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처절한 선교사의 삶, 그러나
안녕하세요.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합니다.
완연한 봄날입니다. 목련꽃 잎은 이미 도로에 떨어진 지 오래고 벚꽃도 이제 절정을 지나 꽃잎이 흩날리고 있습니다. 이제 또 다른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르겠지요. 꽃향기도 물씬 풍길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로서 우리도 향기 나는 삶, 주님께 향기를 드리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기사는 현재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가자지구 사람들에 대한 증인인 한나 마사드 목사님을 인터뷰했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개신교인이 살면서 신앙을 지키고 있다는 얘기는 잘 못 들어 보셨지요. 하지만 전쟁 이전까지 1000여명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이중의 핍박을 당했습니다. 이슬람 무당정파 하마스에게, 그리고 팔레스타인이라는 이유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며 ‘성경의 사람들’ 곧 가사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전 세계 기독교인과의 연대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에게 기도와 도움의 손길을 한국교회가 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한국교회 일부 신자들은 팔레스타인을 구약의 블레셋으로 여기며 마치 가나안 정복하듯 이스라엘 군대가 진멸하기를 바라는 무리가 있습니다. 단언컨대 그들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며 예수님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사드 목사님의 고난의 삶을 보면서 역사 속 선교사들의 고난도 생각합니다. 이번 주 소개되는 제임스 찰머스 그리고 아도니럼 저드슨 선교사는 영웅으로 추앙받지만 너무나 고통스럽고 처절한 선교사의 삶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버리지 않았고, 주님 역시 그들을 향한 약속을 깨지 않았습니다.
석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56년 주일학교 시간에 피지 선교사의 감동적인 편지 내용을 들은 뒤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습니다. 10년 만인 1866년 그는 아내 제인과 함께 런던선교회 파송으로 남태평양으로 떠났습니다. 한때 존 윌리엄스 선교사가 사역한 적이 있었던 라로통가에서 10년간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뉴기니에서 사역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1877년 5월 찰머스는 수 세기 동안 식인 풍습이 존재해온 뉴기니로 사역지를 옮겼습니다. 그가 도착하기 2년 전 감리교 선교사인 조지 브라운 목사가 60명의 무장한 사람들을 이끌고 뉴기니 정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브라운 목사가 보낸 원주민 선교사들을 살해한 원주민 추장 탈릴리를 징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브라운의 행동은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반면 찰머스가 뉴기니 원주민들을 대하는 태도는 처음부터 그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평상복을 즐겨 입어 원주민들을 편하게 해주었다. 대부분 선교사는 검은 양복에 모자를 쓰는 등 정장 차림을 좋아했습니다. 찰머스는 대신 인육을 먹는 것만은 거절했습니다. 언어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사랑의 실천으로 보완했습니다.
선교 사역은 절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879년 치료를 받으러 호주로 떠난 그의 아내가 해를 넘기지 못하고 숨졌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은 오히려 원주민들에 대한 더 깊은 헌신으로 승화됐습니다. 뉴기니 사역 5년 만에 그가 활동했던 곳에서는 인육을 먹는 습관이 사라졌습니다. 이방신의 신전은 교회당으로 변했습니다.
20년 만에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그를 원주민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한 노파는 그의 목에 손을 걸고는 코를 비벼댔습니다. 이는 원주민들의 친밀한 인사법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주변에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미개인들이 아직도 수없이 많이 있는데 이렇게 편안히 쉬고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하루 12시간씩 버마어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버마인들은 인간을 인격적으로 돌보시는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버마는 선교사들에게 낙심만 안겨주었습니다. 주민들은 가끔 복음에 대해 관심을 보이다가도 정부의 단속이 나서면 관심은 뚝 끊겼습니다. 저드슨 선교사는 집 안에서 성경 번역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러다 자야트라는 쉼터를 통해 사역의 물꼬를 텄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와서 쉴 수 있고 토론할 수도 있었으며 불교승의 설법도 들을 수 있었던 버마의 자야트를 활용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야트에 모였고 주일예배를 드리며 점차 마음 문을 열었습니다. 랑군 버마인교회의 출발이었고 1820년 무렵엔 침례를 받은 교인이 10명이었습니다.
아도니럼과 부인 앤은 열대성 열병에 자주 걸렸고 랑군에서 태어난 아기 로저도 6개월 만에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약성경 번역을 완성했습니다. 1824년 버마 정치 상황이 악화하면서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외국인은 모두 스파이 혐의를 받았고 아도니럼과 동료 프라이스 선교사는 체포돼 사형수 감방에 갇혀 처형 날만 기다렸습니다. 감옥 생활은 끔찍했고 선교사들은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채 해충이 들끓는 더럽고 축축한 감옥에 일반 범죄자들과 함께 투옥됐습니다.
아내는 날마다 관리를 찾아다니며 아도니럼이 미국 시민이며 영국 정부와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해명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는 계속 감옥에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앤은 남편의 무죄를 탄원하며 다녔습니다. 하지만 앤은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아기에게도 젖을 먹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1년 반의 투옥생활 끝에 마침내 저드슨은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후 아내 앤과 딸 마리아는 열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죽음 소식에 저드슨은 일에 빠져 슬픔을 잊으려 했습니다. 그는 1년 이상 미친 듯이 성경번역과 복음전도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죄책감과 슬픔을 억누르려 했지만 아내와 아기가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앤이 죽은 2년 후 정글 깊은 곳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은둔자로 살았습니다. 동료 선교사들과 원주민 회심자들은 그런 그를 위해 기도했고 도왔습니다.
그는 순회 사역을 통해 회복했고 1840년, 아내가 죽은 뒤 14년 후 마침내 버마어 성경을 완성했습니다. 이후 30세의 과부 세라 보드먼과 결혼하고 10년간 8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육체적 중압감이 너무 과했던 세라는 막내를 낳은 이듬해인 1845년 미국으로 가는 도중 사망했습니다.
저드슨은 미국으로 돌아가 순회강연을 이어갔고 그러다 패니 포레스터라는 필명으로 대중소설을 쓰는 젊은 여류작가 에밀리 처복을 만납니다. 둘은 1846년 결혼했습니다. 이들은 버마로 들어가 3년간 함께 사역했습니다. 딸이 태어나기도 했지만 결혼 생활 상당 기간은 병에 시달리며 지내야 했습니다. 1850년 에밀리가 둘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을 때 저드슨은 아픈 상태로 항해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그는 배에서 숨을 거둔 뒤 수장됐습니다. 10일 뒤 에밀리는 사산했고 건강을 잃은 에밀리도 3년 뒤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눈물 없이는 듣기 힘든 저드슨 선교사의 처절한 사역이었지만 저드슨의 후대에 이어질 복음전도 사역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가 네 번째로 회심시킨 버마인 마웅 잉은 가족 대대로 신앙을 이어갔고 증손자 틴 마웅 턴이 시작한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복음전도 운동을 통해 저드슨 부부가 시작한 사역을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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