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은 힘겹고 형제는 싸우고…‘요지경’ K-승계 [스페셜리포트]

명순영 매경이코노미 기자(msy@mk.co.kr) 2024. 4. 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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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약품그룹 일가의 갈등은 재계 경영권 분쟁 역사에서 또 하나의 특이한 사례였다.

타계한 창업주의 부인과 딸, 그리고 아들 2명이 연합하며 갈라선 경우는 그간 찾아보기 힘들었다. 또한 재무적 투자자가 아니라 현업(바이오)을 모르는 전략적 투자자(OCI)를 끌어들여 경영권 장악을 시도했다는 점도 전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경영권 분쟁의 시발점이 된 상속세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한미약품그룹 모녀가 OCI와 손잡고 경영권을 노린 이면에는 임성기 한미약품그룹 창업주 별세 이후의 막대한 상속세가 자리 잡고 있어서다.

재계와 경영학계에서는 한미약품그룹 분쟁을 계기로 국내 오너 경영의 승계 과정이 왜 시끄러운지, 경영권을 둘러싼 가족 간 갈등은 왜 빈번한지 조명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 LG, 현대차, 롯데 등 오너 체제인 5대 그룹은 물론 두산, 금호 등 형제가 우애 좋다는 그룹에서조차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지난 3월 29일 별세한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의 빈소에서도 상처는 남아 있었다. ‘효성 형제의 난’을 촉발했던 둘째 아들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 이름은 빈소 전광판에 공개된 유족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부모와 자식이 절연하고, 형제가 대립하는 ‘K-가족 경영’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1] 장자 승계가 뭐기에…

차남에게 물려줬더니 각종 분쟁

“LG는 1947년 창업 이후 LG가(家)의 일관된 원칙과 전통을 바탕으로 경영권을 승계해왔다.”

LG그룹은 지난해 구광모 회장을 상대로 모친과 여동생이 상속 분쟁을 일으키자 이 같은 입장을 내놨다. LG그룹의 장자 승계 원칙을 다시 한번 천명한 것.

지금까지 LG그룹은 원활하게 장자 중심의 승계를 진행해왔다. 구인회 창업주가 타계한 1969년 장남인 구자경 당시 금성사 부사장이 회장으로 추대됐다. 그러자 창업주의 동생인 구철회 사장은 경영에서 퇴진했다. 2대 회장인 구자경 명예회장은 1995년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줬다. 그러자 구본무 회장의 숙부들은 손을 뗐다. 2018년 5월 구본무 회장 별세 후 장남인 구광모 회장이 경영권을 받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장자 승계와 관련한 상속 분쟁이 일어났다.

장자 승계는 재계의 오랜 관행이기도 했다. 한화그룹과 코오롱그룹도 장자 승계를 따라왔다.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의 갑작스러운 타계 이후 장남인 김승연 회장이 이어받았다.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은 이웅열 명예회장에게 넘겼다. 2018년 이 명예회장이 은퇴하며 아들인 이규호 사장을 중심으로 후계 구도를 재편했다.

반대로 장자 승계 원칙을 깼을 때 분란이 발생한 경우가 많았다. 재계 1위 삼성그룹을 세운 이병철 창업회장은 1987년 장남이 아닌 3남 이건희 선대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줬다. 유교적 가치보다는 경영 능력이라는 실리를 우선시했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이병철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은 창업주가 남긴 재산을 둘러싸고 소송전을 벌였고, 둘 간은 결국 화해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재계 형제 분란 사례인 2000년 현대그룹 ‘형제의 난’ 역시 장자 승계가 발단이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후계자 자리를 두고 차남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과 5남인 정몽헌 현대그룹 선대회장이 맞섰다.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몽헌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하며 왕자의 난은 일단락됐다. 정몽구 회장은 자동차 계열사를 계열 분리, 재계 서열 3위의 현대차그룹을 키웠다.

롯데그룹에서는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 장남인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승계를 두고 다퉜다. 신동주 회장은 장남에게 일본을, 차남에게 한국을 맡기기로 한 신격호 회장의 뜻을 신동빈 회장이 거스르고 있다며 여전히 반발하는 중이다.

경영권 분쟁과 상관없이 장자 승계만을 무리하게 고집하지 않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아워홈은 장자 승계 원칙을 지켜온 범LG그룹이다. 구지은 아워홈 부회장의 부친은 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3남 故 구자학 아워홈 전 회장이다. 구자학 전 회장은 1남 3녀를 뒀는데, 구 부회장은 막내다. 그는 다양한 직무를 경험하고 2009년 아워홈의 자회사인 캘리스코 대표를 맡아 사세를 급격히 키웠다. 구자학 전 회장 장남인 구본성 전 부회장이 아워홈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그러나 2021년 구 전 부회장이 보복 운전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후, 세 자매가 합심해 구 전 부회장을 해임하고 구 부회장을 신임 대표로 선임했다. 구 부회장이 범LG그룹의 장자 승계를 깨고 경영권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미약품 분쟁에서 임종윤·임종훈 두 형제가 승리했다. 한미약품그룹 갈등은 모녀와 두 아들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분쟁의 역사를 남겼다. 사진은 주총에 나선 임종윤·임종훈 사장. (임종윤 측 제공)
[2] 능력 갖춘 전문경영인 발굴 부족

이재용 회장 파격 선언 “자녀 승계 NO”

“삼성이 이(李)씨 왕조를 끝내려는 신호를 보냈다.”

