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눈물 씻어 냈다… “당장 눈앞 훈련 열중”

송경모 2024. 4. 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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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 김선우 근대5종 국가대표
2024 파리올림픽 근대5종 국가대표 김선우(28·경기도청)가 지난 1일 경북 문경 국군체육부대에서 레이저 런(육상+사격) 훈련을 하고 있다. 세 번째 올림픽 출전을 앞둔 김선우는 “마지막이란 생각이 조금 들지만, 욕심 없이 할 수 있는 걸 해나가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끝을 정해두진 않았다”고 강조했다. 문경=윤웅 기자


“1200, 아홉 개.”

지난 1일 오전 10시, 경북 문경 국군체육부대. 최은종 근대5종 국가대표팀 감독의 외마디를 신호로 운동복 차림의 남녀 20여 명이 차도 옆 오솔길을 걷기 시작했다. 걸음은 이내 뜀박질로 변했고 하나둘 풀숲을 따라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직선 길이론 편도 500m, 실제 거리는 왕복으로 1.2㎞ 정도 됩니다.” 양손에 초시계와 기록지를 나눠 든 김성진 대표팀 코치가 설명했다. 경사진 주로를 달려야 하는 크로스컨트리 특성상 육상용 트랙과 별개로 언덕 기슭에 마련된 코스였다. 선수·지도자들이 직접 체육부대 영내 잉여 부지에 야자 매트를 깔았다고 했다.

한 차례 왕복할 때마다 이들은 출발 지점에 마련된 사격대 앞에 섰다. 숨돌릴 틈도 없이 레이저건을 집어 들고 10m 밖의 과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과녁 상단의 붉은 등 5개가 모두 초록색으로 바뀌면 사격이 끝났다. 다시 달릴 시간이었다.

이날 목표 횟수는 워밍업 포함 왕복 10회였다. 훈련을 시작한 지 30분가량 지나자 고요하던 숲길은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찼다. 기합 반, 곡소리 반 괴성이 간간이 터져나왔고 숨쉬기가 힘든지 연신 마른 침을 뱉는 이도 있었다.

문경=윤웅 기자


김선우(28·경기도청)의 목덜미도 땀으로 흥건해졌다.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은 채 전웅태 등 남자 선수 셋과 한 조로 뛰던 그가 마지막 바퀴를 마친 건 오전 11시 30분이 다 돼서였다. 끝으로 총을 집어든 그는 12초 남짓한 시간에 다섯 발을 명중시켰다.

‘은메달 눈물’이 남긴 교훈

펜싱·수영·승마에 육상과 사격을 합친 레이저 런까지 각 종목의 점수 합계로 승자를 가리는 근대 5종은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만들어졌다. 국내에선 오랜 기간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으나 2010년대 이후 정진화(은퇴)·전웅태(광주광역시청)를 필두로 한 황금세대가 여기에 균열을 냈다.

김선우도 그 일원이다. 수영과 철인3종을 거쳐 경기체고 시절 근대5종에 입문한 그는 2014년 중국에서 열린 월드컵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같은 해 인천아시안게임에선 ‘언니들’과 여자 단체전 금메달을 합작했다. 이후로도 아시아선수권과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등지에서 꾸준히 성적을 내며 세계랭킹 10위권(현 14위)의 강자로 발돋움했다.

김선우의 승부욕과 기량은 은사도 인정했다. 10년 넘게 그를 지도해온 최은종 감독은 “맨날 겉으론 힘들다고 하지만 속으론 상당히 강하다”며 “졌을 때 어떤 선수는 좌절하지만, 또 어떤 선수는 다시 일어나겠다고 마음먹는다. 선우에겐 그런 마음이 있다”고 강조했다. 경기력 면에서도 충분히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겨룰 힘을 지녔다고 덧붙였다.

