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선이 자신을 소개하는 방법

윤정훈 2024. 4. 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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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룸’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브랜드 ‘카우프만’을 공동 운영하는 유현선이 지난 5년간 구입한 물건 다섯 가지를 통해 본인을 이야기한다.
유현선
‘워크룸’의 그래픽 디자이너. 책과 영화, 노래에서 읽거나 들은 문장에 해석을 더한 사물을 제안하는 브랜드 ‘카우프만’을 공동 운영한다.

사람은 평생 타인에게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다. 새 학기가 시작돼 새로운 친구를 만날 때도, 업무 미팅에서 처음 보는 클라이언트와 만날 때도 맨 먼저 하는 일은 인사와 함께 내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이다. 자기소개는 항상 파편적일 수밖에 없다. 이름은 나를 부르는 호칭일 뿐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나이와 직업, 출신 학교 같은 조금 더 부가적인 정보가 더해져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소개에 좀 더 긴 시간을 할애하거나, 선호하는 영화나 먹지 못하는 음식을 이야기해도 취향이 나를 대표할 수는 없다. 결국 이런 파편적인 조각을 모아 나라는 흐릿한 형체의 초점을 조금씩 맞춰갈 수밖에 없다. 사람에겐 또 다른 숙명이 있다. 바로 평생 물건을 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재배하고 수확하는 자급자족의 삶을 택하지 않았다면 필요한 물건을 사서 사용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원리이기도 하다. 게다가 사람은 생활에 꼭 필요하지 않아도 갖고 싶은 욕망만으로 많은 물건을 구입한다. 형태가 마음에 들거나 시간을 기념하고 싶다는,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려운 이유로 구입한 물건을 살피는 건 자기소개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지난 5년간 구입한 물건 다섯 가지를 통해 나를 이야기하고 싶다.

2019년. 제미니 익스프레스(Gemini Express)를 구입했다. 60년대에 디자인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이탈리아에서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모카 포트와 비슷하지만 에스프레소가 나오는 입구가 수도꼭지처럼 달려 있다. 그 아래 받침대에 작은 커피잔 두 개가 올려져 있다. 커피 맛에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런던의 라이프스타일 편집 숍 레이버 앤 웨이트(Labour and Wait) 홈페이지에서 발견했는데, 아담한 크기의 미니 에스프레소 바 같아 지나치기 어려웠다. 제미니는 라틴어로 쌍둥이자리라는 뜻이다. 두 잔의 에스프레소를 한꺼번에 내릴 수 있어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2020년. 지금은 사라졌지만 경복궁역 인근의 퓨전 한식당 ‘주반’에서 우조(Ouzo)라는 술을 처음 접했다. 유리잔에 투명한 술을 따라 서비스로 줬는데, 몇 모금 마신 뒤 얼음을 넣자 투명했던 술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셰프는 주재료인 아니스의 특정 성분이 물과 만나면 흰색으로 변한다고 설명했다. 한동안 우조에 빠져 바를 방문할 때마다 찾았고, 주류 숍에서도 구입했다. 투명한 술이 하얗게 변하는 현상을 루시(Lousche)라고 하는데, 우조 외에 튀르키예의 전통주 라크와 녹색빛의 압생트에서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2021년. 향을 맡아보지 않고 향수를 사는 건 꽤 무모하다. 향은 취향을 많이 타고 고유의 살 냄새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된다. 하지만 웹에서 나소마토(Nasomatto) 향수를 보고 바로 구입 버튼을 눌렀다. 매니큐어처럼 작은 사각 유리병에 몸체보다 더 큰 원목 뚜껑이 달린 형태였다. 다양한 나무 재질을 별다른 가공 없이 고스란히 살려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전체적으로는 단정한 형태지만 뚜껑 때문에 향은 더 과감할 것 같았다. 나소마토를 만든 조향사 알레산드로 구알티에리는 여러 브랜드의 향수 개발을 담당했는데, 그의 대담한 취향을 선호한 브랜드로는 베르사체와 헬무트 랭이 있다. 2022년. 디자이너에게 바우하우스는 지겨운 유토피아 같은 존재다. 수많은 사람이 인용해서 닳을 대로 닳은 옛날 이야기지만, 돌고 돌아 결국 그곳에서 만들어진 건조하고 아름다운 작업을 찾는다. 빌헬름 바겐펠트(Wilhelm Wagenfeld)가 디자인한 조명 ‘WNL 30’도 그중 하나다. 각도 조절이 가능한 두 개의 조인트와 무게감 있는 베이스로 구성돼 탁상에 두거나 벽에 매달아 쓸 수 있다. 지금은 책상 위에 있지만, 벽에 달았을 때 조인트의 구조가 잘 보여 언젠가는 벽에 걸 계획이다. 2023년. 가장 좋아하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누구냐는 질문에 보통 “없다”고 대답하지만, 머릿속으로는 허브 루발린(Herb Lubalin)을 떠올린다. 그가 1966년에 에른스트 프리츠가 만든 서체 ‘프리츠 쿼드라타(Friz Quadrata)’를 사용해 디자인한 포스터를 이베이에서 구입했다. 아이보리색 종이(원래 이런 색상인지, 빛바랜 것인지 모르겠지만)에 벤저민 프랭클린의 어록이 적혀 있다. 독수리 대신 칠면조를 미국을 대표 새로 지정하고 싶어 하는 아쉬움을 담은 문장이다. 독수리가 적절하지 않은 이유는 빨강으로, 칠면조가 적절한 이유는 파랑으로 인쇄해 별다른 요소 없이 미국 국기의 색을 문장 구조와 함께 엮어 사용했다. 참 쾌적하고 자신감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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