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한 순간 [조남대의 은퇴일기㊾]

데스크 2024. 4. 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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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이때쯤이면 마음속에서는 들로 산으로 나들이 가자고 보챈다. 누구나 가볍게 떠날 수 있는 것이 등산이 아닌가 한다. 체력도 단련하고 기분 전환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자주 가지만 소홀한 준비와 신중하지 못한 행동으로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우리 인생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남한산성 주변을 등산하는 시민들
남한산성과 등산객

신혼 초에 아파트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시절이라 휴일만 되면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여 들로 산으로 많이도 다녔다. 하루는 아내와 남한산성으로 등산하러 갔다. 벌써 40여 년 전의 일이다. 초입에서 남한산성까지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여 힘이 들지만, 젊은 혈기로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산에서 취사가 허락된 시절이라 배낭에는 코펠과 버너, 쌀과 부식까지 그득했다. 배낭 위에는 조리할 때 쓸 물을 가득 담은 고무통을 얹고 남문을 지나 수어장대를 향하여 경사길을 올라간다.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짐꾼이 따로 없다. 아내는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부르며 살랑살랑 따라온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신랑은 저렇게 힘들게 올라가는데 빈손으로 따라간다."며 혀를 끌끌 차면서 "요즈음 젊은 여자는 염치가 없다"라며 한탄하신다. 할머니 눈에는 몹시 못마땅해 보였던 모양이다. 나들이 기분에 도취되어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깜빡한 채 따라오던 아내는 염치없는 여자라는 소리를 듣고는 얼굴을 붉히며 배낭 위에서 물통을 내려 든다. 남편은 하늘, 아내는 땅으로 치부되었던 시절에 살았으니 그리 보였을 것이다. 지금이야 감히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수 있으랴. 남자의 위신을 생각해서 힘은 좀 들었지만 올라갈 만했었는데 할머니의 꾸지람이 나의 수고스러움을 덜어주었다. 그 이후 아내 등에도 자그만 배낭 하나가 생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관악산 연주대

관악산이 집에서 멀지 않아 등산을 자주 다녔다. 서울대 정문 옆으로 올라가 점심시간 맞추어 삼막사나 연주암에 도착하면 무료로 주는 국수를 먹기 위한 줄이 기다랗다. 한참을 기다려 먹었던 국수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침이 고인다. 아들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 관악산으로 가족 산행을 하였다. 아들은 다람쥐처럼 뛰어다닌다. 한참을 앞서가서는 올라오는 우리를 기다리기를 반복하더니 결국에는 주저앉는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가 떠오른다. 좀 더 올라가 무너미고개까지 가서 잠시 쉬다가 내려왔다. 배가 매우 고팠으나 집 근처에서 식사하기 위해 동네로 자동차를 달렸다. 아침 일찍 떠나서 너덧 시간 등산했으니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옆에 앉은 아내와 뒷좌석에 있는 아들딸은 꿈속으로 떠난 지 오래다. 나도 졸음을 참으며 겨우 집 근처까지 와서 신호등이 앞에 보이는 것 같아 속도를 줄였는데 그 짧은 순간에 깜빡했던 모양이다.

'쾅'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브레이크도 밟지 않고 정차해 있는 앞차를 그대로 추돌했다. 앞 좌석에서 안전띠를 매고 있던 나와 아내는 괜찮은데 뒤에서 그냥 졸고 있던 딸은 의자 밑바닥에 떨어져 있고, 아들은 앞 좌석 뒤에 이마를 부딪쳐 피가 흐른다. 아내가 아들 이마를 지혈하고 있는 사이 바깥으로 나갔더니 앞차 두 대에 타고 있던 여러 명이 목을 잡고 나오는 것을 보고는 일이 크게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깜빡한 순간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보험회사에서 이천만 원 정도의 보험금을 지급했다는 통보를 받고 깜짝 놀랐다. 앞에 정차한 두 대의 승용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보험금이 많이 지출되었다고 한다. 자동차 보험료가 엄청나게 인상된 것은 당연했다. 그때 꿰맨 아들 이마의 흉터를 볼 때마다 끔찍했던 악몽이 떠오르곤 한다. 그 이후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든지, '잠깐 졸음은 영원한 잠' 이라고 하는 경구를 늘 새기고 있다. 졸음 신호가 오면 무조건 자동차를 세워놓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는 습관을 얻은 것은 큰 소득이다.

관악산 삼막사

사람들은 새해 첫날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마음을 새롭게 다지고 바라는 것을 기원하기 위해 일출 명소를 찾는다. 다양한 장소가 있지만,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만큼 적격인 곳도 없을 것이다. 서울에서 새벽 4시에 도시락을 싸서 초등학생인 아들딸과 함께 올라갔다. 어두운 새벽이라 모자에 라이트를 켜고 녹은 눈이 얼어붙어 번들거리는 돌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차가운 날씨이고 빙판길임에도 사람들로 붐빈다. 대단한 열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개가 자욱하여 일출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우려를 안고 올라갔다.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조선 시대 남명 조식 선생이 지리산 기슭에서 지내다 명종 승하 소식을 듣고 지었다는 시조가 떠올랐다.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진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라는 내용처럼 희미한 볕이라도 봤으면 덜 아쉬웠을 텐데. 찬란한 일출을 보며 희망찬 새해의 꿈을 심어주려고 했는데 '구름 낀 볕뉘'조차 보지 못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조식 선생의 마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니산 눈 쌓인 등산길의 돌계단

얼어붙은 돌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더 위험하고 힘들다. 그 많은 계단을 기다시피 조심스럽게 내려오던 아내가 아차 하는 순간 발을 잘못 디뎌 끝내 미끄러지고 말았다. 팔로 짚어 아픈 것 같은데 크게 내색을 하지 않는다. 등산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는 것 같다. 주차장까지 내려와 집에서 준비해간 도시락을 야외탁자에서 먹었다. 엄마는 팔을 다쳐 심각한데도 아이들은 추위에도 아량곳 하지 않고 맛있다며 잘도 먹는다. 돌아오는 길에 곧바로 병원에 들렀더니 손목에 금이 가서 깁스하고야 말았다. 새해 첫 태양의 기운을 받으려다 불상사를 당했지만, 액땜한 것이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되돌아봐도 정월 초하루 그 추운 새벽에 어린 애들을 데리고 참성단에 오를 생각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 안 된다. 젊음이 부른 만용이 아닐까.

마니산 참성단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등산도 있었지만 즐거웠고 행복했을 때가 더 많았지 싶다. 등산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고된 길은 인생에서 마주치는 도전과 응전을 상징하기도 할 것이다. 순간의 방심과 잘못으로 큰 사고를 겪기도 한다. 순간순간이 모여 인생이 되듯이 그 짧은 찰나가 인생의 방향과 성패를 가를 수도 있다. 매 순간 신중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이 또한 우리 아니겠는가. 찬란하지는 않지만, 빛을 향한 자세로 꾸준히 걸어 오늘에 이르렀다. 내일도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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