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에 혼자 살아남아 서러운 70년”…제76주년 4·3희생자 추념식 봉행

문정임 2024. 4. 3.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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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6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제단에 헌화분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버지, 나 얼굴 알아지쿠과? 아버지 없는 세상, 서러워수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데 얼굴을 모르니 꿈에 나왔어도 내가 알아볼 수가 어서실거우다.”

1948년 4월 제주도는 흉흉한 소식과 함께 점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 그저 이 고통의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당시 다섯 살이던 김옥자씨 가족도 그랬다.

늦가을 소개령이 내려지자 김 어르신 가족은 화북리 곤을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며칠 뒤 아버지는 외양간에 두고 온 소 여물을 주고 오겠다며 나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듬해 엄마와 남동생도 죽었다. 김 어르신은 홀로 남겨졌다. 지난 70년은 슬픔 속에 정지된 시간이었다.

제76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봉행됐다.

오전 10시 안개가 가득 내려앉은 추념광장에 묵념 사이렌이 울려 퍼지며 추념식 시작을 알렸다.

현장에는 생존 희생자와 유족, 각계 내빈과 도민이 자리해 4·3영령을 추모하고 유족의 아픔을 위로했다.

김옥자 할머니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재현한 자신의 아버지 영상을 보고 손녀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배우 고두심의 내레이션으로 4·3 당시 5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김옥자 할머니의 사연이 공개됐다.

김옥자 어르신은 1948~1949년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 남동생을 모두 잃고 막내 이모 손에서 자랐다. 열다섯에 육지로 간 뒤 20대에 다시 제주로 돌아오기 전까지 홀로 낯선 곳에서 채소 장사, 공장 여공, 식모살이 등을 하며 힘겹게 살았다. 김 어르신은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김 어르신의 손녀 한은빈(17) 양이 유족 대표로 편지를 낭독했다.

한 양은 “할머니는 매년 새해 달력을 걸 때 제일 먼저 음력 동짓달 스무날을 찾아보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 날이 바로 할머니의 아버지, 제 증조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이다”라며 “아직 죽음의 의미를 잘 모르는 나로서도 홀로 남겨진 딸이 어둠 속에서 제사를 지내며 느꼈을 슬픔에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한 양은 “5년 전 70년 만에 애써 외면했던 곤을동(4·3 당시 불에 타 사라짐)을 찾았지만 할머니는 말 한 마디없이 돌아서셨다”며 “할머니의 시간은 여전히 어린 옥자에 머물고 있는데 아버지의 얼굴은 그 시간 속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한 양의 편지 낭독이 끝나자 가수 인순이가 ‘아버지’라는 곡을 부르며 유족을 위로했다.

이날 추념식에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김 어르신을 위해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아버지의 얼굴을 구현했다.

AI로 복원된 부친은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다섯 살 딸을 불렀다. 화면을 보는 김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추념식에는 한덕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인사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와 정춘생 후보, 녹색정의당 김준우 대표, 진보당 윤희숙 대표, 새로운미래 오영환 선대위원장, 천하람 개혁신당 총괄선대위원장 등 정치권 인사들이 참석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추념사를 통해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모든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크나큰 아픔을 감내해오신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께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이어 “제주도민의 뜻을 받들어 4·3이 화해와 상생의 정신의 표본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 나가겠다”고 했다.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추념식 인사말을 통해 “그동안 우리는 모두의 노력으로 희생자에 대한 국가 보상, 직권 재심을 통한 명예 회복, 뒤틀린 가족 관계를 바로잡는 제도 개선까지 4·3의 진전된 봄을 꽃 피울 수 있었다”며 “낡은 이념의 시대의 종결을 알리고 사람 중심의 빛나는 세상을 열어가고 있다”고 했다.

행정안전부가 주최하고 제주도가 주관한 제76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은 ‘불어라 4·3의 봄바람, 날아라 평화의 씨’를 주제로 열렸다.

2022년 당선인 신분으로 추념식장을 찾았던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추념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추념식은 바리톤 김동규, 소프라노 한아름, 도란도란 합창단이 참여해 4·3 영령의 진혼을 기원하는 추모 공연으로 마무리됐다.

행사가 모두 끝난 뒤에는 참배객들이 위령 제단에서 헌화·분향하며 4·3 영령을 추모했다.

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4·3특별법에 규정돼 있다.

4‧3사건 희생자는 올해 1월 기준 1만4822명, 유족은 11만 494명이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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