때론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 이상의 부담감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항저우아시안게임이 그랬다. 대회를 앞두고 예년보다 유독 몸 상태가 더디게 올라왔다. 결국 개인전 은메달과 단체전 동메달을 수확했지만 아쉬움에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에도 눈물이 잦은 편”이라며 멋쩍게 웃은 그는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나보다 더 열심히 준비한 (대표팀) 언니·동생들까지 생각났다”고 설명했다.

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2016 리우올림픽에선 13위, 2020 도쿄올림픽에선 17위를 기록했다. 한국 여자 선수 중 처음으로 올림픽 본선에 2회 연속 진출하는 성취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김선우는 “‘올림픽에서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컸다”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야 하는데, 한 가지 목표에만 집착하다 보니 오히려 성적이 안 나온 것 같다”고 돌이켰다.

올해는 다르다. 김선우는 지난달 9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2024 국제근대5종연맹(UIPM) 월드컵 1차 대회에서 개인전 은메달을 따냈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모두 출전한 대회에서 선전해 자신감을 얻었다. 체력 안배도 기대할 수 있다. 다가올 2~3차 대회에서 결승 진출을 확정한다면 4차 대회 기간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다. 이후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까지 살인적 스케줄이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땐 더더욱 귀중한 시간이다.

“기대 없이 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성적이 나왔다”고 웃음 지은 김선우는 올림픽 얘기에 고갤 저었다. 남은 월드컵과 세계선수권대회 일정을 하나하나 소화하다 보면 저절로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란 취지다. 그는 “당장 눈앞의 시합, 오늘 하루의 운동에 신경쓰려 한다”며 “지난해 아시안게임 때보다 부담이 덜하다”고 말했다.

“끝은 정해두지 않았어요”
문경=윤웅 기자

통상 근대5종은 개인 기록종목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한국 대표팀은 끈끈한 관계를 자랑한다. 지도자와 선수들이 물리적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기에 가능한 일이다. 김성진 코치는 “대표팀은 사실상 상시 합숙 체제”라며 “1년 365일 중 300일은 함께 지낸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김선우도 마찬가지다. 본가는 인천이고 소속팀 숙소는 경기도 수원에 있지만 각종 국제대회가 열리는 시즌이면 주 6일간 문경에서 합숙 훈련에 열중한다. 사람으로 붐비는 곳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쉬는 날이면 집이나 경기도청 숙소로 가 휴식을 취하는 게 보통이다. 취미도 정적이다. 소속팀 후배와 수다로 회포를 풀거나 애니메이션을 본다. 최근엔 전웅태의 추천을 받고 야구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대표팀 동료들은 그에게 든든한 지원군이다. 그보다 한 살 위이자 혼성계주 파트너인 전웅태가 대표적이다. 평소엔 친남매처럼 티격태격하지만 진지한 고민이 있을 땐 그만한 믿을 구석이 없다. 김선우는 “10년 넘게 알고 지낸 만큼 날 너무 잘 안다”며 “지금은 은퇴했지만 (정)진화 오빠도 대표팀에서 항상 나를 위로해주고 보듬어줬다”고 감사를 전했다.

가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삼남매 중 둘째인 그는 “어릴 때부터 언니·동생에게 미안해서라도 ‘알아서 하겠다’는 얘길 많이 했던 거 같다”며 “부모님은 서운해하시더라”고 말했다.

선수 생활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가 됐지만 그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가장 자신있다는 펜싱을 필두로 수영, 승마, 사격까지 고르게 빼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그는 올 겨울 산을 타며 주행(육상)을 보완하는 데 힘썼다. 그는 “마지막(올림픽)이란 생각도 조금은 들지만 욕심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나가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2014년 대표팀의 막내는 10년이 지나 주장이 됐다. 김선우는 “회복력이 해마다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며 농담 섞어 푸념하다가도 “아직 끝을 정해두진 않았다”고 강조했다. “되는 데까진 하고 싶어요.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하는 데까지 해보는 게 후회 없지 않을까요?”

문경=송경모 기자 ss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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