지난 2020년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재용 회장이 자녀들에게 경영을 승계하지 않겠다는 사과문을 발표한 기사의 제목을 그렇게 뽑았다. 이 회장은 당시 준법감시위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제 아이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깜짝’ 선언을 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지만, 앞서 언급한 상속세율이 그중 하나였다. 창업자가 50% 지분을 갖고 시작해도 4대째로 가면 6.25%밖에 남지 않아 대주주 자격을 상실하는 결과로 귀결된다. 평소 이 회장이 이런 점을 고려해 아들에게 승계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변에 말해왔다.

이 회장 발언이 파격적으로 들렸던 이유는 국내 재계에서는 자녀에 기업을 물려주는 일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한국식 오너 경영은 빠르게 성과를 이끌어온 비결로 꼽혀왔다. 일례로, 삼성전자가 일본 전자업계를 잡고 세계 최고로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로 오너 경영이 언급되기도 한다. 전문경영인은 자신의 임기에 실적을 내야 더 많은 급여를 받기 때문에 단기적 안목에서, 오너는 회사의 미래를 더 많이 생각해 중장기에 비중을 더 두기 마련이다. ‘삼성웨이’를 저술한 송재용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오너인 이건희 회장이 도전적인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고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위기감을 불어넣어 삼성의 성과를 높였다”고 강조했다.

해외에서도 오너 경영이 적지 않다.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이 5대에 걸쳐 160여년간 이끄는 발렌베리그룹이 대표적이다. 이 그룹은 지주회사를 통해 아스트라제네카(제약), 에릭슨(통신), 일렉트로룩스(가전), 사브(항공) 등 핵심 자회사를 관리하고 가문이 세운 재단이 세금 부담 없는 승계와 차등의결권 제도를 활용해 지주회사를 지배하는 구조다. 가문의 경영권을 보장받는 대신 재단을 통해 수익금의 80%를 과학·기술·의학 분야 연구 등 공익적 목적에 사용한다.

하지만 오너가 경영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는데도 기업 지휘봉을 잡는 사례가 있다. 올해 정용진 신세계 회장은 부회장에 오른 지 18년 만에 회장으로 승진했다. 그룹은 “정 회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을 ‘정면 돌파’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 회장이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던 지난 5년간 신세계 주가는 60% 가까이 하락했다. 그의 경영 오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정 회장의 모친인 이명희 총괄회장은 ‘신상필벌’을 강조해왔지만 정용진 회장은 영전했고, 전문경영인이 실패의 책임을 졌다.

해외에서는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주지 않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한창 경영 일선에서 뛰던 당시인 2004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기술고문(당시 CEO)은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고 세 자녀에게는 각각 1000만달러(약 112억원)씩만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대외적인 공표였다.

해외에서는 오너냐 전문경영인이냐를 구분하지 않고 기업 입장에서 승계 원칙을 수립하는 게 일반적이다. 세계 최고 투자 회사 버크셔해서웨이를 이끄는 워런 버핏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은 후계자로 전문경영인을 선택했다. 지난해 오랜 단짝인 찰리 멍거 부회장이 타계한 이후 후계 구도에 관심이 높아졌다. 1965년부터 버크셔해서웨이를 이끌어 온 버핏 회장 나이가 올해 93세를 넘기며 세대교체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뚜껑을 열어보니, 버크셔해서웨이를 이끌 후계자는 전문경영인 그렉 아벨 부회장이었다. 아들인 하워드 버핏은 회장직만 맡을 듯 보인다. 버크셔해서웨이를 키울 인물로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이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업 승계는 100년, 200년 기업을 향한 지속 성장의 필수 조건이다. 오너냐 전문경영인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혁신’의 주체가 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애플은 잘 고른 전문경영인 후계자 팀 쿡 CEO 하나로 성장세를 이어갔다. 반면 전통 기업에서 디지털 기업으로 전환하며 잭 웰치가 고른 후계자(제프리 이멜트)가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해 GE를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에서도 오너와 전문경영인을 경쟁시키려는 행보가 엿보인다. 재계 안팎에선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경영과 소유를 분리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분은 자녀에게 넘기되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이른바 ‘따로 또 같이’라는 경영 철학으로 계열사별 이사회 의사 결정 권한에 무게를 더했다. 본인 자녀일지라도 경영권을 물려받으려면 경쟁을 통해 능력을 검증받아야 한다는 게 최 회장 생각이다. 최 회장은 2021년 BBC 인터뷰에서 경영권 승계에 대해 “기회는 (전문경영인 등)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며 “자식도 노력해야 (경영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이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조석래 명예회장의 빈소를 방문했다. ‘효성 형제의 난’을 일으킨 조현문 전 부사장은 유가족 명단에서도 빠졌다. (연합뉴스)
[3] 폭탄 상속세가 분쟁 도화선

