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일구듯… 국립현대미술관 사상 첫 바닥 전시

손영옥 2024. 4. 9.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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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여성 조경가 정영선展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조경의 대모' 정영선의 족적을 조명하는 개인전 '정영선 : 이 땅에 숨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를 지난 5일 식목일에 맞춰 서울관에서 개막했다. 농부의 마음으로 정원을 조성해온 조경가의 철학과 태도를 관람객이 공감할 수 있도록 전시장 바닥에 진열장을 설치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백일장에서 상을 싹쓸이하다시피 한 문학소녀 정영선(83)은 국어 교사였던 아버지의 시인 동료 교사 박목월의 사랑을 받았다. 박목월은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시가 교과서에도 실린 국민 시인이다. 박목월은 글재주 있는 친구 딸을 아껴 기를 살려주겠다며 새 시집이 나오면 일부러 정영선이 다니는 여고로 시집을 보내주기까지 했다.

부모는 정영선이 대학을 갈 때 당연히 문학을 지망할 줄 알았다. 경북대 영문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던 딸은 엉뚱하게 서울대 농대를 가겠다고 했다. 남자만 득시글거리는, 술만 퍼마시는 농대를 간다고? 그것도 서울로? 어머니가 반대했지만, 딸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모녀가 각각 단식투쟁을 벌이는 희한한 대치를 중재해준 이는 박목월이였다.

“얘(정영선)는 농대를 가도 잘할 아이야.”

정영선에게 시보다 더 좋았던 것은 땅이다. 흙에서 꽃 피우고 열매 맺는 식물이었다. 아버지 직장인 학교 사택에서 처음 정원을 조성하며 느꼈던 기쁨은 그렇게 소녀의 심장에 깊이 박혀 평생의 항로가 되었다.

서울대 농대에 진학한 그 소녀는 훗날 한국 1세대 조경가로 우뚝 섰다. 1970년대 산업화 시대를 통과하고, 88올림픽 세계화 시대를 거쳐,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한국근현대 조경 역사의 산증인이 됐다.

관람객이 땅을 밟듯이 진열장 위를 걸으며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조경의 대모’ 정영선의 족적을 조명하는 개인전 ‘정영선 : 이 땅에 숨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를 서울 종로구 삼청로 서울관에서 지난 5일 식목일에 맞춰 개막했다. 순수미술 중심의 국립현대미술관이 건축에 종속된 것으로 여겨진 조경을 전시 주제로 내세운 것은 처음이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최근 수년간 자수, 섬유 공예 등 순수 미술의 하위로 취급되어온 장르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행보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 고무적이다.

정영선 조경가의 조경 프로젝트들. 이번 전시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종친부 앞에 조성한 정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서울대 농대 입학 이후 정영선의 삶을 들여다보자. 외도는 졸업 후 여성 잡지 ‘주부생활’ 기자로 몇 년 일한 게 전부다. 이후 그의 삶은 조경과 함께 했다. 서울대에 환경대학원이 생기자 환경조경학과 1회 입학생이 됐다. 졸업 후 청주대 조경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로는 강단과 현장 양쪽에서 활동하며 한국의 조경사를 써왔다.

도대체 정영선이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970년대 환경대학원에 다니면서 불국사, 현충사 등 국가적 조경사업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아시아선수촌아파트와 예술의전당, 국립수목원(1984), 올림픽선수촌아파트(1987), 정부대전청사(1992),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1996), 국립중앙박물관과 여의도샛강생태공원(1997), 서울올림픽미술관(1999), 청덕궁 낙선재(2006), 광화문광장 재정비(2009), 경춘선 숲길과 서울식물원(2014∼2016) 등 관이 발주한 굵직한 조경 프로젝트마다 발을 담갔다.

삼성 호암미술관 전통 정원 '희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민간에서도 끊임없이 호출했다. 아산재단 서울종합병원(1994), 휘닉스파크 리조트, 우방랜드(1995), 오크밸리(1996), 삼성 호암미술관 전통 정원 ‘희원’(1997), 대명 비발디파크(2003), SK텔레콤 을지로사옥(2004), 현대중공업 영빈관(2009), 제주 오설록 티하우스(2010),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2011), 남해 사우스스케이프 골프장(2012), 북촌설화수의집(2022)…. 또 미국 뉴욕주 원불교 원다르마센터 등 해외에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여의도샛강 생태공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에는 60여개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대한 정영선 조경가의 아카이브 대부분이 최초로 공개된다. 파스텔, 연필, 수채화 그림, 청사진, 설계도면, 모형 등이 나왔다. 하지만 그래봤자 밋밋하기 십상인 아카이브(자료) 전시다. 회화도 조각 전시도 아닌 이런 조경 전시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아무리 엄청난 족적이래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가 문제다. 그가 설계했다는 정원의 흙을 통째 떠서 가져올 수는 없는 일이다.

전시팀은 일단 주제를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가능한 역사 쓰기’, ‘세계화 시대, 한국의 도시 경관’,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생활’, ‘정원의 재발견’ 등 7가지로 나눴다. 그리고 이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바닥과 벽면, 영상의 3종 세트를 활용했다.

우선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벽면에 그가 조경을 설계한 프로젝트 가운데 우리에게 친숙한 장소의 사진을 사진작품처럼 걸었다. 또 천장 바로 아래는 사각의 전시장을 띠처럼 빙 두르며 풍경 영상이 흐르도록했다. 때로는 새소리, 바람 소리도 들려 현장에 서 있는 기분을 준다.

광화문광장 재정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가장 놀라운 발상은 바닥에 전시를 했다는 점이다. 땅을 격자화한 듯 사각의 틀 안에 현대중공업 영빈관, 벽제기념관, 석파정 등 프로젝트 별로 도면과 드로잉 등을 담았다. 강화유리를 밟고 몸을 수그린 채 유리 안에 전시된 도면과 사진 등을 보는 것은 생경하면서도 묘한 감동을 줬다.

공간을 디자인한 김용주 전시운영디자인 기획관은 “조경가는 설계만 하는 게 아니라 꽃을 심었을 때 꽃을 피우는 방향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조경가가 정원을 가시화하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고 땅에서 보낸 시간을 관람자들도 낮은 자세로 보면서 상상하고 공감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조경가가 일하는 태도가 전시의 형식이 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이처럼 바닥이 진열장이 된 것은 처음이다.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의 조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안쪽 두 번째 전시장에는 정영선이 사랑하고 심었던 식물, 특히 자생식물 사진을 붙였다. 완전히 붙인 게 아니라 끝 부분이 살짝 들려 마치 덩굴식물처럼 살아움직이는 느낌이 난다.

조경철학을 엿볼 수 있는 실제 조경이 전시에서 빠질 수는 없다. 다만 전시장 안에는 유기물을 설치할 수 없는 만큼 미술관의 중정과 야외 종친부 건물 앞마당에 구현했다. 미선나무 등 자생식물로만 심었다. 해가 비치는 방향까지 고려해 식물을 심었다고 이지회 학예연구사는 귀띔했다.

종친부 앞마당의 조경은 정면의 인왕산 뷰를 ‘차경’(풍경을 끌어들임)할 수 있도록 고려했다. 마침 진달래가 분홍 꽃을 피워 우리 산 느낌이 물씬 났다. 그곳에 서니 정영선이 기자간담회에서 이야기한 조경 철학이 떠올랐다.

“한국의 전통 정원은 중국, 일본과 달라요. 내가 사는 주변이 전부 높고 낮은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울타리를 낮게 해 주변의 경관을 내 것으로 끌어들이는 차경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나의 조경은 자연을 대하는 우리 전통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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