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정지현이 기록한 건축의 흔적들

윤정훈 2024. 4. 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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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축 아파트부터 세계적 건축가의 작품까지. 정지현이 평면 위에 남긴 건축의 궤적.
삼일빌딩 커튼 월을 통해 맞은편 건물을 바라본 모습.

재건축 아파트부터 세계적 건축가의 작품까지 다양한 건축물의 생애를 사진으로 기록해 왔다. 피사체로서 건축물이 갖는 매력은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많다. 건축물은 동시대에 만들어진 재화 중 오래 존속하고, 사람마다 이에 대한 생각과 추억이 다채롭다. 고정된 대상이고 허가 등 촬영에 여러 제약이 따르지만 그 역시 하나의 매력이다. 건축 안에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계속 변해왔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70~80년대만 해도 ‘한강 뷰’는 대중교통과 멀다는 이유로 선호되지 않았고, 복도식 아파트가 일반적이던 시절에는 이동에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고층 선호도가 낮았다. 그런데 바깥 풍경을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커튼 월 구조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전망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선호 양상이 바뀌었다. 이렇듯 건축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하는 데에도 관심이 많다.

‘Samil Building Remodeling Documentation 09’(2020~2021). 유리에 붙인 붉은색 필름이 커튼 월의 존재감을 강조한다.

건축 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아버지가 취미로 필름카메라를 모으셔서 어릴 때부터 사진을 찍었다. 사진학과 진학을 위해 서울 시내 전통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을 여러 번 촬영해 이미지를 한데 겹친 습작을 만들기도 했다. 잠실주공아파트에서 살았던 경험은 내 사진 작업의 큰 자양분이 됐다. 주변에 신도시가 들어서는가 하면, 인근에 초고층 타워가 생기고 인접 단지가 재개발되는 풍경을 목격했다. 개발 과정을 몸소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건축과 도시에 관심을 가졌고, 2012년엔 판교 신도시 건설 현장을 매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곳엔 일상에서 보기 어려운 구조물이 많았다. 20~30개 넘는 동에 물을 공급하는 온수 저장 장치나 발전 시설이 만들어지는 모습, 바닥에 놓였던 자재들이 어느새 천장이나 벽에 붙어 건축물의 구조가 되는 장면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완공하면 볼 수 없는 그곳의 지하공간을 촬영해 ‘Construction Site’(2012) 연작을 완성했다.

‘Reconstruct 201_5513’(2020), Pigment Print. 지하 1층과 지상 2층을 연결하는 나선형 계단 뒷면. 삼일빌딩 리모델링의 중추적 개념으로, 세밀한 공정을 통해 구현된 형태가 주변의 수직 구조와 대비를 이룬다.

‘Demolition Site’(2013)는 철거 현장을 다룬 작업이다. 인천 가정동 신도시 재개발구역에 들어가 아파트 내부에 빨간색 페인트를 칠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촬영했는데, 이런 개입은 왜 필요했나

철거 현장에서 슬퍼 보이는 사진을 찍는 행위는 단편적이지 않은가. 페인트칠한 벽은 잘게 부서지다 결국 사라지는데, 그렇게 남은 폐자재가 시멘트 원료로 재사용된다. 건축자재가 공간이 되고, 그 공간이 다시 원료가 되는 순환을 기록하고 싶었다. 시간과 체력 소모가 상당했지만 그런 과정을 담는 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Reconstruct 201_5120’(2020), Pigment Print. 천장 마감이나 벽 구획을 위해 얇은 판재 형태의 자재를 쌓아 촬영했다.

2017년부터 건축물의 공사 과정을 기록하는 커미션 작업을 해왔다. 건축물이 완성되기 전의 모습을 담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나

해외의 경우 대규모 미술관 등을 지을 때 단순한 아카이빙 이상의 의미로 예술가에게 건축 기록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사전에 건축가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아 공사 방식과 특징적 공법을 파악한다. 상업사진으로 완성됐을 때는 가장 멋진 모습이 담기지만, 해당 건축물의 건설 기법이나 장소적 특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에서 촬영한 ‘Construct’ (2017), Pigment Print.

