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살 아저씨'가 Z세대 롤모델 됐다…김창완 "날 왜 좋아하지?" [마흔공부③]
" 한 소절 흐를 때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꾹 참았어요. 행복했었고 헤어지는 날까지 우린 하나였어요. "
23년간 진행한 라디오를 끝낸 소회를 묻자 김창완(70)은 이렇게 답했다. 매일 오전 9시면 어김없이 찾아와 위로를 건네던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SBS 파워FM, 이하 '아침창')'가 지난달 17일 막을 내렸다. 마지막 방송을 하던 날, 청취자들은 "나의 한 시절을 함께해줘 고맙다"며 각자의 추억을 꺼내 놓았다. 기타를 치며 흐느끼는 그의 모습도 SNS에서 오래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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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존재가 위로, 당신은 김창완 아저씨
Q : '아침창' 방송이 없는 첫 월요일입니다. 오늘 아침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A : 늘 일어나던 시간에 눈이 딱 떠지더라고요. 그런데 갈 데가 있나. 매일 집(서울 서초구)에서 목동 SBS까지 자전거로 출근했는데, 오늘은 자전거 타기 싫었어요. 오토바이 타고 출근길 반대로 달렸지. 자전거로 매일 가던 길을 가면, 내내 방송 생각이 날 거 같았거든.
Q : 프로그램에 애정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그동안 오프닝 멘트도 직접 쓰셨잖아요. 어떻게 쓰신 건가요?
A : 무조건 (방송) 당일 아침에 썼어요. 그날의 느낌을 미리 쓸 수 없잖아요. 길가에 핀 개나리도 보여주고 싶고, 출근길 떠오른 생각도 말해주고 싶고, 아침을 그저 만나는 거지. 계획하지 않아요. 우리 삶에서 계획하느라 놓치는 게 얼마나 많아요. 우연히 만난 모든 것을 그날 오프닝에 쓴 거죠. 다만 일상의 순간을 예민하게 알아채려면 오감을 열어 놓는 습관이 필요해요. 이거 진짜 어려워요.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다 동원해서 일상을 살려고 노력해보세요. 보이는 게 달라진다니까.
Q : 오프닝 멘트를 엮어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웅진지식하우스)라는 책을 냈죠. 저자에 ‘가수’ 김창완이 아닌 ‘아저씨’ 김창완이라고 소개했어요.
A : 저는 20대부터 ‘아저씨’란 소리를 들었어요. 79년에 ‘개구장이’라는 동요집을 냈거든요. 노래를 듣던 아이들이 저를 아저씨라고 부르더라고요. 그 바람에 나이도 어린데 ‘아저씨’ 타이틀이 붙은 거지. 지금은 오히려 이렇게 불리는 게 좋아요. 친근하니까. 할아버지보단 아저씨가 낫잖아요.
Q : 책에서 건네는 덤덤한 위로가 좋았어요.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인 것처럼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고, 평범해도 괜찮구나.
A : 제 위로는 ‘빨간약’이나 ‘항생제’ 같은 거예요. 광범위한 위로인 거지. 전문가 처방 같은 위로도 중요하지만, 저는 그런 ‘맞춤형 위로’는 해주지 못하고 할 수도 없어요. '오히려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러고 있다'는 부분을 말해주는 거죠. 어떨 땐 그런 것들이 더 심금을 울릴 때가 있잖아요. 얼마 전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어떤 아이가 엄마한테 꾸지람을 듣고는 우울해졌는지 "마음에 먼지가 앉은 것 같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엄마가 “어떻게 하면 그 먼지가 사라질 것 같냐”고 물으니까 "‘사랑해’라고 말해 달라"는 거예요. 사랑이야말로 평범하지만, 누군가의 숨통을 트게 할 수 있는 거죠.
✅Part 2. Z세대의 '추구미'
Q : Z세대 롤모델로 꼽히는 거 아세요? 작년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서 한 시간 내내 열정적으로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김창완 아저씨처럼 나이 들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A : 그래요? 생각도 못 했어요. 어쩐지 요새 ‘김창완 밴드’ 공연에 젊은 친구들도 오더라고.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고 희한하다고 생각하긴 했거든. 날 왜 좋아하는 거지?
