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수 작가의 초단편소설, 초보 운전

천일홍 2024. 4. 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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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 Fearless Female, 유쾌하고 겁 없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1편의 소설과 1편의 그림이 도착했다.
「 초보 운전 」
어떤 일이든 처음은 다 어려운 법이라지만 이건 그런 말로 퉁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자꾸만 심장을 조이는 압박감이 밀려와 핸들을 움켜쥔 손에 땀이 났다. 운전 스승이었던 언니 없이 혼자 도로를 달리는 첫날이었다.

언니와 함께 운전 연습을 하면서 자주 갔던 복합 쇼핑몰이 목적지였다. 긴장감을 억누르며 주변 차량 속도에 맞추어 운전했지만 어느샌가 앞차와의 간격이 크게 벌어졌다. 다른 차들은 날듯이 달려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나는 액셀을 살짝 밟아 가속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겁을 집어먹는 나를 보며 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의 가장 큰 문제는 상상력이야. 비관적인 상상을 그만해.”

나는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 얼굴을 마주하는 심리 상담사 역시 내게 비슷한 말을 했다. “미래에 대한 안 좋은 상상을 너무 많이 하시네요.”

번아웃으로 인한 무기력증 때문에 찾아간 상담 센터에서 그동안 내가 과도한 불안을 느끼며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상담사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물었고, 나는 아름다운 경치로 둘러싸인 캠핑장에서 차박을 하며 심신을 치유하고 싶다고 답했다. 주말에도 업무 지시를 내리는 팀장에게 저항하기 위해 휴대폰 전원을 끄고서 강가나 숲속에 앉아 혼자 고독을 씹고 싶었다. 상담사는 고독을 씹든 껌을 씹든 원하는 걸 실컷 하고 오시라면서 내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그 말에 고무된 나는 만기된 정기예금으로 드림카를 덜컥 장만했다. 엄마는 상의도 없이 결혼 자금을 멋대로 썼다면서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나는 그런 진부한 계획을 세운 적이 없었으므로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장롱면허를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주행 연습이 가장 중요하지만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공부도 필요할 것 같았다. 회사에서 나는 문제를 맞닥뜨리기도 전에 해결책을 찾는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준비는 철저하나 전투엔 약한 직원이라서 주로 후방 지원 업무를 맡았는데, 영업직으로선 최악의 포지션이 아닐 수 없었지만 나에겐 찰떡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운전면허를 따자마자 교통사고 장면을 모아놓은 〈한문철의 블랙박스 리뷰〉를 모조리 보았고, 그 결과 도로 위의 무법자들에게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이건 뭐, 달리는 흉기가 따로 없었다.

언니는 운전이 비교적 안전한 스포츠에 속한다며 나를 끊임없이 격려했다. 여성일수록 운전을 꼭 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 이유를 묻자, 운전을 하지 않았다면 업무상 필요할 때 기동성을 발휘하기가 어려웠을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언니의 회사는 성별이 승진에 영향을 미치는 곳이었다.

“초보 시절엔 운전하다가 욕을 왕창 먹을 수도 있어. 그래도 당황하지 말고 꿋꿋하게 네 길만 가면 돼.”

“내가 욕먹을 짓을 했을 때만 그런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가끔 로드 레이지 기질이 다분한 운전자를 만날 수도 있으니까. 개떡같이 운전하면서 다른 운전자들한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어.”

“얼마나 기력이 넘치면 그럴 수 있을까?”

“너는 확실히 그런 과가 아니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언니와 함께 도로를 달릴 땐 개떡같이 운전하는 난폭 운전자를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차선을 변경하려 할 때마다 양보해주는 운전자가 많았다. 언니가 신기하다고 말할 정도로 모두가 나의 미숙한 운전 솜씨를 배려해주는 것 같았다. 분명 어제까진 그랬다.

쇼핑몰로 향하는 동안 몇 번의 차선 변경을 시도했지만 너그러이 양보해주는 차량은 한 대도 보지 못했다. 다들 날카롭게 경적을 울렸고, 내가 끼어들지 못하게끔 앞차 꽁무니에 자신의 차를 바짝 붙였다.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자세가 느껴졌다. 찌푸려진 나의 미간이 도무지 펴질 새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문제의 차와 맞닥뜨렸다.