삼일빌딩 리모델링 프로젝트 아카이브 작업에서는 커튼 월 공법에 주목했다

삼일빌딩은 한국 최초로 커튼 월 방식이 도입된 고층 건물이다. 커튼 월이란 철골 프레임 사이를 유리로 채우는 외벽 처리 기법으로, 커튼 월의 등장은 건물 내 일조권과 조망의 자유를 확대시켰다. 이런 걸 어떻게 부각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유리 한쪽에 빨간색 필름을 붙였다. 해 질 녘의 빛이 길어질 때 창으로 들어오는 붉은색을 추적하며 촬영을 이어갔다.

오르 서울에서 촬영한 ‘Deconstruct’(2022), Pigment Print. 쇼룸이라는 환영적 공간을 구성하는 소재를 활용한 설치미술 작업이다.

어느 시점부터 아카이브에 그치지 않고 신축 현장에서 남는 자재를 공간에 재배치해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업한 ‘Construct’(2017) 배경은 용산 아모레퍼시픽 사옥이다

두꺼운 벽으로만 가능했던 단열이 훨씬 얇은 자재로 가능해졌듯이 공정의 신속화와 효율을 위해 건축자재가 점점 얇고 가벼워지며 조립과 해체가 쉬워졌다. 개인적으로 건축 소재의 변화에도 관심이 많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에는 오피스와 미술관, 상업시설 등 다양한 공간이 존재한다. 특히 전시공간과 수장고가 있는 미술관에서 중요한 건 콘크리트 벽 위에 시공되는 조습 패널인데, 내부 온습도를 유지하며 무척 가볍고 유연하다는 특징이 있다. 벽 마감이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에 사용하고 남은 패널을 휘어 끼우거나 겹쳐 쌓았다. 완공 후 더는 볼 수 없는 장면을 담은 것이다.

‘Deconstruct’(2022), Pigment Print.

2~3년 전부터는 디지털 이미지에 실크스크린이라는 아날로그적 기법을 더하는 방식으로 또 다른 변화를 시도했다. 워크룸 프레스와 작업한 사진책 〈유령작업실 Specter Workroom〉(2023)은 한 점의 회화가 연상된다

타일로 외벽을 마감하는 건물의 표면을 모눈종이처럼 여기고 그 위에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을 실크스크린으로 덧댄 작업이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어느 때보다 많은 이미지가 빠르게 소비되는 때다. 사진 매체의 한계와 가능성을 실험하면서 다양한 방식을 통해 사진의 미래를 모색하고 싶다.

신축 건물 타일 외벽 위에 공사 중 사진을 겹친 ‘Specter Workroom 10 3433’(2023), Silkscreen on Pigment Print.

건축물이 탄생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경우도 많겠다. 가장 특별한 인상을 남긴 경험은

소위 대가의 건축을 이론으로만 알다가 현장에서 체감하는 순간이 있다. 그러면 건축가가 물성이나 빛에 집착한 이유가 오감으로 납득이 된다. 매 프로젝트마다 느끼지만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이 설계한 송은문화재단이 그랬다. 인테리어하기 전 어떤 마감재나 조명도 들어서지 않은 콘크리트 상태였는데, 1층 로비 통창을 통해 지하까지 햇빛이 떨어지는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아마 그 순간의 유일한 목격자 아닐까.

‘Specter Workroom 01 3486’(2023), Silkscreen on Pigment Print.

정지현의 시선은 금방 사라질 흔적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무언가 사라지면 그때 비로소 사진을 찾는다. 내가 촬영한 장면이 더 이상 눈으로 볼 수 없게 될 때 비로소 내 사진이 가치를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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