Q : 요샛말로 ‘추구미’라고 하거든요.
A : 쭈꾸미? (웃음)
Q : '추구+미(美)'요. '내가 추구하는 모습'이라는 뜻으로요. 본인의 어떤 면이 젊은 층의 '추구미'가 됐을까요?
A : 글쎄, 모르겠어요. 추측을 해보자면 내가 악역 전문배우라 그런 것 같아요. (※김창완은 '하얀거탑'(MBC), '마의'(MBC) 등에서 악역 연기로 화제를 모았다) 나쁜 사람같이 보였는데 노래 부르는 모습은 악당 같지 않거든. 실제로 라디오 할 때는 “친절하게 진행하던 아저씨가 정말 그 아저씨 맞냐"며 아들이 묻더라는 사연도 왔어요. 할아버지뻘 악당이 무대에서 누구보다 신나게 노래 부르니까, 그게 신선해 보인 걸까요?
Q : 아이유, 잔나비, 악뮤처럼 젊은 뮤지션과 작업도 많이 했어요. 이런 모습도 '꼰대' 같지 않은 어른, 닮고 싶은 어른으로 보이게 해요.
A : 전 후배들이 정말 예뻐서 뭐라도 해주고 싶어요. 삶에 치여 허덕이는 사람들 참 많잖아요. 현실은 쪼들리고 미래는 뿌연데, 다들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도 본인의 ‘근기(根氣·근본이 되는 힘)’를 믿고 꾸준히 하는 후배들 보면 정말 예쁘지. 앞으로도 본인을 믿고 용기 냈으면 좋겠어요.
Q : 어떤 용기를 내야 한다는 뜻일까요?
A : 내가 오늘 아침 낸 용기는 이겁니다. ‘아침창’은 떠났지만, 아침이 날 떠난 건 아니잖아요. 이걸 느낀 거죠. 어느 상황에나 대입해볼 수 있는데요. 노래 부르는 게 나에게 돈을 주지 않을 수도 있죠. 그렇지만 내가 아직은 노래를 떠나지 않았단 걸 깨닫는 것, 삶에 용기를 낸 거예요.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지, 찾고자 하면 희망은 찾아질 겁니다. 전 젊은 친구들을 믿어요.
Q : '좋은 어른'은 젊은이를 믿어주는 사람이란 생각도 드네요.
A : 전 인자한 어른이 참 좋더라고요. 어른이 되면 자꾸 젊은이를 꾸짖고 싶어지잖아요.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기 때문이겠죠. 그래도 전 백 가지를 가르쳐주는 어른보다는 한 가지를 참아주는 어른이 좋아요. 권위를 갑옷으로 입는 어른이 되지 않으려고 하죠. 그러려면 자신의 허물이나 나약함도 다 드러낼 수 있어야 해요.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데,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 쉽지 않네.
Q : '좋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조언 부탁드려요.
A : 저는 그냥 ‘너의 길을 가라’고 해요. 저도 스물셋에 데뷔해서 내 갈 길 가면서 쭉 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예요. 대단하게 뭘 한 것도 아냐. 제가 아들을 26살에 낳았거든요. 애가 애를 낳은 거죠. 그래도 아비라고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거였어요. '남의 길 기웃거리지 말고, 너의 길을 걸어라.' 어떤 젊은이라도 겨울나무가 가진 잠재력은 있어요.
✅Part 3. "흔들리는 40대, 젊은 나와 이별하세요"
Q : 올해 일흔이 되셨어요. 달라진 게 있을까요?
A : 시간의 흐름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게 달라졌어요. 요새는 음악이,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거든요. 이런 감흥은 젊은 시절에는 갖지 못한 신세계에요. 젊을 땐 지나간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거든요. 나이가 들면서 그 시간이 느껴져요. 구본창 작가의 ‘비누’ 시리즈를 좋아하는데요. 닳아 없어져 가는 비누를 찍은 사진 작품이에요. 희미해져 가는 것 속에서 시간의 흔적을 느끼는 거죠. 거품 내며 더러운 걸 씻어주고, 그만큼 본인은 닳아 없어지고. 이런 모습에서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어요. 그게 나이 들었다는 거 아닐까요.
