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나에게 고난만 안겨줘'… 우울한 기분을 만드는 생각

김병수정신건강의학과 김병수 원장 2024. 4. 5.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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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의 우울증클리닉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정신과 약물도 거의 없었고, 인지행동치료가 태동하기도 전인 20세기 초반까지는 ‘정신분석치료’가 우울증의 중요한 치료법이었다. 정신분석치료는 환자가 자기 내면을 탐색하면서 감정과 욕구, 갈등과 방어 기제를 점차 이해하고 무의식을 의식화하도록 돕는다. 환자의 과거 경험, 부모 형제 관계, 그리고 치료자를 향해 나타나는 전이를 다루고 해석한다. 정신분석치료는 한 번 상담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오래 기간 지속해야 한다. 하지만 우울증에 대한 실제 치료 효과는 증명돼있지 않다.

인지행동치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론 벡은 정신분석치료의 효과에 의문과 회의를 가졌다. 그는 부정적으로 왜곡된 사고가 우울증과 연관돼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1950년대에 우울증 환자의 인지 구조를 변화시키는 치료법을 개발했다. 과거와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치료와는 다르게 인지행동치료는 우울증 환자의 생각과 현재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치료 기법과 기간이 체계적으로 정해져 있다. 인지행동치료는 급성기 우울증 치료에 효과적일 뿐 아니라 장기 추적 연구를 통해 재발 위험을 줄인다고 입증돼 정신의학 표준 치료로 자리잡았다.

구직 활동을 하던 청년이 취업 시험에서 탈락한 후부터 친구도 만나지 않고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무기력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울한 기분에 젖어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시험에서 떨어진 나는 인생 낙오자야. 취업한 나를 친구들이 무시할 거야’ 라는 생각이 계속 떠오른다고 했다. 우울증 환자에게 흔히 관찰되는 역기능적 가정 (dysfunctional assumption) 또는 조건적 신념 (conditional belief)이 이 청년에게 관찰됐다. ‘완벽해야만 인정 받을 수 있어’ 혹은 ‘실패하지 않아야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어’와 같은 사고 방식을 일컫는다. ‘반드시 ~ 해야만 한다 (must)’ 혹은 ‘꼭 ~ 이어야 한다 (should)’ 그리고 ‘만약/그렇다면 (if/then)’도 여기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만 한다’ ‘이번 시험에서 떨어지면 내 인생은 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재앙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우울증을 스스로 끌어당기는 꼴이 되고 만다.

‘내 상황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무시할 거야’라는 역기능적 사고 때문에 타인을 꺼리고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나를 무시할 거야’하고 믿으면 위로를 받을 수도 없다. 결국에는 고립되고 만다. 이런 자신을 보며 ‘나는 못난 사람이라서 도와주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야’하고 믿어버리면 부정적 사고의 악순환에 갇혀 버린다.

구직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에게 “노력하면 반드시 원하는 곳에 취직할 수 있으니까 희망을 가져. 넌 할 수 있어!”라고 응원하는 것이 인지행동치료는 아니다. 입사 시험 탈락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좋은 직장에 들어갈 거라고 그 누구도 보장해줄 수 없다. 아무리 애써도 당장 일을 구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인지행동치료는 우울증 환자에게 “앞으로 다 잘 될 거야”라는 긍정적 사고를 불어넣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는 언제나 역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자가 수용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신에게 유익한 행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친구나 가족이 시험에 불합격했다고 그들에게 대놓고 실패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우울증 환자는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비난한다. 해결할 수 없는 자기 결함 때문에 시험에 떨어진 것이라고 단정하거나 자신에게만 내려진 형벌처럼 받아들인다. 이렇게 믿으면 다시 도전하려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취업이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면 입사 시험에서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구직 과정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현실적인 관점을 취할 수 있어야 스트레스가 닥쳐도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다. 

뿌리 깊게 마음속에 박혀 있는 부정적 믿음을 일컬어 ‘핵심 신념’이라고 한다. ‘나는 쓸모 없는 존재야’라고 자신을 비하하고 ‘세상은 나에게 고난만 안겨 줘.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어’라는 생각에 현실은 암울하다고 믿고 ‘앞으로도 내 삶에는 고통만 있을 거야. 달라질 게 하나도 없어’라고 비관적으로 미래를 바라 봐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다. 흔히 하는 비유로 파란 색안경을 끼면 보면 모든 것이 그 색깔을 띄는 것처럼, 우울증 환자는 우울하게 채색된 유리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보고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스트레스 없는 삶은 없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예상치 못한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부정적 사고에 휩싸여 있으면 이런 현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스트레스 받으면 활성화되는 부적응적 믿음을 ‘인지 도식(cognitive schema)’이라 한다. 스트레스가 닥쳤을 때 ‘나는 작은 스트레스도 못 견디는 나약한 사람이야’라는 인지 도식에 따라 행동하면 결국 자신의 믿음처럼 그렇게 변한다. 부정적 믿음이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나는 못난 사람이라 노력해도 취직이 될 리 없어. 그냥 포기하는 게 나아’라는 생각에 지배당하면 다시 취업 준비를 할 동기도 생기지 않고, 파트타임 일을 구하려는 시도조차 안 하게 된다. 비관적인 예측이 무기력을 부르고,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못하게 되니 자신이 예측한대로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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