세계 최고 상속세에 승계 갈등 ‘쑥’

통상 재계 거목의 별세 소식 이후에는 상속세 이슈가 뒤따른다. 경영권을 넘겨받기 위해 총수 지분을 상속받으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을 국가에 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재벌 그룹 오너 일가의 특징 중 하나는 ‘현금’이 없다는 점이다. 자산의 대부분이 주식이기 때문이다.

지난 2020년 이건희 회장 타계 이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는 2021년부터 5년간 분할 납부를 하고 있다. 이들이 내야 할 상속세는 12조원대에 달한다. 매년 상속세 마련을 위해 계열사 지분을 매각하거나 주식을 담보로 높은 금리의 대출을 받아야 하는 실정이다. 경영권 약화 위험을 무릅쓰고 지분을 매각할 만큼, 상속세가 과하다는 평가가 재계 안팎에서 나오는 이유다.

이번 한미약품그룹의 경영권 분쟁은 가족 구성원 간 깊은 갈등이 원인이기도 했지만, 상속세가 시발점이었다는 점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과 세 자녀(임종윤·주현·종훈)는 창업주인 임성기 회장으로부터 주식을 상속받으며 총 5300억원 규모 상속세를 부과받았다.

송 회장과 임주현 사장 측은 OCI와의 상속세 납부와 주담대 청산 등을 위해 기업 통합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해왔다. 송 회장은 OCI와 통합으로 한미사이언스 지분 670만2412주를 OCI홀딩스에 넘기며 약 2500억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송 회장은 OCI와의 기업 통합을 결정한 배경에 대해 “임성기 회장 별세 후 5400억원 규모 상속세가 부과되고 그룹 지주사 한미사이언스 주가가 3만원 이하로 하락했을 때 ‘한미그룹을 통째로 매각하는 상황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절박한 위기감에 휩싸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주식을 상속받은 경우 막대한 상속세를 내는 과정에서 가족 간 불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지분을 건드리지 않고 현금을 마련할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2019년 조양호 회장 별세 후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과 누나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의 ‘남매의 난’이 빚어졌다. 당시 신고한 상속세는 모두 2700억원이었다. 당시 조현아 전 부사장이 반발했던 주요 이유가 상속세를 부담할 만한 자리가 주어지지 않아서였다는 뒷얘기도 있다. 상속세를 내려면 중요한 보직을 맡아 연봉을 챙겨야 하는데 적당한 자리를 주지 않아 반기를 들었다는 해석이 주류였다.

재계에서는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의 타계 이후 불거질 상속 이슈가 재계의 과도한 상속세에 대해 환기를 일으켜주길 기대한다. 비상장 계열사 지분과 부동산 등을 포함한 조 명예회장의 재산은 최소 7000억원이 넘는다. 이에 따라 상속세만 4000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현행 상속세는 사망자 유산을 기준으로 10~50%의 5단계 초과누진세율로 과세한다. 최대주주 등으로부터 주식을 상속받을 경우에는 평가액에 할증평가(20% 가산)를 적용해 60%의 세율로 적용될 수 있다. 최고세율(50%)은 OECD 회원국 중 일본(55%)에 이어 2위지만, 대주주 등으로부터 주식을 상속받을 경우 더 높아지는 구조다.

높은 상속세율 탓에 오너의 지속 경영이 어렵다는 목소리도 있다. 국내 1위 손톱깎이 회사 쓰리쎄븐은 2008년 창업주 김형규 회장 타계 후 유족들이 150억원의 상속세 부담으로 회사 경영권을 중외홀딩스에 매각했다. 밀폐용기 국내 1위 기업인 락앤락도 창업주 김준일 회장이 상속세 부담을 이유로 2017년 홍콩계 사모펀드 앵커에쿼티파트너스에 회사를 1조원에 팔았다. 국내 가구 업계 1위 한샘도 경영권을 사모펀드 운용사에 넘겼다. 국내 1위 종자 기업 농우바이오, 역시 국내 1위인 콘돔 제조사 유니더스도 상속세 문제가 불거지면서 회사를 매각했다. 동진섬유나 에이블씨엔씨 등도 끝내 가업 잇기를 포기했다. 김정주 넥슨 창업자 사망 이후 유족들은 상속세로 NXC 지분을 정부에 납부했다. 그 결과 기획재정부가 NXC 2대 주주가 됐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지난해 상속·증여세 문제를 언급하며 “셀트리온이 국영 기업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도 없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4호 (2024.04.10~2024.04.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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