Q : 이 시리즈가 '마흔 공부' 인데요. 누구나 40대 전후로 흔들리는 것 같아요. 잘 살고 있나 자꾸 묻게 되고요. 2011년에 발표한 김창완 밴드의 ‘Darn it’ 가사에도 그런 마음이 담겨 있더라고요. '학교를 다니고/학원을 다니고/대학을 나오고/직장엘 다녀도/아무것도 모르겠네/정말 모르겠네' 원래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요?
A : 인생 다 똑같아요. 저도 그랬는걸요. 그렇지 않으면 이런 가사를 어떻게 썼겠어요. 근데 이 얘기는 해주고 싶어요. 40대가 어떤 면에선 진짜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기라고요. 직업적 성공을 거두었거나, 혹은 실패했을 수도 있고요. 마흔 살의 여러 가지 표정이 있을 거예요. 거기에 매몰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 번 더 변할 기회로 보는 건 어떨까 하는 거죠.
Q : ‘한 번 더 변할 기회’라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걸까요?
A : 젊은 나와 이별하는 겁니다. 여태까지 살아온 삶에 “잘했다”고 스스로 훈장 하나 달아주고 서랍에 넣는 거예요. 실패한 모습은 그냥 휴지통에 던져버리세요. 그래도 괜찮아요. 마흔까지의 삶을 싹 정리하는 거죠. 훈장 꼭 쥐고 같은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이루지 못한 청춘의 꿈 폐기하길 주저하지도 마세요. 과거에 연연하면 지금의 내가 초라해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과거의 나’를 끊어내야 ‘새로운 나’와 만날 수 있어요. 갑자기 여행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다른 일 하고 싶으면 그것도 해보시고요.
Q : '김창완의 40대'도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산울림 재결성 앨범 '무지개'(1997)를 냈고, KBS 드라마게임 '야채식빵 굽는 남자'(1995)에서 첫 주연도 맡았어요.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한 도전이었을까요?
A : 그땐 몰랐지. 그냥 앞만 보고 살았던 거 같아요. 지금에 와서야 나를 돌아보면서 깨달은 거지. 마흔은 자아 형성의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생각하거든요. 젊은 나와 결별하면서 동시에 완고해져 가는 나를 설득해야 할 시절이에요. 그래야 한 번 참아줄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되는 거지.
Q : 40대에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요?
A : 자신을 재단하지 마세요. ‘나는 이렇다’ 하면서 자기 정체성에 섣부른 확신 갖는 걸 경계하세요. 난 그런 말을 해주고 싶네. ‘나는 안 맞아’ 하면서 미리 포기하지도 말고요.
Q :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A : 난 그런 거 몰라요. 안 좋아해요. 그런 거에 갇히지 말라니까요.(웃음)
Q : 네. MBTI에 갇히지 않을게요.(웃음) 그럼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A : 글쎄요. 그런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삶이 행복한지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시기마다 다 달라요. 행복한 삶을 그린다는 건, 결국 제가 삶을 재단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고 싶지 않아서 행복이나 성공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요.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진짜 행복에서 멀어지는 것 같거든. 다들 '행복한 삶'이라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면 좋겠어. 내가 비관주의자라서 그런가?
Q : 매 순간 행복하지 않더라도, 단단하게 살고 싶어요.
A : 단단해지려면 부드러워지세요. 생각은 날카롭고 냉정해도 되거든요. 근데 마음은 달라요. 포용할 수 있어야 해요. 밤송이 같은 생각을 진흙 같은 마음에 품는다고 봐도 좋겠네요. 품어주는 것만큼 단단한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 📌 '마흔 공부' 인터뷰 시리즈
「 40대는 인생의 전반전을 돌아보고, 후반전을 준비할 나이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시기를 잘 통과할 수 있을까요? 중앙일보 '더, 마음' 섹션에서 그 답을 찾는 '마흔 공부' 인터뷰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매주 금요일 '더, 마음' 뉴스레터로 기사를 받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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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연 기자 sun.hee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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