고가 옆으로 차선을 변경하기 위해 깜빡이를 켰을 때, 그 차가 멀리서부터 경적을 울리며 맹렬하게 달려왔다. 끼어들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라는 걸 알면서도 은근히 반발심이 들었다. 혼자 도로를 전세 낸 것도 아니고 왜 저리 열렬하게 거부 의사를 표현하는 걸까. “다들 비켜!” 하고 외치는 폼으로 달려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내가 운전을 서툴게 한 대가로 먹는 욕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핸들을 옆으로 꺾었다. 물론 깜빡이를 계속 켜고 있었으므로 꿋꿋하게 차선을 변경하려는 나의 의지를 그 차가 인지했으리라고 여겼다. 별수 없이 그 차는 내 뒤에서 달렸다. 그런데 이 망할 차가 내 꽁무니에 바짝 따라붙는 게 아닌가. 내가 브레이크를 밟으면 추돌 사고가 일어날 정도로 간격이 좁았다. 빨리 달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급기야 그 차는 터널 안에서 상향등을 여러 차례 켰다 끄면서 내게 공격적 메시지를 보내더니, 차선 변경이 금지된 곳에서 차선을 바꿔 내 왼편으로 나란히 달렸다.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운전자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으나 짙게 선팅된 차량이라 실루엣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 차가 차선을 무리하게 변경해 내 앞으로 아슬아슬하게 끼어들었다. 흰색 SUV. 그제야 정확한 차종을 알 수 있었다. 번호판 끝의 두 자리가 17이었다.

터널을 거의 다 빠져나간 감속 구간에서 갑자기 17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나도 기겁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상체가 앞으로 휙 쏠리며 안전벨트가 내 몸을 꽉 붙들었다. 심장이 달음박칠쳤다. 백미러를 얼른 확인해봤더니 다행히 뒤차와 거리가 많이 벌어져 있었다. 나는 재빨리 차선을 바꾸며 경적을 세게 눌렀다. 그러곤 창문을 열고 크게 외쳤다.

“여기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어떡해요! 죽을 뻔했잖아요!”

17의 차창이 아주 약간 내려갔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높이 치켜든 누군가의 왼손이었다. 여자인가, 남자인가. 당최 성별을 가늠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젠더리스 손이었다. 그러나 성별보다 중요한 것은 운전자가 내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선 중지. 외계인이 아닌 이상 욕이라는 걸 명백히 알 수 있는 지구인의 의미 깊은 손짓이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내가 로드 레이지와 거리가 멀다는 언니의 말은 틀렸다. 운전 실력도 미숙한 초보 주제에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공격수의 기질이 겁도 없이 솟구쳐 나왔다. 저만치 멀어진 17을 따라잡기 위해 나는 액셀을 힘주어 꽉 밟았다. 속도 계기판 바늘이 과거의 내가 두려워하던 속도를 향해 급상승했다. 분노 에너지로 달궈진 두뇌가 두려움을 깡그리 지웠다. 오로지 17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느새 나는 주변 차량을 모조리 추월하며 17의 꽁무니만 사납게 뒤쫓고 있었다. 17의 흰색 엉덩이를 걷어차고 찌그러뜨리는 상상을 하며 나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와 온몸에 휘몰아치는 에너지를 느꼈다. 근 몇 년간 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실감이 밀려왔다.

혼자서 고독이나 껌을 씹을 게 아니라 최대 가능치의 스피드를 즐겨야 응어리진 가슴이 풀리는 것이었나? 문제가 일어나기도 전에 해결책을 찾아놓는 삶을 추구할 게 아니라, 아무런 잘못이 없는 나의 뒤통수를 자꾸만 때리고 기분 나쁘게 흘겨보기도 하는 팀장에게 숙성된 반발심을 보여줬어야 했나?

내비게이션 앱이 작동되던 휴대폰 화면이 진동음과 함께 바뀌었다. 팀장의 전화였다. 주말임에도 업무를 들이밀며 연락하는 나쁜 습관을 따끔하게 고쳐줄 사람은 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17의 꽁무니에 바싹 붙으며 저항의 의지가 솟아났다. 나는 검지를 뻗어 팀장의 전화를 가볍게 튕겨냈다.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지만 이번에도 쳐내버렸다. 동시에 내 차는 불붙은 휘발유처럼 열기를 내뿜으며 17을 추월했다. 드디어 복수의 순간이 도래했다. 나는 차창 밖으로 왼손을 내민 뒤 똑똑히 잘 보라는 듯이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은 손가락을 세우려는 참에 카톡 미리보기 화면에 뜬 팀장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당연히 나를 걱정해서 보낸 메시지가 아니라 염려를 가장한 질책에 가까웠다. 나는 자기중심적인 팀장과 도로 위 무법자인 17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동시에 날렸다.

17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초보 딱지를 붙인 운전자에게 패배했다는 수치심에 열의가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맹렬히 달려 나가면서 팀장에게 음성 입력으로 외치듯 답장을 보냈다.

― 주말엔 좀 쉬게 해주십시오!

청량한 웃음이 회색빛 도로 위에 팡팡 터졌다.

Writer 이서수

어딘가 불안하지만, 가장 치열한 지금을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쓴다.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 단편소설 〈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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