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행군' 같이한 60대 어머니의 한 맺힌 사진 한 장

구교형 2024. 4. 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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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정의·자유를 위한 해병대 700km 연대의 행군' 참가기

[구교형 기자]

 지난 6일 생명·정의·자유를 위한 해병대 700km 연대의 행군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
ⓒ 구교형
 
일반인에게 '해병대' 하면 베트남전의 귀신 잡는 해병, 공원이나 공유지 한쪽에 엉뚱하게 자리 잡은 해병전우회 컨테이너, 우익집회에 선명하게 보이는 빨간 명찰 등으로 쉽게 기억된다. 모두 냉전 시대의 유산을 잔뜩 머금은 이미지다.

그런데 지난 주말 해병 출신도 아닌 내가 뜻밖에 예비역 해병들의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지난달 말 '생명·정의·자유를 위한 해병대 700km 연대의 행군'이라는 행사를 주관하는 이로부터 갑작스레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해 여름, 구명조끼 등 최소한의 보호장비도 주지 않은 채 경북 예천의 수해 복구작업에서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 '고 채상병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그 진실을 밝히려다 오히려 항명 및 상관 명예훼손 혐의를 뒤집어 쓰고 보직 해임되어 재판을 받는 박정훈 대령(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명예 회복을 촉구하기 위한 행사다. 박 대령의 군 동기들인 해병대사관 81기 동기회에서 주관한다.

행군은 올해 2월 3일 김포 해병대 2사단을 출발하여 채 상병의 안장지인 대전 현충원과 사고 발생지인 경북 예천을 거쳐, 내년 1월 3일 포항 해병대 1사단까지 총 700km를 걷는 힘겨운 여정이다. 지난 4월 6일 3차 행군에서는 단지 해병대 관련자만 아니라 민주화를 위해 수고했던 사람들, 일반 시민과 종교인도 초대하여 채 상병 사건과 또 다른 의문사의 희생자들을 함께 추모하는 연대 행진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 참여할 가톨릭 신부와 불교 스님은 찾았는데 개신교 목사를 찾지 못해 애태우던 중 무작정 태그 검색을 통해 내가 오마이뉴스에 쓴 글 <반복되는 '서울의 봄'... 사라지지 않는 똥별들, https://omn.kr/26vi9>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필자인 내게 전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취지를 듣고 보니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 일정이 비어있어 이번 행군에 참여한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아버지도 전쟁 직후인 1953~1956년까지 김포에서 복무했던 해병이셨으니 나도 해병 가족이긴 했다.

홍대입구역에서 만난 행군 대열에는 남자 장정들만 아니라 여성과 아이 등 해병 가족들이 함께 참석해 걷고 있었다. 홍대 앞 동교동교회에서 지지 발언을 한 후 나도 합류하여 걷기 시작했다.

요즘 나는 매주 화, 수요일 이틀 동안 파주의 한 물류센터에서 종일 서서 작업을 하기에 남은 날들은 가급적 무리를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원래는 연희동 성당 마당에서 점심 식사까지만 함께하고, 대열을 빠져나갔다가 일정이 끝나는 시청 부근에서 다시 합류하기로 주최 측에 사전 양해를 구한 터였다.

행군에서 만난 한 어머니
 
 배봉석 일병의 어머니가 아들의 납골당 사진을 보여줬다.
ⓒ 구교형
 
그런데 행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0대 아주머니 한 분이 내게 와서 핸드폰에 저장된 아들 사진을 보여주며 한 맺힌 자기 사연을 들려주었다. 사연인즉, 그분의 아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요리학원을 다니며, 호텔 조리사의 꿈을 꾸던 고(故) 배봉석 일병이다(참고기사 링크). 스무 살인 2004년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2사단 취사병으로 복무했다. 일병이던 어느 날 식자재 창고에서 무거운 철 자재를 나르던 중 허리에서 '뚝' 소리와 함께 큰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부대에서는 고통을 호소하는 배 일병에게 약물 처방만 허락했다. 증상이 더 악화되어서야 비로소 국군수도병원에 보냈지만, 전혀 회복되지 않자 '의병 전역'시켰다. 큰 꿈을 안고 입대한 해병대는 귀신 잡는다는 명성에만 연연하였지 자기 병사의 생명과 안전에 무심하였다. 그는 전역 후 꿈꾸었던 호텔 조리학과에 진학하고서도 다친 허리의 통증 때문에 주방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젊은이의 몸과 마음, 꿈이 산산이 부서진 후 우울증도 덮쳐와 인생 전체가 다 무너졌지만, 군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상이등급도 받지 못했다. 오랜 호소에도 불구하고 군과 정부의 대응은 무책임했고, 깊은 우울증 속에서 아들은 사고 12년 만인 2016년 목숨을 끊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이렇게 비통하고 억울하게 죽었는데 세상 어느 엄마가 이를 잊겠으며, 참겠는가? 이제 엄마는 억울하게 떠난 아들이 순직자로 인정받아 국립묘지에 안장이라도 되어야 하늘에서 한을 달랠 수 있지 않겠냐며 군과 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같은 처지의 채 상병 사건 진실을 호소하는 행진에도 열일 제쳐 놓고 찾아온 것이다.

