청은 그 뒤를 이은 세종이 안정적인 왕권 위에서 수많은 찬란한 업적을 쌓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정조도 자신의 즉위에 반대했던 홍인한, 정후겸, 화완옹주 등을 차례로 숙청해야 했다. 하지만 정조는 이 과정에서 '사도세자와 관련된 개인적 복수'는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당사자들이 실제로 저지른 과오와 신하들의 요청 수용에 따라 합당한 절차를 거쳐 숙청의 명분을 확보했다. 또한 정조는 자신의 암살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친 범인과 일가족 20여 명을 처형했으나 그 이상 옥사가 정치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으며, 빠르고 단호하지만 절대 선을 넘지 않는 숙청의 기준을 지켰다.

권력을 장악한 뒤에 필요한 것은 나라를 운영하는 '통치술'이다. 태종은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여 모든 국정을 왕이 직접 주도하면서 왕권을 강화했다. 태종은 수도를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재천도하고 청계천을 건설하여 민심을 다독이며 오백년 왕실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처럼 태종이 비정하고 잔혹했던 권력찬탈방식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명군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차지한 권력을 혼자만의 이익을 위하여 남용한 것이 아니라, 아들 세종과 그 후대까지 이어질 수 있는 치세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정조 시대의 가장 큰 현안은 극심한 '당파간의 갈등'이었다. 조정을 장악한 노론세력중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은 시파(時波), 반대파는 벽파(僻波)로 불렸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반대파를 배제하기 보다는 포용과 합의를 통한 통치를 추구했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정조만의 통치기술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비밀편지'다. 정조는 사실상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벽파의 수장 심환지(沈煥之)와 여러 차례 비밀편지를 주고받으며 정국 운영을 함께 논의했다.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서라도 정적과 소통을 이어가며 갈등을 조율하려고 했던 정조의 의지를 보여준다.

정조는 항상 비밀편지를 다 읽고 난 후에는 파기할 것을 당부했지만, 심환지는 만일을 대비하여 편지를 몰래 보존해놓았고 후대에 무려 300여 통에 이르는 정조의 비밀편지가 알려질 수 있었다.

또한 정조는 비밀편지에서 진지하고 근엄한 정치적 내용만이 아니라 사적인 고민이나 농담, 비속어를 종종 사용하기도 했다. 1798년 심환지와 주고받은 비밀편지에서는 한문으로는 표현이 어려운 '뒤죽박죽'을 한글로 써놓는가하면, 마음에 안 드는 한 신하를 가리켜 호종자(胡種子, 호로자식)라는 걸쭉한 욕설로 뒷담화를 한 내용도 등장한다.

심지어 오늘날의 휴대폰 문자메시지에서 'ㅋㅋ'같은 웃음소리에 해당하는 가가((呵呵)라는 표현을 버젓이 써놓기도 했다. 흔히 진지하고 학구적인 성군 이미지가 강한 정조가 의외로 소탈하고 격정적이고 유머감각도 있는 인간적인 군주였음을 보여준다.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가 담긴 수원 화성을 건설하고 일 년에도 몇 번씩 행차했다. 또한 왕의 행차 때마다 격쟁(擊錚) 제도를 활성화하여 억울한 일을 겪은 백성들이 직접 임금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 민심을 경청하려고 했다. <국조보감>에 따르면 정조는 격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저 말할 곳 없는 백성들이 억울함을 가슴에 품고 부모에게 달려와 하소연하듯 하는 것은 그렇게 만든 자가 잘못인 것이지, 저들에게는 정말 죄가 없다"며 감쌌다고 한다. 정조의 애민정신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또한 정조는 1783년 조선 역사상 최초로 구체적인 어린이 관련 법령을 정하며 흉년과 기근으로 갈 곳 없는 10세 이하의 고아들을 국가와 지방수령이 관리하는 '현대판 돌봄정책'을 시행했다. 정조의 이러한 정책은 오늘날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어린이 복지정책들의 모태가 되었다.

이처럼 나란히 정치 9단이었던 태종과 정조의 평가가 가장 갈리는 부분은 역시 '후계자' 문제였다. 태종은 적장자였던 양녕대군이 군주로서의 자질이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자 과감히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후계자로 낙점했다. 태종은 생전에 상왕으로 물러나 4년간 세종의 왕권강화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태종의 강력한 지원과 후계구도 정리작업 덕분에 아들 세종은 조선의 태평성대를 활짝 열 수 있었다.

반면 정조에게는 유일한 후계자가 외아들 순조(조선 23대 국왕)밖에 없었다. 정조는 생전에 태종처럼 아들 순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날 것을 염두에 두고 수원 화성까지 건설했다. 하지만 정조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후계 구도를 준비할 시간이 촉박해졌다. 정조는 결국 순조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이 믿고 있던 측근 김조순(金祖淳)을 정치적 보호자로 낙점하고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아 외척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이는 훗날 조선을 몰락으로 이끄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는 원인이 됐다. 어쩌면 본인이 척신정치의 최대 피해자이자 척신들을 혐오했던 군주가 정조였음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하다. 특정 가문이 당파를 넘어 국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서 부정부패가 극심해지고 조선의 왕권과 정치체제는 나락으로 치닫게 된다. 실질적으로 조선에서 정상적인 왕권을 행한 마지막 군주로서 정조의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태종과 정조는 각자 처한 시대의 격랑 속에서 국왕으로서의 책무와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그들 모두 나름의 성과도 과오도 있었지만 그들이 남긴 역사적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후대에 올바른 정치 리더십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귀중한 교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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