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DJ라면 북한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대화 모색했을 것"
라종일 석좌교수가 보는 대북 및 외교·안보 전략
하지만 북한은 대한민국을 향해 시간이 갈수록 적대적 언행을 쏟아내고 있다. 실제로 북한은 4·10 총선을 앞두고 지난 2일 신형 중장거리 고체연료 극초음속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로 도발을 이어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모든 미사일을 고체연료화·핵무기화했다"며 미사일 체계 완성을 선언했다. 특히 김 위원장이 올 초에 남북한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함에 따라 당분간 남북 관계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우세한 상황이다.
라종일(84) 동국대 석좌교수는 김대중(DJ)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해외·북한 담당 차장과 주영 대사를, 노무현 정부에서는 대통령 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과 주일 대사를 역임한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다. 서울대 정치학과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국제정치학 박사)을 나온 뒤 경희대에서 20여년 교수로 재직했다. 『세계와 한국전쟁』,『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물과 피』 등 단행본 저술과 강연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그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나 남북 관계 등 한반도를 둘러싼 민감한 국내외 이슈에 대한 원로의 고견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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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 사정 어려우니 '두 국가' 선언
'전쟁 도발'보다 '전쟁 불사' 의도
충돌 피하도록 상황 관리해야
'명분보다 실리' 균형외교 필요
」
DJ, 핵 실험에도 햇볕정책 유효하다 생각
-DJ라면 '두 국가론'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북한의 대남 성명 자체보다 이런 선언이 나오게 된 북한 내외부의 현실을 살펴볼 것 같다. 이런 상황에 일차원적 반응을 하기보다 '햇볕정책'의 관점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했을 것이다. DJ라면 김정은 위원장에게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대화·교류하는 길을 모색했을 것 같다."
-북한의 핵 개발로 햇볕정책은 이미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는데.
"한계도 있었지만 가장 합리적인 정책이었고 초기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물론 약점도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햇볕 정책을 세습 체제 유지에만 이용하려 했고, 북한 체제와 주민에게 미치는 햇볕 정책의 영향을 최대한 차단하려 했다. 무엇보다 햇볕 정책을 이용해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DJ는 끝까지 햇볕정책의 유효성을 믿었나.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한 다음 날 DJ의 급한 전화를 받고 동교동 자택에서 단둘이 식사했다. DJ에게 앞으로 햇볕정책 수행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DJ는 북한의 핵실험에도, 어쩌면 핵실험 때문에 더욱더 햇볕정책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DJ라면 아마 지금도 교류·협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확신할 것 같다."
-북한의 '두 국가론'에 숨은 의도는.
"분단 이후 남북 관계를 돌아보면 한쪽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는 교류·협력을 주장하고, 그 반대 상황에서는 폐쇄적·위협적으로 나왔다. 김정은의 두 국가론과 무력 통일론도 이런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북한의 사정이 그만큼 나쁜 것 같다. 강대국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 첨예화하는 국제 정세도 유념해야 한다. 북한은 향후 한반도를 계속 첨예한 신냉전 구도로 몰고 가면서 기회가 되면 미국과 직접 협상해 남한을 고립시키고 북한 내부 이완을 차단하려 할 것이다. 동시에 압도적인 핵 무력 우위를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주한미군은 어떤 경우에도 유지 필요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김정은의 강경한 도발 언사와 남한에 대한 비난을 살펴보면 일각에서 제기되는 '전쟁 도발론'이라기보다는 '전쟁 불사론'에 더 가깝다. 평화를 지키는 군사적 억지력은 필수다. 정부는 김정은의 일방적 선언에 직접 대응하기보다는 대결·충돌로 악화하지 않도록 남북 관계 관리에 더 유념하길 권한다."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 발표 30주년을 맞아 통일부가 새로운 통일 구상을 준비 중이다.