나와 함께 걷는 내내 그는 걷는데 힘겨워했다. 폐가 좋지 않은 듯 숨이 거칠었다. 그럼에도 그는 긴 행군 여정을 끝까지 완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가 짊어진 가방을 대신 메어주고, 팔을 끌어안아 간간이 부축하고, 그 사연을 들으며 함께 걷는 것뿐이었다.  

국민들의 연대가 필요한 이유
 
 서울광장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에서 걸개를 펼쳤다.
ⓒ 김태성
그러나 이런 기막힌 일이 어찌 채 상병이나 배 일병만의 일이겠는가? 정확히 10년 전인 2014년 4월 바로 이맘때 선임들의 지속적인 구타, 고문 등 가혹행위로 숨진 포병부대 의무대 윤 일병도, 상관의 성추행과 이를 신고했음에도 부대와 지휘관, 군검찰과 군사경찰이 제대로 된 후속 조처를 취하지 않아 지속적인 2차 피해에 시달리던 끝에 숨진 공군 이예람 중사도 있다.

그러나 이예람 중사 사망 사건에 부당하게 개입했던 전익수 공군본부 법무실장은 버젓이 별을 달고 전역했고, 이 중사의 가족은 진상규명 없이 묻을 수 없다며 장례를 치르지 않고 딸의 시신을 국군수도병원에 그대로 안치한 채 지금도 외로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군 기밀과 아무 상관 없는 범죄를 기밀이라고 은폐하는 군과 지휘관의 무책임하고 불의한 태도, 그리고 이를 방치하는 국가의 무책임으로 인해 나라를 지키려고 입대한 젊은이들의 소중한 목숨과 안전이 헛되이 스러져가고 있다. 제대할 때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최선을 다해 책임지는 게 군과 지휘관의 역할인다. 그러나 일어난 사고와 범죄조차 책임지지 않거나 은폐하려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평상시 자기 부하 병사들을 지키지 않는 지휘관이 전시에 나라를 지킬 리가 없다. 노재현은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거쳐 국방부 장관까지 군인으로서 최고위직을 모두 섭렵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정작 12.12 쿠데타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그는 진압은커녕 혼자만 살겠다고 숨었다가 나중에 이를 승인해 주며 살아남았다. 그러나 참모총장 공관을 지키던 해병 헌병, 특전사와 국방부를 지키던 몇몇 군인들은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다가 체포 또는 전사하였다. 12.12 쿠데타는 장관과 장군들은 도망가고, 병사들이 임무를 수행한 군대의 민낯을 보여준 참사다.

세월이 흘러 이예람 중사 사건이 터졌을 때 전익수 법무실장은 사건 전모를 명백히 밝혀야 할 위치에서 부당하게 개입했음에도 별을 달고 전역했다. 그러나 채 상병 사건에서 비슷한 위치에 있던 박정훈 수사단장은 상부의 지시가 있었으니 얼마든지 '할 일 다했다'며 물러나도 되는데, 끝까지 책임을 지다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혼자서 법정을 오르내리고 있다. 그는 끝까지 군인이고 참된 해병이었다.

그러나 엄혹한 현실에서 뒤늦은 찬사가 전부여서는 안 된다. 그런 숭고한 의기와 책임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또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멀고 먼 700km 행군을 마다치 않고 시작한 예비역 해병이나 이에 동참한 가족과 시민, 종교인들은 이같은 참담한 일들이 더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함께 모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번 3차 행군의 종착지를 시청 앞 서울광장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로 잡았다.

모든 순서를 마치며 김태성 해병 동기회장과 임태훈 군 인권센터장은 사건 후 박정훈 대령을 여러 차례 만나는 동안, 박 대령은 자신이 어떤 처벌을 받을지와 같은 자기 안위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다고 전했다. 오직 채 상병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만이 자기 목적임을 거듭 밝혔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도 꼭 10년째가 되는 4월을 맞았다. 잊을 만하면 다시 반복되는 뜻밖의 죽음과 참사가 멈추려면 가족이나 관계자를 넘어선 국민들의 변치 않는 연대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다음 4차 행군은 5월 11일(토) 오전 8시 40분 시청 서울광장을 출발하여 이태원역, 용산 대통령실 항의 방문 후, 논현역, 강남역에서 선전전을 펼친 뒤,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마무리할 예정이다.
 
 '생명·정의·자유를 위한 해병대 700km 연대의 행군' 주최 측이 서울광장에서 정리집회를 하고 있다.
ⓒ 김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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