"지금 상황에선 획기적인 통일 방안을 제시하는 것에 앞서 남북한은 같은 민족이고 같은 하늘 아래 한 울타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원망(願望)을 강조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남북이 다른 민족이고 영구 분단된 두 국가라고 하면 주변 강대국들만 편해지고 좋아할 것이다."
-트럼프가 당선해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꺼내면.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쉽게 동의하거나 우리가 먼저 철수를 요구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있으면 안 된다. DJ는 동북아를 둘러싼 강대국의 독특한 관계 때문에 남북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지도자는 핵 무장 선택지도 유념해야 한다. 물론 핵 무장에 앞서 핵잠수함과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로 군사적으로 대북 억지력을 조용히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과 러시아와는 어떤 외교가 필요한가.
"내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니 1998년에 발표한 역사적인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이어 21세기에 한·일 양국이 함께 수행해야 할 세계적 비전과 실천 청사진을 담은 '새로운 공동 문서'가 나오길 기대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북한은 러시아에 무기를 판매하는 식의 경직된 냉전 구도가 조성되는 것은 유감스럽다. 적절한 선에서 명분을 지키되 실리를 추구하면서 균형 외교와 선린 외교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치는 상대 인정하는 데서 시작
라종일 석좌교수의 선친 백봉(白峰) 라용균(1895~1984)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해방 후엔 제헌국회 의원과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그의 호를 따서 제정한 '백봉 신사상'을 1999년부터 매년 시상한다. 라 석좌교수는 여야 정치권에도 광폭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DJ를 존경한다"는 윤 대통령에게 DJ라면 어떤 정치를 조언할까.
"민심을 잘 살펴 너무 앞서거나 동떨어지지 말고 국민보다 반걸음만 앞서는 정치를 하라고 권할 것 같다. 정치는 상대가 있는 영역이니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야당은 물론이고 좀 더 많은 국민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열린 리더십이 필요하다. DJ라면 외교 무대에서 절제된 표현을 권할 거로 본다."
-윤 대통령이 "힘에 의한 대만해협의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고 발언하자 중국이 강하게 반발했다.
"어떤 경우라도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에 찬성하기는 어렵지만, 한반도에 인접한 강대국에 도전하는 듯한 직설적 발언이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외교 정책은 선택의 여지를 많이 보유하는 것이 기본인데, 선택의 폭이 좁아질수록 그만큼 상황이 나빠진다. 주변 강대국을 상대하는 우리 외교의 원칙은 선린·평화, 그리고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균형 외교여야 한다."
-"DJ 정신이 실종됐다"는 지적을 받는 '이재명의 민주당'에 DJ라면 뭐라고 충고할까.
"DJ라면 여야가 국회 안에서 의회 정치의 기본 정신에 따라 자신과 노선이 다르더라도 협의에 따른 정치를 하도록 충고할 것이다. 자신의 노선이나 입지와 다르다고 국민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정부를 끌어내리려 하거나 의회 정치의 기본을 소홀히 하고 입법을 일방적으로 강행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지적할 것 같다."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는 큰 실수
-"중국에 셰셰(謝謝·고맙다)만 하면 된다"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발언이 논란인데.
"야당 지도자의 발언이라고 믿기 어렵다. 이웃 국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그저 고맙다고만 하면 된다는 것은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정도다. 정부의 외교 실책을 지적하더라도 외교 문제를 선거 같은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정원 대공수사권의 경찰청 이관을 어떻게 보나.
"대공수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기관은 국정원밖에 없다. 대공수사는 더 절실해졌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없앤 것은 큰 실수다. 대공 수사에 큰 공백이 우려된다. 경찰은 그동안 인력 양성 등 준비가 안 돼 있고 수사 노하우와 자료 처리 능력이 없다. 총선 뒤 22대 국회가 출범하면 최우선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다."
-백봉 선생이라면 요즘 여의도 정치를 어떻게 볼까.
"국회의원은 지방 사업이 아니라 국가의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 선친의 지론이었다. 이번 총선 정국에서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말이 나오던데 선친이라면 ‘멋있게 지는 것이 지저분하게 이기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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